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산당도'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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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심 잃고 좌·우파 정치 협공까지…흔들리는 마크롱 정권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2/07/04/ecna361a06e-b9e2-450c-a147-13705ecaaa6a.353x220.0.jpg)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개혁에 힘을 실어줄 범여권 연합인 ‘앙상블(다함께)’이 6월 19일 치른 총선 결선투표에서 하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해왔던 경제‧사회 분야 개혁 정책이 속도 조절의 길을 걸을 것인지, 오히려 더욱 강력한 추진으로 마크롱의 정치적 브랜드를 확고히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인다. 6월 12일의 총선 1차 투표에 이어 1주일 만인 19일에 열린 결선 투표에서 앙상블은 38.57%를 득표해 577석의 하원 의석 중 2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289석 이상인 과반에서 45석이 부족한 것은 물론 2017년 총선에서 마크롱이 확보했던 의석보다 무려 105석이나 줄었다. 반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4개 정당이 힘을 합쳐 선거를 치른 좌파연합 뉘프(NUPES‧신민중연합환경‧사회)는 31.60%를 득표해 131석을 얻었다. 연합세력으로선 2위의 의석이다. 뉘프에 참가한 극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와 녹색당‧사회당‧프랑스공산당 등 4개 정당은 지난 총선에서 획득했던 의석보다 79석을 더 얻었다. 이번 좌파연합은 장 뤽 멜랑숑이 이끌었다. 프랑수아 미테랑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배출했던 전통의 중도좌파인 사회당이 초라한 모습으로 극좌 정당과 손잡고 좌파 연합에 참여한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프랑스 공산당도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지난 대선 1차 투표에서 불과 1.7%의 득표율로 당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2.3%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위기가 이들 정당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좌파 연합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주목할 점은 극우 국민연합(RN)이 17.30%를 득표해 89석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난 총선 때 얻은 8석보다 무려 81석이 증가한 비약적인 발전이다. 프랑스 하원에선 15석 이상을 차지해야 원내교섭단체의 지위를 얻는데, 극우정당이 ‘마의 15석 고지’를 넘어 이를 얻은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이다. 극우 정당의 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극좌를 포함한 좌파연합과 극우 진영이 약진한 것에 비교해 전통의 중도우파는 이번 총선에서 그야말로 몰락했다. 7.29%를 득표해 64석 확보에 그쳤다. 지난 총선에 비해 66석이 줄었다. 이런 결과를 낸 이번 총선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멜랑숑이다. 지난 대선에서 21.95%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했던 극좌, 또는 급진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인이다. 당시 멜랑숑은 2위를 차지했던 극우 마린 르펜과의 득표율 차이가 40만 표 정도로 1%포인트도 채 되지 않았다. 840만 표 이상을 득표해 1958년 제5 공화국 헌법 아래에서 극좌파로서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특히 18~34세 유권자의 3분의 1이 그를 지지해 청년층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이를 통해 멜랑숑은 프랑스 정치 지형에서 좌파가 재기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멜량숑은 사분오열된 좌파를 모아 연합을 이루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 멜랑숑 “부 재분배, 정년 연장 반대”로 마크롱에 대립 멜랑숑은 급진적인 정책으로 마크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도전자로 평가된다. 그는 프랑스가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더해 전염병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다른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해법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해 극좌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부가 금융을 통제하고 부를 재분배하며, 복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에너지를 공공주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의 생각과 정책적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에서 마크롱이 주장해온 정년 연장(62세에서 65세로)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한국에선 정년 연장을 은퇴자나 장년층에 대한 취업 기회의 연장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상시 고용 노동자의 평균소득을 기준으로 한 연금의 평균 소득대체율이 31.2%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2.2%보다 11%포인트가 작으며, 그 60% 수준이다. 이에 따라 노후 대비를 순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정년 연장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자녀 교육비와 결혼 경비를 비롯한 생계 외적인 부담도 상당하다. 하지만 일찍이 연금제도가 발달한 선진국에선 2017년 기준으로 미국 71.3%, 프랑스 60.5%, 일본 57.7%, 영국 52.2%, 독일 50.9%로 소득 대체율이 높은 편이다. 일찍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절에 연금 개혁을 이룬 독일에서 연금의 소득 대체율이 낮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는 비교적 넉넉한 은퇴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퇴직하고 연금생활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마크롱이 추진하는 정년 연장이 연금 지급 시기를 늦추고 더 길게 일해야 연금을 주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마크롱이 법정 은퇴 시기를 늦추는 것은 여기에 드는 연금 재정의 안전화를 기하기 위해서다. 연금 고갈을 늦추려는 연금 ‘개혁’의 일환이다. 정치적으로는 멜랑숑이 여기에 반대의 기치를 들었지만, 포퓰리스트인 극우 르펜도 같은 입장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사안이다. 이념적으로 극과 극인 극좌와 극우가 정년 연장 반대를 들고 나선 것은 그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이해가 걸린 사람이 생각 외로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멜랑숑의 가장 큰 정치적 지지 세력은 노동조합과 함께 ‘노란조끼’ 시위대에 참가하는 성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마크롱 집권 초인 2018년 10월 유류세 인상에 따른 석유 제품 가격 인상에 항의하며 노동자의 상징인 녹색 안전복을 입고 처음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노란조끼의 요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동차세 인하와 고유가에 대한 대책 마련 요구로 확대됐다. 여기까지는 노동 계층 생활고의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마크롱 정부는 휘발유와 디젤유 인상을 6개월 연기하는 등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 멜랑숑 지지세력 노동계, 마크롱 개혁 정책에 반기 하지만 여러 차례의 시위로 세력을 확인한 노란조끼 시위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본격적으로 마크롱의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번졌다. 부유세 인하와 재정 긴축 등 마크롱이 2017년부터 추진해온 개혁정책 전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정책 등 마크롱의 개혁 정책 전반에 반기를 들었다. 마크롱의 개혁 정책이 중산 계급과 노동 계급에게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크롱의 개혁정책은 좌우파 모두의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 잡혔던 프랑스 경제 체질을 바꾼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2017년 대선부터 600억 유로의 공공 지출 축소와 공공부문 일자리 12만 개 축소를 공약했다. 이렇게 절약한 돈으로 500억 유로 규모의 공공투자로 프랑스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150억 달러를 청년과 구직자를 위한 직업교육에 투입하고, 도 다른 150억 유로를 환경과 에너지 분야에 투자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공양이었다. 아울러 낙후한 공공행정의 디지털화와 농업과 지역 교통, 보건 부문의 현대화를 당면 과제로 설정해 프랑스를 능률적인 나라로 바꾸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프랑스는 1960년 이래 ‘지도주의(Dirigisme)’라는 정책 이념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정부가 강력한 정책적 수단을 통원해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의 정책적 비원과 동력을 제공하고, 노동 계층을 보호한다는 게 정부가 경제를 자유방임하지 않고 개입한 명문이었다. 실제 프랑스는 이를 통해 1960~80년대 고속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2007~2012년 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와 2012~2017년 좌파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집권기에 프랑스는 심각한 성장 동력 하락을 경험했다. 사르코지 집권기에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은 2007년 2.4%, 2008년 0.3%, 2009년 –2.9%, 2010년 1.2%, 2011년 2.2%의 낮은 경제성장률에 머물렀다. 사르코지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좌파인 올랑드를 대통령으로 밀었지만, 올랑드 집권기에 프랑스 경제는 2012년 0.3%, 2013년 0.6%, 2014년 1.0%, 2015년 1.1%, 2016년 1.1%의 성장률을 보여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올랑드의 사회당 정부에 장관으로 몸담았지만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용을 추구하는 새로운 중도를 표방한 신예 마크롱이 2017년에 대통령에 오른 원동력은 경제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희망이었다. 전통의 지도주의에서 탈피한 자유방임적‧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 경제에 성장 동력을 새롭게 마련하라는 유권자의 기대가 마크롱의 어깨에 얹힌 셈이다. 마크롱은 더 일하고 더 성장하는 프랑스 경제를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지만 그의 경제 성적표도 썩 좋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2.3%로 반짝 좋아졌지만 2018년 1.8%, 2019년 1.5% 정도에 머물렀다. 코로나19가 강타하면서 전국적으로 봉쇄를 할 수밖에 없었던 2020년 성장률은 –8.1%로 떨어졌다. 물론 2020년의 마이너스 성장은 팬데믹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개혁의 화려한 기치에 비해선 초라하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힘들다. ━ “부유층 입김 강한 대통령제 폐지, 대중 참여제” 주장도 기본적인 경제 통계로 국세를 살펴보면 마크롱의 프랑스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1월 통계기준 인구 6800만 명에 국내총생산은 국제통화기금(IMF) 2022년 전망치가 명목금액 기준 3조610억 달러로 세계 7위다. 미국(25조3468달러), 중국(19조9115억 달러), 일본(4조9121억 달러), 독일(4조2565억 달러), 인도(3조5347억 달러), 영국(3조3760억 달러) 다음이다. 유럽연합(EU) 내에선 전통의 경쟁국이자 협력국인 독일 다음으로 GDP가 많다.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를 거쳐 2020년 1월 31일을 기해 EU에서 완전 탈퇴한 영국보다도 떨어진다. 독일은 인구가 8324만 명으로 프랑스보다 많지만, 영국은 6722만 명으로 프랑스와 거의 같다.. 그런데도 프랑스 GDP가 영국보다 떨어진 것은 여러모로 프랑스 경제의 상황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프랑스가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 정부의 방역 통제 등에 불만을 품은 노란조끼 시위가 계속됐다. 이는 프랑스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욕하는 극좌파와 포퓰리즘 정책을 들고나온 극우파가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세력을 얻은 원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마크롱은 개혁을 하지만 이를 계급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노동 계층과 좌파 세력에 다양한 이유를 들며 이에 지속해서 저항한 것이다. 이는 지난 4월 연임에 성공한 마크롱의 집권 2기 내내 따라다닐 ‘잎 속의 검은 잎’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마크롱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야당 인물은 극좌 멜랑숑일 수밖에 없다. 멜랑숑은 연금 개혁에 반대한 것은 물론, 유가 등 생필품 가격 인상에 정부가 더욱 개입할 것을 요구해왔다. 당장 오르는 물가에 시달리는 국민이 이에 호응한 것이 이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랑숑은 여기에 더해 정치 개혁까지도 부르짖는다. 1958년 샤를 드골이 만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제5공화국의 헌법과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수술하자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드문 대통령 중심제, 그것도 대통령의 권력이 집중된 독특한 권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밀랑숑은 이런 체제 때문에 계급적으로 부유층의 입김이 강해지고, 노동 계층의 목소리가 제대로 정치에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중심제를 폐지하고 대중의 참여와 토론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모순과 문제점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온다며 이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주장한다. 반마크롱과 반신자유주의를 넘어 반자본주의, 반세계화로 이어지는 반체제적인 성격까지 보이는 셈이다. 이런 멜랑숑과 마크롱의 대립과 경쟁은 앞으로 프랑스 정치와 경제를 강타할 가장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극우 포퓰리스트인 르펜까지 가세하면서 프랑스 정치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프랑스 정치는 앞으로 마크롱의 임기와 이번에 선출된 제5공화국 제16대 국회의 임기 5년 내내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좌·우파 모두를 공격하며 새로운 중도 정치세력을 형성한 마크롱이 좌우로부터 동시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21세기 프랑스에서 정부가 경제를 지배했던 지도주의를 넘어 정치가 경제에 본격적으로 부담을 주는 묘한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7.02 15:00
8분 소요![창당 100년 중국 공산당의 생존비결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7/03/ecn1c69d2b6-7c9e-4e95-924b-d60b43ca02d6.353x220.0.jpg)
중국공산당(중공)이 7월 1일로 창당 100주년을 맞았다. 이날은 공식적인 중국공산당 탄생 기념일(중국 공산당 건당 기념일, 7·1 건당절)이다. 중국 공산당은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중국 전역의 혁명 유적지는 9000만 명이 넘는 공산당원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실 중공이 실제로 창당된 날은 1921년 7월 23일이다. 이날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외국인 치외법권 지역)의 망지로(望志路) 106번지(현재 흥업로(興業路) 76번지)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중국 전역에 공산당원 57명(50여 명으로도 알려졌으며, 밝혀진 인물은 41명)을 대표하는 13명과 첫 대표회의를 요구한 외국인 코민테른 요원 2명 등 모두 15명이 모였다. 마지막 날인 30일 조계의 프랑스 경찰이 현장에 들어와 수색하고 순찰을 강화하자 이들은 상하이에서 서남쪽으로 100㎞쯤 떨어진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에 있는 유람선으로 옮겨 대회를 마쳤다. 그리고 당의 기본 임무와 민주집중제 등 조직원칙, 규율 등을 담은 중국공산당 강령을 채택했다. 천두슈(陳獨秀·1879~1942)가 중앙집행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그렇다면 왜 7월 23일이 아닌 7월 1일이 건당 기념일이 됐을까?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1938년 5월 옌안(延安)에서 내놓은 ‘지구전을 논하다’에서 7월 1일을 창당 기념일이라고 언급한 게 계기다. 그 뒤 1941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건에서 ‘창당 20년, 7·7절 4년’이라고 표현하며 그날 기념식을 열기로 하면서 7월 1일이 공식적으로 정착됐다. 7·7절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당시엔 베이핑(北平)) 서남쪽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인 발포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을 가리킨다. 중국공산당이 100년을 생존한 요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비결로 경제 업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현대 중국사를 주도한 핵심 세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들은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개혁·개방을 바탕으로 이룬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주역으로 자평한다. ━ 마오쩌둥 실수 딛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오늘날 중국은 14억4399만 명 인구에 명목 금액 기준 국제통화기금(IMF) 2021년 국내총생산(GDP) 예상치가 16조6400억 달러로 미국(22조6752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그 뒤를 잇는 일본(5조3781억 달러), 독일(4조3192억 달러), 영국(3조1246억 달러), 인도(3조497억 달러)보다 한참 앞선다. 중국의 2021년 1인당 GDP 예상치는 1만1819달러로 세계 78위다. 세계 평균을 조금 넘는 액수다. 2020년 수출 2조5900억 달러에 수입 2조600억 달러다. 말 그대로 눈부신 성적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마오쩌둥식 공산주의 이념을 정치·경제·사회에 확산했다. 건국 초기인 1950~70년대 초 중국은 거대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 나서기까지 중국에선 역사 발전의 바퀴가 사실상 멈춰 섰다.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은 전국에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하려고 시도하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중국 인민이 받았다. 중국 헌법 서언(서문)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노동계급이 지도하는 노농동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독재 즉 실질상의 무산계급독재가 강고해지고 발전되었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 초기 시행착오의 원인을 엿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대 초 ‘인민민주주의’를 앞세워 지주를 비롯한 ‘반혁명분자’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인민민주주의는 무산계급이 지주·자본가와 기득권층으로 이뤄진 유산계급이 지배하던 봉건 체제를 무너뜨린 뒤 공산당 중심의 중앙집중적인 권력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무산계급이 인민의 적인 유산계급과 반혁명분자를 배제하고 적대시하면서 독재를 펼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중국 당국이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인민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이는 당의 지도와 지배 아래에서 이뤄지는 체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을 만든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창한 ‘민주집중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집중제는 ‘토론은 자유롭게 하되 일단 당이 결정하면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당이 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은 1951년부터 사상개조 운동과 함께 부패·낭비·관료주의에 반대한다는 삼반(三反) 운동, 그리고 뇌물·탈세·국영재산강탈·정부계약사기·국가경제정보누설을 반대한다는 오반(五反) 운동을 펼쳤다. 둘을 합쳐 삼반오반운동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 타도에 나섰다. 1955~57년에는 반우파운동을 펼쳐 공산당에 대한 불평불만 분자를 제거에 나섰다. 토지개혁, 집단농장 등 반대파 숙청 등을 통해 공산당은 독재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발전은커녕 혼란에 빠졌다. ━ 덩샤오핑, 헌법개정으로 개혁개방 시작 그 뒤에는 더 큰 사건이 벌어졌다. 1957년 반우파 투쟁으로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1958~1961년 대규모 인력 투입으로 농업과 공업의 대규모 증산을 노린 대약진 운동을 진행했다. 그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인민공사와 합작사, 집단식당 등을 운영하면서 인민의 재산을 공유화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면,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을 만큼 고도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은 농촌에 소형 용광로를 다량 보급해 쇠를 생산하는 등 기기묘묘한 정책을 펼쳤다. ‘참새는 해롭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참새를 대대적으로 잡는 바람에 참새가 먹던 해충이 창궐해 농촌에 대규모 흉년이 들었다. 중국 전역의 산업과 인프라, 그리고 환경이 대대적으로 파괴되면서 전국이 혼란에 빠졌고, 그 결과 대기근이 발생해 이 시기에만 1500만~55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1976년에는 권력 회복을 노린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중국은 또다시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문화대혁명은 인민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화 한다면서 어린 홍위병의 폭력에 의존해 민중의 사상과 행동을 통일하려고 시도한 사건이다. 명분은 ‘봉건적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세에 몰린 마오쩌둥의 정치적인 술수라는 평가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가 수십만에서 25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는 폐쇄됐고 지식인·문화예술가들과 마오쩌둥에 맞서던 공산당 지도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공산당 원리주의 또는 교조주의의 생생한 모습이었다. 마오쩌둥 집권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 헌법은 그의 말년인 1975년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줬다. 1975년 첫 헌법 개정 때는 당시에 이미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쳤다. 하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78년 3월에 이뤄진 헌법 개정은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방향을 대대적으로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이 그야말로 작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이를 위한 첫 조치로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뺐다. 그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가 주창했던 정책으로 덩샤오핑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조치다. ━ 중국 경제 살린 ‘흑묘백묘’론 변화를 위한 기반을 다진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2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제안했다. 국내체제 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1978년 개헌이었다. 그해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싱가포르에 다녀온 뒤였다. 당시 헌법에 삽입된 4개 근대화는 개혁·개방의 상징으로서 경제성장의 소중한 거름이 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사상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대표된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덩샤오핑의 생각이 잘 반영된 말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일방적인 평등화보다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先富論)을 합치면서 덩샤오핑의 경제사상이 완성됐다. 덩샤오핑의 신념은 공산당 지배는 그대로 둔 상태에서 헌법 개정 작업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는 “인민들이 잘 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라며 실용주의 노선을 앞세웠다.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은 부정하지 않고, 인민 민주주의 독재 정치체제를 지키며,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한다는 중국 사회주의의 3가지 원칙은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통해 부강한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의도였다. 이는 그 뒤 중국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인 보수화를 상징한다. 공산당은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 붙이기)를 폐지했다. 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 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한때 마오쩌둥이 주창했던 인민동원방식이었다. 하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1982년 개헌도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했다. 급진적인 개혁 요구를 제한하겠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 다음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있었으며 이를 서로 타협해 해결했음을 보여준다. ━ 지금 중국경제는 타협의 산물 이런 개혁을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로 더욱 달려 나갔다. 1988년 개헌에선 헌법 11조에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동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임을 인정하고 “국가는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유 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명문화했다.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추가된 셈이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게 했다. 1993년 개헌에선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선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획기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다. 19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며 법치를 명문화했다. 법치의 도입은 중국의 변화를 상징한다. 실제로는 법도 공산당보다는 앞설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 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 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 이념이 인민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인민 대부분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사상에 대한 헌법적 지위도 확립했다. 중국공산당도 변했다.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했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과거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됐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홍색 자본가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권위는 그대로 유지됐다.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중국공산당이 지금까지 100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건국 초기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내부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과만 보지 말고 내부의 변화 과정을 더욱 정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장단점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07.03 19:00
8분 소요![[개혁개방 40년의 중국은 어디로] 경제적 번영 이루고 중화제국 야심 드러내](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2/24/ecn838745483_fSZg3sNz_1.353x220.0.jpg)
국제적 영향력 확대, 군사력 증강 잰걸음… 미국과의 패권전쟁 결과 주목 2018년 12월로 40주년을 맞은 중국의 개혁개방(改革開放)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엄청난 성공을 안겨줬다. 개혁개방 이래 40년 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31배로 증가했다. 미국 매체 ‘지제로(GZERO) 미디어’가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미국 정치학자 이안 브레머가 운영하는 유라시아그룹의 인터넷 매체다. 같은 기간 그나마 경제가 고성장했다는 한국(약 17배)·브라질(약 7배)·인도(약 7배)·말레이시아(약 6배)·미국(약 5배)·독일(약 4배)·일본(약 4배)·멕시코(약 3배)·남아프리카공화국(약 2배)과 비교해도 월등한 성장이다.이런 경제 성장의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다. IMF 통계에 따르면 2017년 중국의 GDP는 명목금액 기준 12조146억 달러로 미국(19조3906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개혁개방의 최대 성과다. 중국이 오랫동안 부러워했던 경제대국 일본(4조8721억 달러)·독일(3조6846억 달러)·영국(2조6245억 달러)을 3~5위로 따돌린 지 오래다. 중국이 과거 19세기와 20세기 초 부국강병을 이뤘던 이 세 나라를 경제 규모에서 눌렀다는 사실은 중국의 ‘역사적 반격’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역사적으로 이들 나라는 중국과 악연이 있기 때문이다.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1840~1842년)과 2차 아편전쟁(1856~1860년) 이후 1997년 10월 1일 0시까지 홍콩과 주룽(九龍) 반도를 식민 지배했다. 청일전쟁(1894~1895년) 이래 만주사변(1931~1932년)과 중일전쟁(1937~1945년)으로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은 중국에 아물기 쉽지 않은 상처를 안겼다. 독일은 1898~1914년 산둥(山東) 반도 남부의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해 식민지로 삼았다. 1세기 이상 경제적·군사적으로 약체의 빈곤 국가였던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강대국의 위상을 되찾은 셈이다. ━ 개혁개방 40년 만에 GDP 기준 세계 2위 중국은 신흥경제국이라는 인도(2조6110억 달러)·브라질(2조549억 달러)과도 격차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2조5835억 달러)·이탈리아(1조9378억 달러)·캐나다(1조6524억 달러)·대한민국(1조5380억 달러)과는 한참이나 차이를 냈다. 한때 사회주의권 종주국 노릇을 했던 러시아(1조5274억 달러)는 비교 대상도 되지 못한다. 물론 인구는 2016년 추정치 기준 14억350만 명에 이르다 보니 1인당 GDP는 8643달러(72위)로 러시아(1만955달러)·터키(1만537달러)·브라질(9895달러)·말레이시아(9755달러)·멕시코(9318달러)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다. 2018년 추정치 기준으로 중국의 GDP는 14조92억 달러로 세계 2위이며, 1인당 GDP는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 1만87달러(71위)에 이를 전망이다. 물가 등을 감안한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GDP가 25조23800억 달러로 세계 1위, 1인당 GDP는 1만8066달러로 세계 79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중국 개혁개방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경이의 연속이다. 중국의 실권자였던 덩사오핑(鄧小平,1904~1997)이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회 전체회의에서 제안한 게 개혁개방의 시작이다.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가속화했고 대내적으로는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중국의 변혁을 놓고 ‘개혁’인지 ‘체제 혁명’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헝가리의 사회주의 경제 전문가로 고전적 사회주의 체제를 분석한 고전인 의 저자 야노스 코르나이는 “공산주의 체제 전환에서 부분적이고 속도가 완만할 경우 이를 ‘체제 개혁’으로, 전면적이고 금속적일 경우 이를 ‘체제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공산당 권력독점 ‘지배적인 공식 이데올로기’ ‘국가적 또는 전인민적 소유형태’의 세 가지로 기준에서 적어도 하나가 근본적으로 변할 때 이를 개혁으로 정의했다. ‘혁명’은 통칭 ‘체제 전환’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가 형성됐을 때를 가리킨다. 체제 전환은 그동안 유지돼온 질서형태가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개혁’은 현재의 집권자와 그와 연합된 국가기구 내부 또는 외부의 그룹에 의해 추진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말한다. 이를 기준에서 볼 때 중국의 개혁개방은 체제 전환이 아닌 개혁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특이한 점은 당시 중국의 형식적인 권력자는 화궈펑(華國鋒, 1921~2008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978년 12월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76년 10월~81년 6월)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76년 10월~80년 6월),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76년 4월~80년 9월)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국무원 총리는 마오의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년)가 54년 9월부터 76년 1월까지 맡았던 자리를 이어 받았다.화궈펑은 권력을 잡은 76년 10월 6일, 과거 문화대혁명(1966년 5월~1976년 12월)을 이끌며 중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이른바 4인방을 전격 체포한 주역이다. 4인방은 배우 출신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이던 장칭, 언론인 출신 장춘차오,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동자 출신 왕훙원, 문학평론가 출신 야오원위안이다. 1981년 재판 결과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왕훙원은 종신형, 야오원위안은 20년형이 선고됐으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장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중국 개혁개방은 체제 전환 아닌 개혁 범주 화궈펑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실각했다 1977년 복권된 덩샤오핑이 화궈펑의 오류를 비판하며 권력 실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부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정치협상회의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를 맡았다. 덩샤오핑은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쥐었다.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을 겪은 중국을 정상화하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으로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젊은 세대 대부분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신속하게 바로 집지 못하면 중국공산당의 권력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덩샤오핑은 벤치마킹 대상을 찾아나섯다. 부총리 시절이던 1978년 11월 중국 지도자 가운데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리콴유(李光耀·1923~2015년) 초대 총리를 만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덩은 깨끗하고 경제적 활력으로 넘치는 이 도시국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1918년 프랑스로 근공검학(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해서 공부함) 고학생으로 유학 가던 중 목격했던 낙후하고 지저분했던 식민지의 풍경을 기억하는 덩에게 싱가포르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혁신의 현장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싱가포르는 권위주의 체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서구 민주주의 체제 도입 없이도 경제 성장을 이룬 싱가포르에 덩샤오핑이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는 이미 1970년대 후반 상당한 경제·사회 발전을 이뤘다. 이런 싱가포르는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개방 정책 시작 이후 자금과 경제 성장 노하우의 주요 공급원 역할을 했다. 중국사 권위자인 임계순 한양대 명예교수는 저서 에서 “중국의 번영을 이끈 개혁개방 아이디어의 근원지가 싱가포르”라고 강조했을 정도다.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처음 제안한 역사적인 현장인 1978년 12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자신이 목격한 싱가포르 발전상을 언급했다. 그는 “나의 꿈은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1000개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그가 개혁개방을 통해 최종적으로 원하는 중국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덩샤오핑은 싱가포르를 거울삼아 나라를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했다. 덩샤오핑은 1992년 1~2월 우한·선전·주하이·상하이 남방 지역을 시찰하고 담화를 발표했다. 바로 남순강화(南巡講話)다. 거기에서도 싱가포르를 질서유지의 모범 사례로도 거론했다.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아예 제도적으로 정착해 공고화하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개헌이라는 공식 절차다. 중국 현대사에서 헌법은 긍정적인 의미가 크다. 개정 과정은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마오쩌둥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 헌법은 20년이 지난 75년 첫 개정됐지만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친 개헌에 불과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1977년 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 진행된 여러 차례의 헌법 개정에선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주는 작업이 진행됐다.특히 1978년 3월의 헌법 개정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사오핑이 작심하고 나선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가 주창한 정책으로 덩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정책이다.덩의 개혁개방 사상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선부론(先富論)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은 실용주의를 가장 잘 요약하는 내용이다.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은 개혁개방 정책의 실질적인 지침이다. 일방적인 평등화나 평준화를 포기하고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은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인 보수화를 상징한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개혁파와 보수파 간 대립을 반영한 셈이다.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붙이기)를 폐지했다. 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마오쩌둥이 주창해선 인민 동원 방식이었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1982년 개헌도 중국공산당내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해 급진적인 개혁 요구를 제한했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성격이 ‘정치개혁 없는 경제 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그 뒤로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루는 데 치중해왔다.이런 조치를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샤오핑은 시장경제화 속도를 높였다. 1988년 개헌에선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헌법 11조에 “자영경제·사영경제 등 비공동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임을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자영경제·사영경제 등 비공유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못을 박았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도록 했다.1993년 개헌에선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경제나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조치다. 중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개혁이다. 19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라고 명시해 중국의 법치를 명문화했다.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중국이 공산화한 지 55년 만이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의 이념은 인민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설 자리를 잃었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사상’도 헌법적 지위를 얻었다.중국공산당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했다.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과거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할 계기로 삼았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자본가(홍색자본가)’까지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지만 공산당의 권위는 유지됐으며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중국식 개혁개방이자 개혁이다. ━ 일대일로 정책 펴고 항공모함 보유 중국 헌법은 올해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3월 11일 전국인민 대표자대회의 결의로 공산당의 영도를 강화하고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철폐해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장기 집권 길을 열어놓았다. 개헌을 통해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한 시 주석은 ‘중화제국’ 수립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고대에 동서 세계를 잇던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현대에 복원하겠다는 ‘일대일로’ 정책에는 국제 영향력 극대화 전략이 엿보인다. 총연장 3만㎞에 가까운 고속철도가 선봉에 서있다. 이미 102개국과 진출 계약을 맺었다. 군사력도 전방위로 증강 중이다. 공격용 외에 달리 쓸 일이 없는 고가의 항공모함을 2025년까지 7척이나 보유할 예정이다. 경제 성장으로 대국을 지향하면서도 민주주의나 자유·인권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를 둔다. 더구나 미국과 무역분쟁이 터지자 ‘사실은 개발도상국’이라고 엄살까지 피운다. 시 주석 시대에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이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당연히 한국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중국을 제대로 알고 중국의 미래를 예측하는 자체 역량을 기르며 대비할 때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18.12.23 10:25
9분 소요A Very Lonely Japan 일본인들은 모든 외국인 방문객으로부터 듣기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편이다. 지난 9월 도쿄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이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간과한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해 주최 측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통렬한 결론마저 내렸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진정한 우방이 많지 않다.” 일본인 청중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슈미트는 “과거에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며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시인하는 문제만 나오면 일본인들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슈미트의 말에서도 일본인 청중은 그다지 위로를 찾지 못한 듯했다. 일본 언론이 그의 강연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은 일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더 지독한 비판에도 익숙해져야 할 듯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또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전쟁 희생자 247만 명을 기리는 곳이다. 중국과 한국은 격렬한 어조로 분노를 표출하고는 항의의 표시로 외교 일정을 취소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한때 일본의 우방이던 나라들마저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진행돼 온 일본의 외교적 고립이 더 깊어질 전망이다. 종전 이후 60년 동안 일본의 전시 행동이 지금처럼 큰 문제가 됐던 적은 없었다. 지난주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이 전처럼 격렬한 가두시위를 촉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 표명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외부 세계의 인식은 더욱 굳어진다. 게다가 일본은 대다수 이웃 나라와 영토 분쟁을 벌인다. 다른 선진 공업국들에는 없는 일이다. 지난주만 해도 동중국해에서의 석유 시추 문제로 중국과의 마찰이 불거졌다. 일본 관리들에게 가장 비통한 사건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일이다. 아시아의 주요 나라들 중 일본의 그런 야망을 지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이 지난 반세기 동안 아시아에 투자·원조 차원에서 수십억 달러를 뿌렸는 데도 말이다. 저명한 외교평론가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는 “솔직히 나도 깜짝 놀랐다. 완벽한 실패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일본은 자국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의심과 분노를 어느 정도는 무시했다. 일본이 경제 강대국인 데다 미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 각국의) 그런 적개심이 일본의 발전을 가로막으려 한다. 시기적으로도 아시아의 지도국이라는 일본의 자부심이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다. 그 결과 20세기 내내 동아시아 맹주의 꿈을 키워 온 일본은 이제 과거의 잘못 때문에 사실상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중국군의 급속한 현대화, 북한의 핵무장, 폭발 잠재력이 큰 각종 영토 분쟁 등 이미 여러 불안정 요인이 발생한 시점에서 아시아로선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1995년 일본의 침략 행위 희생자들에게 사죄함으로써 후대의 모든 공식적 사죄 표현의 황금 기준을 세운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이웃 나라들에는 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고 치료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일본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일본은 전후 평화주의가 뿌리내려 군국주의의 부활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또 일본은 전시에 저지른 일을 거듭 사과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도쿄대 스벤 살러 교수에 따르면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다수 일본인은 1931~45년 자국의 군사행동을 ‘침략 전쟁’으로 기술하는 데 동의한다. 또 지난 8월 초 도쿄에서는 전쟁 당시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로 희생된 외국인 여성들을 기리는 박물관이 개관됐다. 그리고 지난 여름 태평양전쟁 종전 기념일(8월 15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바로 그 고이즈미가 전쟁 책임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재천명한 연설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국민의 상당수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정확한 범위엔 동의하지 않는다. 고이즈미의 8월 15일 연설로 형성된 호의적인 시선도 그의 신사 참배로 여지없이 사라졌다. 일본의 관리나 정치인이 전쟁과 관련된 사과 표명을 할 때마다 또 다른 관리나 정치인은 선동적인 발언을 일삼는다. 지난 1년간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문부과학상은 위안부 징용에서 일본군의 역할을 축소한 수정주의 역사 교과서를 여러 차례 찬양했다. 템플대 도쿄 캠퍼스의 제프 킹스턴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일본에는 전쟁 책임에 관한 합의가 없다. 기억에 합의하지 못하면 책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면 화해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왜 이런 문제가 지금 불거져 나오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사실 합의의 부재는 지난 수십 년간 그래 왔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르다. 첫째, 전쟁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는 제도화한 자기 비난을 ‘피학적 경향’(masochism)이라고 거부하며 미국이 부과한 평화주의도 반대한다. 고이즈미를 포함한 젊은 보수파는 일본을 ‘정상적인 국가’로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 공약에는 일본의 좀 더 적극적인 국제적 역할과, 자위대의 엄청난 군사력을 인정하는 평화헌법 개정도 포함된다.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 고집은 일본이 외국의 요구에 굴복할 때 거부감이 커진다는 현상을 반영한다. 외부 환경도 변했다.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경제 선진국이던 시절, 여타 나라들은 전쟁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는 묵시적 동의의 대가로 일본의 경제 원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다년간의 경제적 번영으로 중국과 한국에 자기 주장이 강해진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면서, 역사는 다시 의제에 포함됐다. 지난 9월 한국의 이해찬 총리는 “우리는 일본 정부에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돈은 우리도 많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 원하는 것은 진실과 정직성, 그리고 양국 간의 건강한 관계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중국과 한국 지도자들은 일본 때리기에 나설 국내적 이유도 충분하다. 대중의 지지를 얻는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상당한 경제·정치적 결과를 낳는다는 증거는 지난 몇 달간 많이 등장했다. 지난 4월 중국에서 반일 폭동이 발생하자 일본 증시는 급락했다. 일본 기업들은 대중국 투자 전략을 재검토하고, 다수 기업은 벌써 공장을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나라들로 옮겨 간다. 일본 재계 지도자들은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신사 참배를 중단하라고 고이즈미를 설득해 왔다. 이는 중국 시장이 기업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신호다. 이웃들과의 계속되는 긴장은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도 약화했다. 일본의 전후 외교전략 기조는 ‘부드러운 힘’(soft power)의 과시다. 일본은 외교의 많은 부분을 인권·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집중했다. 일본 경제력에 대한 외국의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일본은 유엔을 지탱하는 주요 나라이기도 하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은 일본이 유엔 연간 예산의 약 20%를 부담한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됐다. 현재의 5개 상임이사국 중 4개국보다 많은 금액을 부담하는 셈이다(일본보다 많은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공식 의안이 지난 8월 유엔 총회에 상정됐을 때 아시아 국가 중 공식적 지지 의사를 표명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부탄·몰디브 등 세 나라뿐이었다(인도·브라질·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건도 포함된 이 의안은 실제 표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 실패는 중국의 집중적인 반대 운동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본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데 역사 문제를 즐겨 활용했다. 후나바시는 “결국 중국은 일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듯 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두 나라가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패권 투쟁에 나선 마당에 이는 강력한 이점이다. 일본은 이 수렁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 예상대로 일각에선 일본을 비판하는 측에 잘못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카모토 마사히로(일본전략연구포럼 부회장)를 포함한 전직 관리·군인들의 한 단체는 일본이 중국에 외교적으로 좀 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도 역사적 건망증에 걸려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중점을 대중 외교 쪽으로 돌린다. 최근에는 긍정적인 일본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터넷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는 정책 설명을 위해 웹사이트에 외무성 문서의 복사본을 게재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접근법 중 어느 쪽도 지금 가장 필요한 분야에 주력하지 않는 듯하다. 좀 더 폭넓은 화해 정신과 역사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도쿄게이자이(東京經濟)대 부설 국제 역사·화해연구소의 앤드루 호바트는 독일인들이 전후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는 데 성공한 한 가지 이유로 독일인들이 여타 유럽인들과 민간 차원의 접촉을 많이 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접촉은 교회·시민단체부터 노조·학회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이뤄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엄격한 법규정(예컨대 면세 혜택에 관한 까다로운 조건 등)으로 시민단체들의 성장이 저해됐다. 도쿄 소재 와세다(早稻田)대에서 MBA 과정을 공부 중인 중국인 여성 왕진(30)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왕진은 양국의 성난 친구들에게 일본과 중국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 주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매우 슬프다. 일본과 중국이 독일과 프랑스처럼 되기를 바란다. 독일과 프랑스는 훌륭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서로 나쁜 경험이 있었음에도 더 강해졌다.” 도쿄대의 살러가 지적하듯,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화해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미국과 든든한 동맹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이다. 초강대국을 지정학적 파트너로 삼은 만큼 여타 국가들과 사귈 필요를 못 느꼈다. 1950~70년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중 경제적으로 중요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아시아의 모든 나라와 긴밀한 경제 관계를 맺는다. 중국은 최근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1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릴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새로운 협력정신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 회담의 목적은 유럽연합(EU)을 대충 모방한 동아시아 공동체(East Asian Community) 건설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좀 더 강력한 아시아의 통합을 추구해 왔다. 안보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인 만큼 새로운 지역 협력을 위한 기회가 성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를 만들려는 일본의 노력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좌절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With HIDEKO TAKAYAMA and KAY ITOI in Tokyo 장병걸 cbg58@joongang.co.kr
2005.10.26 17:37
7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