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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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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캅스 보던 서울극장 추억 속으로”…사라지는 그 시절 데이트 장소

산업 일반

1970년대를 빛내던 서울 종로의 극장가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그 시절 나팔바지와 백구두를 신은 신사·숙녀들로 바글바글했던 영화관은 이제 한적하고 낡은 건물로 여겨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공간으로 남겨지고 있다. 올해로 개관한 지 42년 된 서울극장 역시 오는 8월 31일을 기준으로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 3일 서울극장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폐관 소식을 알렸다. 서울극장 측은 “1979년부터 약 40년 동안 종로의 문화중심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울극장이 2021년 8월 31일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하게 됐습니다”라며 “오랜 시간 동안 추억과 감동으로 함께해 주신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작별 인사를 내걸었다. 서울극장은 폐관 이유에 대해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영난 악화”로 설명했다. 서울극장은 단성사와 피카디리, 허리우드, 국도극장, 대한극장 등과 함께 우리나라 70년대 영화관 전성기를 이끌었던 극장이다. 서울극장은 1989년에 상영관을 3개관으로 늘려서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라는 타이틀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가 전국적으로 생겨나면서 서울극장은 점차 쇠락했는데 지난해 코로나19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영업을 종료하게 됐다. ━ 70년대 낭만 책임지던 ‘피카디리’ ‘허리우드’ 서울극장이 8월에 문을 닫음으로써, 7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채워주던 영화관 중 대한극장만이 영업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1913년에 세워진 국도극장은 1999년도에 허물어지고 현재는 호텔 ‘베스트웨스턴 프리미어 호텔국도’가 운영되고 있고, 1960년에 개관한 피카디리는 현재 CGV로 흡수돼 ‘CGV 피카디리 1958’로 변신했다. 1969년에 문을 연 허리우드 극장은 2009년 실버 영화관으로 바뀌어 노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관이 됐다. 일명 ‘추억의 흥행작 전용 극장’으로 70년대 종로 극장가에서 상영하던 옛 영화를 다시 상영한다. 7월에 상영하는 추억의 흑백영화로는 ‘피크닉’ ‘노다지’ ‘파리의 연인’ 등이 있다. ━ 4차 대유행으로 정부 지원 절실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는 2008년 부도를 겪으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2019년에 한국 영화 탄생 100돌을 맞아 ‘단성사 영화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단성사는 최초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한 극장이었다. 현재까지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대한극장은 1958년에 세워진 영화관으로 2001년에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고, 최신 영화를 상영하며 운영되고 있다. 영화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대형 멀티플렉스 또한 어려운 상황 속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극장의 영업 종료 소식은 영화관 사업의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는 현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거리두기로 극장 내 좌석 띄어 앉기, 취식 금지, 영업시간 단축 등 극장 운영의 악재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정부의 지속 가능한 지원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서울극장 폐관은 시대를 상징하는 영화로운 장소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대 속 극장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를 의미하고, 그 가운데 지원 예산을 확보해 영화 산업을 지켜나가야 하는 골든타임임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2021.07.10 10:00

2분 소요
내가 변했나, 세상이 바뀌었나

산업 일반

한때 미국을 등졌었던 세 남자가 있다. 김지하 시인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 이인영 국회의원, 1980년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임종수씨(현재 광주광역시청 공보계장). 이들에겐 19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과 미국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한쪽은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뒤 양민을 학살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방조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결국 군사정권은 종식됐지만 미국은 여전히 건재하다. 미국은 그들에게 여전히 제국주의국가일까? 1980년대와 2008년의 미국, 그들에게 미국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꼽혔던 김지하씨는 미국 구석구석과 아시아, 유럽 등을 둘러본 뒤 해외방문기 ‘예감’을 지난해 출간했다.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전화인터뷰에서 김지하씨는 먼저 70, 80년대 자신의 미국관부터 설명하려 했다. 당시엔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운동가가 제3세계적 관점에서 미국을 비판했다. 세계를 패권으로 지배하려는 군사·경제 대국으로 미국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김씨의 미국 비판도 그런 일반론의 범주였다.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지레 짐작했을 뿐 내가 반미 발언을 했거나 미국더러 물러가라 말한 적이 없다.” 주한미군이 물건을 훔친 한국 아이를 학대한 사건이 터져 ‘한미행정협정(SOFA)’을 체결하라는 시위에 참여한 것이 다였다. 반미 주장이라기보단 “정당한 분노 표출에 가까웠다”고 그는 설명했다. 김씨를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긴 독재정권이 그에게 미국행을 권할 때도 한사코 거절했다. 6·3세대 대표주자인 김중태씨가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을 때 “사람이 변했다”는 느낌이 와닿은 탓도 있다. “김중태씨는 세계 자본주의 구조에 비판적이지도 않고 용감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미국에 가면 정치생명이 끝날까 봐 경계했다. 패권주의 국가에 의해 세뇌 당한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가본 미국은 19세 학생운동 시절 생각처럼 경제공항에 휘청대거나 쉽게 망할 나라로 보이지 않았다. 애틀랜타에서 LA까지 자동차로 1주일 동안 미국을 동서로 횡단하면서 바라본 광활한 대지 위에 선 거대한 자연과 인공구조물들은 미국에 대한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내가 미국을 제대로 모른 채 껍데기만 보고 산 게 아니냐”는 자괴감이 들었다. 물론 넘쳐나는 노숙자 등 문명의 그림자도 눈에 들어왔다. 미국여행 결과 “미국도 비판할 게 많지만 제국주의로 못 박는 건 단견”이란 생각에 미쳤다. 김씨는 “미국이 고정 불변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 변화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나 힐러리 같은 인물이 미국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현실도 미국 기준에선 혁신에 가깝다. “북·미 관계가 경천동지할 지경으로 급진전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미국 스스로가 정치·경제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는 “나는 좋고 상대는 나쁘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 세련되고 보편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아시아적 정신과 미국의 서양 물질문명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파트너십을 구축했으면 한다.” 이인영 국회의원(통합민주당)은 통일·반미 학생운동의 구심점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 연합)의 전신인 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냈다. 반미·자주의 선봉에 섰던 80년대 학생운동권의 대표주자는 국민의 친미 여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어려워진 경제 탓도 있다.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야 그나마 돌파구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국민이 있다”고 그가 말했다. 물론 ‘퍼주기’ 오해를 받았던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 보수 언론들의 흠집내기 공세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발전 모델은 ‘작은 미국’화로 가는 것인데 그게 좋은지 북유럽형이 좋은지 속단할 수는 없다”고 판단을 미뤘다. 2004년 총선으로 국회에 등원한 그는 국회의원 자격으로 미국을 세 차례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과거엔 미국 정치인을 모두 한통속이라 여겼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민주당 정권과 공화당 정권은 북핵 문제나 외교 현안을 푸는 방법론이 다르다. 상대적으로 클린턴 정부가 부시 정부보다 대결보다 대화와 평화적인 방법을 선호한다고 여겼다.” 그는 미국의 장점에 대해 언급했다. “미국은 경제·사회·기술·학문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평가했다. “무한 경쟁과 적자 생존 법칙”을 단점으로 꼽았다. 미국이 자유와 기회의 땅이란 통념에 관해 이 의원은 “언제부턴가 그런 기회가 제한돼 왔기 때문에 요즘 변화 기치를 내건 버락 오바마가 신드롬을 낳고 있는 것”이라고 입장을 달리했다. 그는 미국이 강대국이자 선진국인 점은 분명하지만 “패권을 지향한다면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북한과 갈등을 빚게 될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참여 움직임도 문제 삼았다. 미국이 북한과 국경을 맞댄 특수상황에 있는 한국과 그렇지 않은 일본과 영국을 동일 선상에 놓고 판단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8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이 체제경쟁을 벌였던 시절이다. 이 의원은 “미국식 시장경제의 대안으로 사회경제에 관심을 두긴 했지만 지금은 사회경제는 불가능하고 시장경제에 기초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영을 현실적으로 거부하긴 어렵다는 상황인식이다. 최근 퇴조하는 한총련의 활동에 대해선 “학생운동이 재정비를 통해 시대적으로 대중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총련의 구호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반향도 미미한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비판은 하되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광주시청 공보계장 임종수씨는 일찍이 반미주의자였다. 1980년 12월 광주미문화원 방화 혐의로 2년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전남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임씨는 같은 해 5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했거나 적어도 방조했다고 믿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땐 전남도청 앞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우리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넣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믿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전까지 미국을 한국의 맹방이자 자유민주주의를 떠받드는 국가로 여겼다. 하지만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후 미국에 대한 환상과 믿음이 깨져나갔다. 미국에 속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국은 자신들의 작전지휘권 안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응했다.” 친미 감정이 반미 감정으로 돌변했고, 적개심과 분노가 치밀었다. 21세 젊은 청년의 눈에 미국은 약소국을 침탈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둔갑했다. “그 시절엔 콜라도 먹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고 돌이켰다. 결국 가톨릭농민회 소속 회원들과 함께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그는 현재 고3, 중2에 재학 중인 두 딸과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둔 가장이다. 아직 아이들에게 해외 어학연수 기회를 주지 못해 여건이 된다면 외국에 아이들을 내보내고 싶어 하는 “보통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나아가 아이들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가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아이들이 미국 문화와 교육을 마음껏 누린 뒤 국가에 기여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임씨는 과거 자신이 외쳤던 ‘반미’를 반성할 생각은 없다. 방화사건이 있었던 당시엔 반미가 정당했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양민 학살을 최소한 묵시적으로 방조했고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방화사건 이후 28년이 지나는 동안 한·미 관계는 많이 변했다. 임씨가 바라보는 현재의 미국은 이렇다. “이념의 시대에서 실용의 시대로 넘어왔다.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고, 국가 관계도 그렇다. 한국이 교역 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경제적 여건이 상당히 개선됐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닐 게 아니라 이젠 ‘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복리를 위해선 미국과 선택적인 교류가 불가피하다.” 한·미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 주요 사건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평양 주민들은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를 불태웠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에 이어 일어난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이 됐다. 광성보 전투(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지역 지휘관이던 어재연 장군과 휘하 장졸 350명이 강화도 손돌목에 침입한 미국 로저스 제독의 아시아 함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진은 노획한 조선군 장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 앞에 선 미국 군인들. 노근리 사건(1950년)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교에 접근하던 한국인 피란민 중에 조선인민군이 있다고 보고 공군기로 기총사격했다. 수백 명의 민간인이 피살당했다. 1999년 AP통신이 발굴·보도해 이슈가 됐다.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미국이 유협진압에 쓰일 한국군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80년대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년) 문부식, 김은숙 등 부산 지역 청년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했다. 인근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 수백 장의 반정부 유인물이 뿌려졌으며, 세계 언론도 반미 무풍지대 한국의 반미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1985년) 서울대, 연세대 등 서울 지역 대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미문화원을 점거,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미국의 사과와 리처드 워커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사에 ‘점거 농성’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일으켰다. 미선·효순 사망 사건(2002년)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가 한창 무르익던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효촌면 시골길에서 조양중학교 2학년생인 신효순, 심미선양이 주한 미군 2사단 장병이 몰던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촛불시위 등 전국적인 반미 운동으로 번졌다.

2008.04.22 13:47

7분 소요
[임준수의 BIZ 시네마] 大作‘징기스칸’은 끝내

산업 일반

영화 이상으로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한 원로 영화인이 홀연 우리 곁을 떠났다. 풋내기 감독 시절엔 아름다운 여배우를 아내로 맞는 행운을 누렸고 중년기엔 전국의 ‘고무신 부대’를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스크린의 마법사로 명성을 떨쳤으며, 늘그막엔 살벌한 독재 나라에 납치를 당해 억지로 영화를 만들다가 탈주에 성공한 풍운의 사나이-. 지난 11일 타계한 신상옥 감독이 그 사람이다. 신 감독의 인생 유전은 탈주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북한의 마수를 벗어나자 미국 망명생활이 시작됐고 10여 년 만에 그리던 고국을 찾았으나 싸늘한 눈초리에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2002년 영구 귀국 후부터는 일이 좀 풀리는가 싶었지만 이미 80 고개에 넘어선 그의 쇠잔한 건강은 4년 이상 이승에서 머물 수 없게 했다.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뒤 1952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악야(惡夜)’를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될 때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평양 억류생활 중에도 7편의 북한 영화를 만들었으며, 86년 탈북 이후 미국 체류기간에도 메가폰을 놓지 않았다. 여생을 고국의 영화 발전에 쏟겠다는 생각으로 귀국했을 당시 신 감독은 이미 70대 중반을 넘은 상태였지만 나이란 그에게 숫자에 불과했다. 안양에 영화 아카데미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필생의 대작 ‘징기스칸’을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 그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의 야심작은 꿈으로 끝났고 소품으로 만든 ‘겨울 이야기’만 유작으로 남게 됐다. 신상옥 영화의 재미에 흠뻑 빠졌던 이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영화는 아마 ‘성춘향’일 것이다. 61년 신 감독이 36세 때 아내 최은희를 주연 배우로 세워 라이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맞선 흥행 대결은 한국 영화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당시 홍 감독은 아내 김지미를 출연시켜 한판 승부에 나섰으나 결과는 신 감독의 압승이었다. 국내 영화계의 쌍벽이었던 두 감독과 당대 최고의 두 미녀 배우가 짝을 이루어 부창부수의 대결을 벌인 것 자체가 장안의 화제였다. 불과 수백m 간격을 두고 두 명문 개봉관 국도극장과 명보극장에서 벌어진 ‘성춘향’과 ‘춘향전’의 대결은 두 감독에게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서울 관객 38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성적표를 받아든 신 감독은 이후 10여 년간 난공불락의 아성을 쌓으며 한국 영화의 중흥을 이끌었다. 61년에 내놓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한국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상록수’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칸영화제(2003년) 회고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가 북한에서 만든 ‘불가사리’는 고려시대 민담을 담은 것으로 2000년 서울에서 개봉돼 국내 극장에서 상영된 북한 영화 1호가 됐다. 신상옥 감독은 남북한의 두 독재자와 한때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고 영화를 만든 특이한 경력도 있다. 유신 이전까지는 개봉 안 된 자신의 영화를 미리 보여줄 만큼 박정희 대통령과 친했으며 북한 체류 중엔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영화 제작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타고난 영화인이었던 신상옥은 비즈니스에 대한 열정과 감각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여 설립한 ‘신필름’은 당시 한국 최대의 영화사로 우리나라 첫 메이저 스튜디오형 회사라는 기록이 있다. 신 감독은 영화사를 운영하면서 제작, 편집, 각본, 연출, 기획 등 영화 제작의 분업 시스템을 갖추고 직접 조직의 전문성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제작을 PD에게 맡기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그였다. 신필름 설립 이후 승승장구하던 신상옥은 75년 뜻밖의 액운에 걸려 자신의 평생 꿈이 담긴 영화사가 문을 닫는 비운을 맞는다. 영화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에 검열 미필 장면이 삽입되었다는 이유로 군사 정부로부터 등록 취소를 당한 것이다. 이때 큰 충격을 받은 신 감독은 국내의 검열망을 피해 홍콩에 영화사를 차릴 계획을 세웠으나 그에게 결과적으로 따라붙은 것은 납치-탈출-망명 등 기구한 인생 유전이었다. 미국 망명기간에도 신상옥의 영화사업에 대한 정열은 식을 줄 몰랐다. 90년대 초 할리우드를 무대로 독립영화사를 차린 그는 가족영화 ‘닌자 키드’ 시리즈를 제작해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고 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와 김형욱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 등 민감한 소재의 영화를 만드는 노익장을 보였다.

2006.04.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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