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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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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논쟁은 미래에서 온 사람들과의 대화다 [이윤정 에코앤로]

전문가 칼럼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나는 주말에 잠깐씩 교육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부모로서의 소양을 쌓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 본 동영상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소아정신과 교수님의 인터뷰였는데, 그 중 특히 인상적인 부문이, ‘부모와 아이는 30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있으니 (서른 살 이후에 아이를 낳았다면 그 이상) 부모는 이 아이를 “미래에서 온 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30세 전후일 것이므로, 부모가 30년 이후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면 참 좋을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30년 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가져야 할 것이고, “아빠 클 때는 없어서 못 먹었는데, 너희들은 차려 준 밥도 안 먹냐?” 같은 자신의 과거 경험을 잣대로 아이를 비난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아이의 단기 성과 (예를 들어 영어·수학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대범함도 단련해야 할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올해, 2022년에 태어난 아이는 진짜로 2052년에 서른 살이 되어 2052년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문제는 30년 후 이 세상의 주역이 되어 살아 갈 아이들의 문제이다. 2015년 파리협정에서 전 세계는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보다 훨씬 아래로 유지하고,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IPCC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 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최소 45% 이상 감축하여야 하고, 2050년경에는 탄소 순 배출량이 0이 되는 탄소중립 (넷 제로) 상태를 달성하여야 한다고 한다. ━ 정부·기업 상대 기후·환경 소송 증가 2050년이 되면, 올해 태어난 아기는 28세가 되고, 12세인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는 40세가 되며, 18세 청소년은 46세가 된다. 그러므로 기업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때 과거 경험에 기대거나 현재 처한 상황에 맞추기 보다는, 미래에서 온 사람들인 아이들의 시각에서 그들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고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2050년에는 지금의 아이들이 기업의 투자자, 소비자, 임직원이 될 것이고, 각국 정부의 정책 입안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환경단체나 개인들이 기후변화 문제를 이유로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5월까지 미국 콜롬비아 로스쿨 데이터베이스에 취합된 전 세계 기후변화 소송은 총 2,002건이고, 이 중 약 70%는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것이다.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 건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탄소 대량 배출 기업, 기타 화석 연료 관련 기업뿐만 아니라, 식품, 농업, 운송, 플라스틱, 금융업에 종사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네덜란드 환경단체들은 2013년 네덜란드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Urgenda Foundation v. 네덜란드 정부), 네덜란드 대법원은 2019년 12월 20일, 유럽인권조약상의 생명권, 개인 생활권 등에 의거하여 네덜란드 정부는 과다 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의 위험을 방지해야 하므로 2020년까지 온실가스를 1990년 대비 25% 줄여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지구의 벗 등 환경단체들은 위와 유사한 논리로 2019년 4월 글로벌 에너지회사 A 사를 상대로 온실가스 감축 소송을 제기하면서, A사의 사업모델상 온실가스 감축 계획이 불충분하여 파리협정에서 설정한 목표에 위험을 가함으로써 인권과 생명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A사는, 사기업은 파리협정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탄소 배출 한도와 관련한 법적 규제가 존재하지 않아서 위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나, 관할 지방법원은 2021년 5월 26일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A사는 기존 사업모델에서 계획하였던 것 보다 더 추가적인 온실가스 감축을 하여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 에너지 안보 중요하지만 탄소중립 더 중요해 독일에서는 기후변화 관련 미래세대, 즉 아이들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있었다. 2020년 2월 독일에서 일단의 젊은이들이 독일연방헌법 재판소에 기후변화 소송을 제기하였는데(Neubauer, et al. v. 독일 정부), 독일 연방기후보호법에서 정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충분하지 않아서 파리협정에서 합의한 독일과 유럽의 의무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고, 독일 연방 기본법에서 정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 4월 29일, 국가는 기후변화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건강, 그리고 미래세대의 자유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현행 독일 연방기후보호법 상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 관련 규정은 미래세대에게 탄소예산을 소비할 권리를 불평등하게 분배하고, 그 결과 미래세대의 자유권을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헌법 위반이 있다며 독일 연방기후보호법 일부 위헌결정을 발표하면서 2022년 말까지 감축 목표를 개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서 독일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개정되었다). 올해 들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 가격 폭등과 인플레 문제 등 정치, 경제적 불안 요소 때문에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전에 비해 어느 정도 덜한 것도 사실이다. 유수의 글로벌 대기업들의 대주주인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0년과 2021년에는 투자 대상 회사들에게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촉구했던 데 비해 올해는 대부분의 기후변화 관련 주주결의가 너무 극단적이고 규범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황이 바뀌어서 전통적인 연료 (화석연료) 생산에 단기적으로 더 많이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 기업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고, 경영진의 판단도 블랙록과 유사하리라고 생각한다. 물가와 금리가 상승하고 있고, 에너지 안보가 중요한 위기상황에서 당장 살아남기도 힘든 판국에 30년 후 탄소중립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사치라고 느끼고 있을 기업들도 상당히 있으리라 추측된다. 물론, 현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총력을 다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 곧 다가올 어쩌면 더 큰 위기에 대한 대응책 마련도 절대 게을리 하면 안될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하루하루 살기 힘들어도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하여야 하는 일을 포기하면 안되듯이, 기업 경영자는 현실에서 당면한 위기 해결에 몰두할 때 조차도 30년 후의 투자자들, 소비자들이 우리 기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 필자는 환경법 전문가로, 현재 김앤장법률사무소의 변호사이다. 환경부 고문 변호사이자 중앙환경분쟁조정회 위원이다.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 법제처 법령해석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2022년 환경의 날 대통령 표창 포상을 수상했다. 이윤정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

2022.07.30 13:00

5분 소요
독일의 에너지 전환, 아직은 신기루?

국제 경제

전력 대부분을 신재생 에너지원으로 생산하겠다는 계획이 현실과 정치의 벽에 부닥치며 오히려 화석연료 사용 늘어 지난 8월 유난히 무더운 어느 날 독일 발트해 무크란 항만에서 200여 명의 관광객이 해수욕 대신 아르코나 해상풍력발전 공원에서 열린 ‘매혹의 해상풍력’ 전시회를 찾았다. 바다를 바라보고 선 그들은 하얀 유리섬유로 만들어진 풍력터빈 날개를 넋을 잃고 쳐다봤다. 76m에 이르는 그 날개는 보잉 747 제트 항공기의 날개보다 더 길었다. 전시회 안내자는 그 날개들이 머지않아 해안선에서 30여㎞ 떨어진 바다에 세워질 풍력터빈 60대 위에서 돌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내년 초가 되면 아르코나 해상풍력발전소는 385㎿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40만 가구가 사용하기에 충분한 전력이다. 아르코나 프로젝트의 간부 실케 스테엔은 “여기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중에게 실감나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이 ‘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도록 말이다.”바다를 바라보던 그들이 내륙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와 비슷하게 거대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쪽은 그날의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회색 콘크리트로 뒤덮힌 거대한 강철 파이프가 5층으로 쌓여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항만 책임자는 길이 12m, 직경 1.2m인 그 파이프가 수없이 많이 쌓여 있는 광경을 국제우주정거장에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노르트스트림2 파이프라인 건설에 사용될 파이프다. 내년에 완공되면 러시아에서 독일까지 약 1280㎞에 이르게 될 거대 프로젝트로 현재의 파이프라인보다 두 배나 많은 천연가스를 공급할 수 있다.아르코나 해상풍력 발전소와 노르트스트림2 파이프라인이라는 서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이 두 프로젝트는 신재생 에너지 천국을 만들겠다는 독일의 꿈과 저렴한 러시아 천연가스라는 정치적 현실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독일은 2050년까지 전력의 80%를 신재생 에너지원으로 생산하겠다는 야심적인 목표를 일찌감치 2010년 발표했다. 그 다음해엔 남아 있는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2022년까지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공약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확고히 다졌다. 또 독일 정부는 태양력·풍력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개인 가구와 기업에 보조금으로 6000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그 결과 신재생 에너지원을 이용한 발전 역량이 크게 강화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독일이 생산하는 전력의 3분의 1이 풍력·태양력·수력·바이오가스에서 나왔다. 1990년엔 그 비율이 3.6%에 불과했다.그러나 독일의 그런 원대한 비전은 엄연한 현실의 벽에 부닥쳤다. 세계 최대의 산업국가 중 하나인 독일에서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신재생 에너지원으로 교체하는 것은 정책 입안자들의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판명됐다. 그에 따라 독일은 야심적인 신재생 에너지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고 화석연료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아울러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지구 차원의 싸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당분간 포기할 수밖에 없다.문제는 독일의 전력망에 있다. 태양력과 풍력으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려면 기존의 대형 발전소보다 훨씬 정교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전력 분배망이 필요하다. 저서 ‘에너지 민주주의: 독일의 신재생 에너지 전환’을 펴낸 아르네 융요한은 “독일은 풍력이나 태양력 발전 같은 신기술을 시장에 내놓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에너지 전환 목표를 달성하려면 독일은 송전 네트워크 전체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풍력 발전이 인기를 끌면서 예상치 못했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생겼다. 대형 풍력터빈, 특히 아르코나 같은 연안 풍력발전소는 고도로 응축된 전력을 생산한다. 전력이 필요한 공장이 바로 부근에 있고 근무 시간인 낮 동안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그런 발전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공장들이 발전소에서 수백㎞ 떨어져 있다면 풍력발전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독일에선 풍력발전 단지가 바람이 많이 부는 북부 지방에 많이 건설됐다. 한편 독일의 큰 공장들은 대부분 남부에 있다. 또 그 지역은 독일의 원자력발전소 대다수의 가동이 중단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부에서 생산된 전력을 남부로 끌어가는 것이 문제다. 바람이 많은 날엔 북부의 풍력발전 단지에서 전력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력을 생산해 송전선에 과부하가 걸린다.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전력망 관리 당국은 풍력발전 단지에 터빈을 전력망에서 분리하도록 요청했다. 관광객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 우아한 풍력터빈 날개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뜻이다. 전력 공급을 유지하려면 관리 당국은 비싼 비용을 들여 예비 발전기를 설치해야 한다. 이 과정에 지출한 비용이 지난해 16억 달러에 이르렀다.해결책은 북부의 풍력발전 단지에서 생산된 잉여 전력을 남부 지방의 공장으로 보낼 수 있도록 더 많은 송전선을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 그 목적으로 전력망 확장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8000㎞에 이르는 새로운 송전선 건설 비용 수십억 달러는 전력 사용 고객이 부담하게 된다. 지금까지 계획된 송전선의 5분의 1도 채 건설되지 않았다.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8월 경제신문 한델스블라트에 “전력망 확장이 예정보다 많이 지연된다”고 인정했다. 장애물 중 하나는 고압 전선이 통과하는 곳에 사는 주민이 케이블의 지하 매설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과 비용이 추가된다. 이 프로젝트는 2025년 전에는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독일의 마지막 원자력발전소가 폐쇄되고 3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전력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다.이처럼 공사가 지연되자 정부는 풍력발전에 제동을 걸었다. 발전 단지의 신규 계약을 줄이고 신재생 에너지에 지원금을 삭감했다. 독일 하원 기민당 대변인 요아힘 파이퍼 의원은 뉴스위크에 “과거 우리는 신재생 에너지 역량의 확대에만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전력망 확장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전력 생산은 늘었지만 그 전력을 송전할 전력망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신재생 에너지 옹호론자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가 친환경 산업을 질식시킨다고 들고 일어났다. 독일 풍력에너지협회의 CEO 볼프람 악스텔름은 풍력발전 산업에서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말했다. “내년과 내후년에 풍력발전 산업이 큰 곤경에 처할 것으로 예상된다.”그와 대조적으로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독일의 발트해 연안에서 바지선 카스토로 10호가 거대한 강철 파이프 수십 개를 싣고 용접기로 연결한 뒤 바다 바닥으로 내린다.110억 달러가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업체 가스프롬과 유럽의 5개 투자기관이 비용을 댄다. 따라서 독일 납세자의 직접적인 부담은 없다. 파이프라인은 독일·러시아·핀란드·스웨덴·덴마크의 영해를 통과하도록 건설된다. 덴마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건설 노선을 승인했다. 노르트스트림 2 프로젝트 대변인 옌스 뮐러는 “4개국 정부가 승인했기 때문에 덴마크도 이 파이프라인 통과를 곧 승인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핀란드 연안의 파이프라인 건설은 지난 9월 시작됐다. 내년 말이면 천연가스가 그 라인을 통해 공급될 수 있다. 그에 따라 러시아는 유럽의 천연가스 시장 점유율을 더욱 높일 수 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EU)에서 사용되는 천연가스의 3분의 1을 공급한다. 2030년 네덜란드가 천연가스 생산을 중단하면 그 비율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르트스트림2 파이프라인을 두고 “러시아가 독일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라며 “나토에 아주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 상원의원들은 이 프로젝트에 관련된 기업들을 대상으로 제재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노르트스트림2가 건설되면 자국의 영토를 통과하는 기존 파이프라인이 쓸모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독일 지도자들도 에너지를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산업계에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는 압박이 아주 세다. 실제로 노르트스트림2의 투자 기관 중엔 자사의 공장을 가동하고 싶어 하는 독일 기업들이 포함된다. 독일 국제안보연구소의 에너지 전문가 키르스텐 베스트팔은 “독일이 순진한 게 아니라 실용적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다.”송전 문제로 갈탄 산업도 새롭게 빛을 보게 됐다. 갈탄은 탄소발자국이 가장 큰 연료로 독일 전력의 약 4분의 1이 여기서 나온다. 광업업체들이 기회를 노리고 갈탄을 대량으로 캐내기 위해 사업을 확장하는 중이다.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약 250㎞ 떨어진 포델비츠에선 대다수 주택 마당에 독일 광업회사 미브라그의 로고가 그려진 흰색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미브라그는 이곳 주민 130명 거의 전부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 아래 땅속에 매장된 갈탄을 캐내기 위해 이 마을은 곧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다.이처럼 석탄이 다시 연료로 부상하면서 2015~2016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증가했다(지난해는 약간 줄었다). 그로써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국가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20년까지 1990년 수준의 40%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폐기했다. 메르켈 총리 산하 석탄정책위원회의 여러 위원은 함바흐 숲에서 에너지회사 RWE의 갈탄 채굴을 정부가 허용할 경우 사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몇 년 전만 해도 파리 기후변화 대책 협상에서 독일은 온실가스 배출을 대폭 삭감하는 야심적인 계획에 EU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지금 독일은 생각을 고쳐먹은 것 같다. 최근 미겔 아리아스 카네테 EU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은 EU 회원국들이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 수준의 40%가 아니라 45%까지 줄이도록 목표를 재설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메르켈 총리는 “이전에 우리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반박했다. “계속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니엘라 체슬로 뉴스위크 기자

2018.10.2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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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무대에 뛰어든 오페라 가수

정책이슈

조지아의 파타 브루클라제, 경제성장과 정치개혁·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총선 출사표 던져 뛰어난 슬라브계 베이스로 정평 난 파타 브루클라제는 그동안 오페라 무대에서 훈족의 왕 아틸라의 황금군단을 이끌고 전투를 벌였으며 불운한 러시아 황제를 폐위시키기도 했다. 이제 그는 오페라에서 벗어나 새 역할을 준비한다. 자신이 조국 조지아를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동포 다수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그는 깊은 베이스 목소리로 “오페라 무대에서 필리포 2세부터 보리스 고두노프까지 황제나 정치인 등 권력자 역할을 수없이 맡았다”고 말했다. “정치에서도 무대에서처럼 갈채와 환호, 칭찬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브루클라제는 오는 10월로 예정된 조지아 총선에서 얼굴만 앞세운 조연 역할이 아니라 주연을 맡을지 모른다. 집권 여당인 ‘조지아의 꿈’과 중도 우파 야당 둘 다 지지도가 형편없는 상황에서 조지아 국민은 새로운 리더십을 찾고 있다. 그중 다수는 브루클라제가 바로 그 리더라고 생각한다.미국 국제공화당연구소(IRI)의 조사에 따르면 브루클라제가 만든 신당 조지아개발기초당은 아직 공식 승인을 받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3위를 달리며 일부 지역에선 2위를 넘본다. 브루클라제 자신도 호감도 75%를 기록하며 조지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브루클라제는 “예술도 그렇지만 정치도 거짓을 배격해야 한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오페라 가수로서 또는 정치인으로서 무대에서 진정성 있게 진심으로 생각을 표현한다면 사람들은 똑같이 반응한다.”조지아개발기초당은 총선 전에 다른 당과 연대하진 않을 생각이다. 당 대변인에 따르면 목표는 독자적인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다만 투표 후 연대가 필요한지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목표대로 승리한다면 브루클라제가 조지아의 총리가 될 것이다.브루클라제는 총리가 되면 4년 동안 조지아 경제를 10% 성장시키고, 민간 부문에서 새로운 일자리 25만 개를 만들며, 정치를 개혁하겠다고 공약했다. 조지아 국민에겐 전부 솔깃한 약속이다. 또 그는 유럽연합(EU)과 나토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당분간 준회원으로 남아 있으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한다. 비판자들은 지금까지 그의 공약이 두루뭉술할 뿐 아니라 포퓰리스트적이며 조지아 국민의 정치 환멸을 교묘히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그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진실된 사람으로 본다. 브루클라제는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면서 2004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를 돕는 자선단체 라브나나(‘자장가’라는 뜻)를 설립했다. 2006년엔 유엔 대사, 2010년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도 임명됐다. 그는 2013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줄곧 권고 받았지만 장고 끝에 포기했다. 그러다가 올해 초 오페라 공연 일정을 취소하고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갑작스레 발표했다.“조지아 국민으로서 나는 우리 나라가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치인, 또 내가 지지하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오페라 활동을 중단하고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브루클라제의 급작스런 부상은 옛 공산국가들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몇몇 정치인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인근의 우크라이나에선 여군 조종사 출신 나디야 사브첸코가 최고 인기 정치인이다. 또 2년 전엔 복싱 챔피언이던 비탈리 클리치코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인으로 꼽힌 뒤 수도 키예프 시장에 선출됐다. 폴란드에선 펑크록 가수 파베우 쿠키스가 2015년 대선에서 후보자 11명 중 3위를 하면서 돌풍을 일으킨 뒤 자신이 세운 당을 이끌고 의회로 진출했다.브루클라제는 “그들이 왜 인기 높은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일반인의 언어로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기성 정치인은 늘 하던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국민은 그들의 말을 더는 믿지 않는다.”브루클라제에 따르면 지금까지 조지아의 지도자들은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낙관적인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며 정권을 출범시켰다가 사회 불안이나 전쟁으로 무너졌다. 지금 조지아는 EU와 나토 가입(현재는 둘 다 무한정 보류된 상태)과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 사이에서 고민하는 중이다.브루클라제는 “우리 나라는 25년 전 독립했다”고 말했다(1991년 4월 9일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을 얻은 조지아는 1995년 8월 24일 새로운 민주헌법을 채택했다). “그동안 여러 지도자를 거쳤고 그때마다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들 각각을 원칙적으로 지지했다. 그들 나름대로 상황을 조금이나마 낫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문제가 많았다.”그는 특히 현 정부에 불만이 많다. “지금 조지아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전혀 진전이 없다. 상황이 악화되진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 그냥 멈춰서 있다.”중도 좌파 연합정당인 ‘조지아의 꿈’의 집권 아래서 조지아 화폐 라리화의 가치는 올해 초 2004년 이래 최악의 수준으로 폭락했다. 지난해 말 미국 민주당 국제문제연구소(NDI)의 조사에 따르면 조지아 국민의 76%는 조지아가 발전적인 변화를 거부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말한 응답자는 19%에 불과했다. ‘조지아의 꿈’이 정권을 잡기 전인 2011년엔 그렇게 응답한 조지아 국민의 비율이 60%에 이르렀다. 지금 조지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실업과 빈곤이다.현 정부는 들어서자마자 이전 정부를 비판했다. 예를 들어 미하일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은 2014년 부재 중에 권력 남용으로 기소됐다. 그렇다고 사카슈빌리와 그의 통합국민행동당이 더 인기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서방과의 관계는 잘 다룬 것으로 평가 받았지만 러시아 문제에선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경제 문제 외에 조지아의 가장 큰 이슈는 분리 독립 지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지위다. 러시아가 오랫동안 이 두 자치주를 지원한 것이 조지아와 과거 최대 무역 파트너였던 러시아 사이의 무역과 외교에 걸림돌이 됐다. 이 문제로 조지아는 사카슈빌리가 대통령이던 2008년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다.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한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점령했고, 아직도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그에 따라 영토의 완전한 보전이 되지 않아 조지아 국민 다수가 원하는 나토 가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브루클라제는 ‘조지아의 꿈’ 당이 조지아의 영토 문제를 두고 야당의 정책만 비판할 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그는 “‘조지아의 꿈’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못하고 이전 정부가 잘못한 일만 계속 물고 늘어진다”고 말했다. “그런 비난은 정말 쓸데없는 낭비다. 이전 정부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건 분명하며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정치 보복이 돼선 안 된다.”브루클라제는 친서방주의를 견지한다.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 정부는 우리의 파트너가 누구인지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방의 EU나 미국과 손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처럼 북쪽의 러시아를 다시 파트너로 선택해야 하는가? 그런 방향은 파트너가 되는 쪽에서 확실히 알 수 있도록 아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파트너는 EU와 나토, 그리고 미국이다.”조지아의 EU와 나토 가입은 무한정 보류된 상황이다. 그러나 브루클라제의 경제 정책은 서방과의 무역에 크게 기댄다. 마침내 지난 7월부터 조지아와 EU의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됐다. 브루클라제의 다음 목표는 미국을 설득해 같은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그는 “러시아와도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주권·영토 보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유럽-대서양 외교정책이다. 우리는 통합된 조지아를 원한다.”브루클라제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개입 없이 압하지야·남오세티야와 대화해야 하며, 그들에게 완전한 분리 독립보다 조지아 내부에서의 ‘강화된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러시아의 석유 파이프라인이 조지아를 통과하는 문제와 관련해 현 정부와 달리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과 협상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우리는 더 많은 독립을 원한다. 아제르바이잔의 파이프라인이 우리 나라를 통과해 터키와 EU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이건 우리의 에너지 독립에 관한 문제다.”브루클라제는 장기적으로 주권이 침해당할 수 있는 다른 나라의 요구를 조지아 정부가 절대 수용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파이프라인과 군대를 동원해 다른 나라의 손발을 묶은 예로 그는 우크라이나 위기를 들었다. “그 외에는 러시아와 모든 것을 협상할 수 있다. 경제든 문화든 테러와의 전쟁이든 전부 다 협력할 수 있다.” 이처럼 브루클라제는 선의로 러시아와 대화를 재개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대화는 ‘타협을 모르는’ 중요한 한 사람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지금까지 그는 군사적 개입과 에너지를 주무기로 휘두르며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브루클라제가 어떻게 그와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브루클라제는 “지도자의 개성에 관한 문제라기보다 러시아가 조지아를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정책을 선택할지에 관한 문제”라고 대답했다. “조지아의 주권과 독자적인 외교 권한 문제에선 우리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푸틴 대통령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아울러 조지아는 적대 정책을 바라지 않으며 러시아와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하고, 북캅카스 지역의 테러 방지에서 러시아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그를 설득해야 한다.”한편 러시아에선 지금 푸틴 대통령의 인기가 어느 때보다 높다. 또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갈수록 공격적이며 러시아에 맞서겠다는 서방의 결의는 이전보다 훨씬 허약하다. 그러나 브루클라제는 러시아 지역, 특히 조지아 국경의 북쪽에서 급진 이슬람주의의 위협이 심상찮다는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도 조지아가 중요한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할 것으로 생각한다. “러시아로선 강한 이웃과 파트너가 필요하다. 조지아는 나토와 EU에 가입해야 강해지고 안정될 수 있다. 조지아가 없으면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 러시아로선 북캅카스 지역의 테러가 큰 문제다. 특히 체첸과 잉구셰티야가 골칫거리다.”러시아 보안기관은 러시아인 4000명 이상이 시리아와 이라크로 가서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에 합류했으며, 그중 북캅카스 지역 출신이 가장 많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브루클라제는 “러시아와 지금보다 더 많이 대화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독자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위험하다. 우리에겐 국제 파트너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변 국가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잠재력을 가졌다. 우리의 개혁이 성공하면 유럽에도 득이 된다. 우리가 민주 국가로서 번창하면 유럽은 강한 파트너를 갖게 된다. 그러면 우리 지역 전체가 더 안정되고 발전할 수 있다.”브루클라제는 내년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되는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필리포 2세로 캐스팅돼 있다. 그는 자신의 대역이 충분히 그 역을 소화할 수 있기 바란다. 자신은 정치에 남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화려한 오페라 경력을 중단했다. 사람들은 내게 정치에 뛰어들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정치는 험하고 지저분하다’며 ‘당신처럼 깨끗하고 진실된 사람이 할 일이 못 된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조지아의 젊은이들을 위해 내가 정치에 나서야 한다.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해보고 싶다. 지난 25년 동안 조지아 국민은 정부를 위해 봉사하고 정부가 하는 일을 지지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반대를 원한다. 정부가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민을 지지하도록 만들겠다.”- 대미언 샤코브 뉴스위크 기자

2016.08.01 09:06

7분 소요
PERISCOPE GEOPOLITICS - ‘세계의 왕따’ 자초하는 푸틴

국제 이슈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반군의 말레이시아 민항기 격추 사건으로 그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푸틴의 ‘로커비 모멘트’라고 할만하다(Call it Putin’s Lockerbie moment). 지난주 러시아 지도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세계의 태도가 경계와 불신에서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변했다. 가파른 추락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푸틴은 소치동계올림픽을 개최하고, 자신의 체제에 도전한 신흥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와 펑크 그룹 푸시 라이엇을 석방하면서 최고조에 이른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만끽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공화국 합병으로 그의 평판이 하향 활강을 시작했다. 이제 말레이시아 항공 MH17편이 격추된 비극과 푸틴의 이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굳어지면서 그의 이미지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뉴욕대의 국제문제 전문가 마크 갤리오티 교수는 “정치는 가상의 상황을 통제하는 행위인데 이제 MH17 사건은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을 상징하게 됐다”고 말했다. “푸틴의 러시아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불안정화를 부추기는 나라임을 부인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사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크렘린은 이번 재난을 자신의 일로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1988년 그의 수하들이 팬암 103편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의도적으로 폭파했다)와 달리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부근의 분리주의 반군에게 민항기를 미사일로 격추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수집된 증거에 따르면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고 고삐가 풀린 민병대가 저지른 비극적인 실수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물론 러시아가 그런 반군에게 성급하게 치명적인 지대공 미사일을 제공한 책임은 있다).따라서 푸틴은 다음과 같이 해야 마땅했다. 도네츠크의 반군 소행을 비난하고 국제 조사에 협조하기로 동의하며 이번 사건에 책임 있는 자들을 심판 받도록 하는 데 국제 지도자들이 힘을 합치자고 촉구하는 것을 말한다.그러나 푸틴의 행동은 그와 정반대였다. 이번 비극이 발생한 직후 며칠 동안 크렘린은 진상을 오도하거나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난하면서 도네츠크 분리주의 반군의 황급한 은폐 작전을 눈감아 주었다. 그들은 미사일 파편에 의한 상처가 뚜렷한 시신들을 숨기려 했고, 그 공격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제 BUK 방공 미사일 발사대를 서둘러 러시아 국경 너머로 이동시켰다(그 작전은 현지 주민과 우크라이나 정부 첩보원들이 휴대전화 카메라에 그대로 포착됐다).푸틴 자신도 러시아 국영 TV에 두 번이나 출연해 이번 사건을 두고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군과 휴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한 듯이 모호하게 이야기했다. 싸운 뒤 ‘난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he made me do it)’라는 어린 아이들의 흔한 주장을 약간 복잡하게 비튼 변명일 뿐이다.KGB에서 훈련 받은 대로 모든 책임을 부인하려는 푸틴의 본능 때문에 MH17의 비극은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푸틴의 소행으로 비치게 됐다. 러시아 언론인 올레그 카신은 “이제 서방 세계의 대중은 푸틴을 무아마르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과 동급으로 인식하게 됐다(For the Western public, Putin has come to occupy the same place as Muammar el-Qaddafi or Saddam Hussein)”고 말했다. “푸틴은 비행기들을 격추시키는 닥터 이블(영화 ‘오스틴 파워’에 등장하는 악당) 같은 이미지로 전락했다.”일반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서방 지도자들, 특히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새로 임명한 각료들은 지금까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카다피 리비아 지도자 같은 인물에게 사용했던 표현을 동원해 푸틴을 비난하고 나섰다. 마이클 팰런 영국 국방장관은 푸틴을 “테러 후원자”로 부르며 “우크라이나에서 떠나라”고 말했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올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왕따 국가’가 될지 모른다(Russia risks becoming a pariah state if it does not behave properly)”고 경고했다.캐머런 총리도 이제 서방이 “러시아를 대하는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푸틴에게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에 압력을 가해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라고 촉구했다(독일은 러시아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자 러시아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MH17 사건 전엔 서방 세계 대부분에서 푸틴의 평판이 여전히 논란 거리였다. 진보파에게 푸틴은 언론의 자유를 압살한 독재자요, 러시아의 피를 빨아먹고 중소기업을 옥죄며 러시아 경제의 미래를 망치는 부패 관료들의 대부(godfather)였다. 반면 다른 많은 사람들(예를 들어 푸틴을 200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사주간지 타임의 편집자들)은 푸틴이 옛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재건을 이끈 강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미국 대선 후보로 출마한 적 있는 논객 패트릭 뷰캐넌 같은 보수파는 동성애자와 서방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푸틴의 입장을 옹호했다.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나 영국의 나이젤 파라지 같은 유럽의 극우파 지도자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파라지는 지난 5월 푸틴을 가장 존경하는 국제 지도자로 꼽았다. 그에 따르면 푸틴은 시리아 위기를 “기막히게 잘(brilliant)” 다루고 있다.그러나 지금 독일인들이 말하는 ‘푸틴 페어슈테어(Putin-versteher, 푸틴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들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갤리오티는 “자신이 당당하게 나서거나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간주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그들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할리우드와 패션계는 올해 초 푸틴이 동성애 ‘선전(propaganda)’을 불법화한 새 법을 제정한 직후부터 이미 크렘린에 등을 돌렸다. 심지어 푸틴의 연예계 친구들도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1980년대의 액션스타 스티븐 시걸은 에스토니아의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하려다가 푸틴의 크림공화국 합병을 지지했던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초청인사에서 제외됐다. 겉보기에 푸틴은 강인하고 독립심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지난 14년 동안 그는 유독 세계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면서 러시아와 러시아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일에 몰두했다.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호화판 G8 정상회의(올해 상반기에 이 선진국 모임에서 러시아가 제외됐기 때문에 그런 잔치가 재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부터 500억 달러를 쏟아 부은 소치 동계올림픽, 2018년 월드컵 유치까지 푸틴은 러시아의 평판을 높이는 데 거액을 뿌렸다.아울러 푸틴은 외국 정책입안자들을 상대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파리와 워싱턴의 여러 연구기관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학자들과 언론인들에게 크렘린 정책의 현명함을 홍보할 목적으로 세계의 러시아 전문가들을 호화판 연례 대회에 초청했다. MH17 사건, 아니 그보다는 크렘린의 사후 처리 방식이 수년간 공들여 일으킨 ‘소프트파워’를 단숨에 망쳐 놓았다. 푸틴처럼 지위에 집착하는 인물에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러시아로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국가홍보 대실패는 현실적인 문제를 초래한다. MH17편이 공중에서 폭파되기 몇 시간 전 미국은 추가적인 러시아 경제제재를 발표했다. 이번 제재는 러시아 석유회사들이 국제 시장에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게다가 MH17 사건이 발생하자 제제를 한층 더 강화하라는 압력이 급격히 강해졌다. 그런 제재가 실행되면 머지않아 러시아 경제가 무너질지 모른다.푸틴이 취임한 후 처음 지명한 총리였던 미하일 카샤노프는 7월 21일 블룸버그 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경제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제재의 위협이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업계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금융부문 전반에 제재가 가해지면 6개월 안에 경제가 붕괴할 것이다.”유럽연합(EU)은 푸틴 측근들과 그들 기업체의 자산을 대상으로 제재를 한층 더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EU의 제재는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보다는 덜 가혹하겠지만 러시아의 위태로운 경제에 더 큰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럽의 경제가 러시아에서 분리될 수는 없다. 특히 에너지 공급의 25%를 러시아의 국영기업 가스프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유럽은 푸틴과 계속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MH17 사건이 러시아 이외의 에너지 공급처를 찾는 노력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와 중부 유럽을 잇는 ‘사우스 스트림’ 파이프라인 같은 가스프롬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반대가 더 심해질 것이다.그러나 단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결과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새로운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곧 철수했다) 이래 그 장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갤리오티는 “발트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경계선에 대한 인식이 더 확실해지면서 그 경계를 지켜야 할 필요성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 격파에 유럽이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MH17편의 격추로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유럽의 품에 안기게 됐다”고 갤리오티는 말했다. “푸틴에게 공격 행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최선의 길은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지원하는 것이다.”친러시아 반군의 MH17 격추가 그들의 패배를 앞당길 가능성도 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맹공격을 퍼부어 그들을 패주시킬 용기를 낼만 한 상황이 됐다. 게다가 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의 분쟁 현장에 쏠려있기 때문에 러시아가 항공기나 로켓 시스템 같은 중화기를 반군에 계속 제공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반군이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면 그런 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그래서 결국 러시아는 자신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 반군이 패배하도록 푸틴이 그냥 내버려 둔다면 국내적으로 푸틴의 위상이 크게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 언론인 카신은 “푸틴이 요정을 병에서 나오게 풀어줬지만 결국 그 자신이 요정에게 잡아먹히게 되리라는 게 도네츠크의 분리주의 반군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농담(The popular view of the Donetsk separatists is that Putin has let a genie out of its bottle which will eventually eat him)”이라고 말했다.카신은 반군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에게 궁극적으로 패하면 “러시아 출신의 자원병들이 도네츠크에서 러시아로 돌아가 크렘린에 대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푸틴이 반군 지원을 계속하면 더 심한 국제 제재를 받게 된다.푸틴은 지금까지 대부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무명에서 옐친 대통령 일가에게 발탁돼 노력하지도 않고 옐친의 후계자로 지명됐다. 임기 초기 러시아의 최대 수출품목인 석유 가격이 배럴당 19달러에서 100달러로 치솟아 계속 그 수준을 유지해 주었다. 체첸 반군들의 저항운동은 내분으로 피비린내 속에서 막을 내렸다. 푸틴의 정적들은 오일머니가 풍부한 크렘린에 편승하는 편이 저항하기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러나 그런 푸틴의 운이 이제 다한 듯하면서 그가 허둥거린다. 2001년 우크라이나군이 실수로 러시아 민항기를 격추했을 때 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나쁜 일은 일어나게 마련(Bad things happen)”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렇다. 나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푸틴은 스스로 그런 나쁜 일의 볼모가 됐다. 아주 나쁜 정치다.은폐는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 곧잘 면전에서 폭로된다. 예를 들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군의 포로학대 사건이 발생했을 때, 또 1988년 로커비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5개월 전 페르시아만 상공에서 미군이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켰을 때 미국이 깨달았듯이 그런 실수의 재난을 수습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책임자를 확실히 처벌하는 것이다(the smartest way to deal with such a disaster is to accept, apologize and conspicuously punish the guilty).올해 푸틴은 보란 듯이 크림반도를 손에 넣었지만 그와 동시에 전략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우크라이나를 잃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푸틴은 MH17 사건을 잘못 다룬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국제적 위신마저 잃을 처지다. 사실 그건 범할 필요가 없는 실수였다. 그 실수 때문에 푸틴과 러시아는 앞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That was an unnecessary mistake that will cost him — and Russia— dearly).

2014.07.2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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