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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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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캅스 보던 서울극장 추억 속으로”…사라지는 그 시절 데이트 장소

산업 일반

1970년대를 빛내던 서울 종로의 극장가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그 시절 나팔바지와 백구두를 신은 신사·숙녀들로 바글바글했던 영화관은 이제 한적하고 낡은 건물로 여겨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공간으로 남겨지고 있다. 올해로 개관한 지 42년 된 서울극장 역시 오는 8월 31일을 기준으로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 3일 서울극장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폐관 소식을 알렸다. 서울극장 측은 “1979년부터 약 40년 동안 종로의 문화중심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울극장이 2021년 8월 31일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하게 됐습니다”라며 “오랜 시간 동안 추억과 감동으로 함께해 주신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작별 인사를 내걸었다. 서울극장은 폐관 이유에 대해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영난 악화”로 설명했다. 서울극장은 단성사와 피카디리, 허리우드, 국도극장, 대한극장 등과 함께 우리나라 70년대 영화관 전성기를 이끌었던 극장이다. 서울극장은 1989년에 상영관을 3개관으로 늘려서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라는 타이틀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가 전국적으로 생겨나면서 서울극장은 점차 쇠락했는데 지난해 코로나19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영업을 종료하게 됐다. ━ 70년대 낭만 책임지던 ‘피카디리’ ‘허리우드’ 서울극장이 8월에 문을 닫음으로써, 7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채워주던 영화관 중 대한극장만이 영업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1913년에 세워진 국도극장은 1999년도에 허물어지고 현재는 호텔 ‘베스트웨스턴 프리미어 호텔국도’가 운영되고 있고, 1960년에 개관한 피카디리는 현재 CGV로 흡수돼 ‘CGV 피카디리 1958’로 변신했다. 1969년에 문을 연 허리우드 극장은 2009년 실버 영화관으로 바뀌어 노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관이 됐다. 일명 ‘추억의 흥행작 전용 극장’으로 70년대 종로 극장가에서 상영하던 옛 영화를 다시 상영한다. 7월에 상영하는 추억의 흑백영화로는 ‘피크닉’ ‘노다지’ ‘파리의 연인’ 등이 있다. ━ 4차 대유행으로 정부 지원 절실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는 2008년 부도를 겪으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2019년에 한국 영화 탄생 100돌을 맞아 ‘단성사 영화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단성사는 최초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한 극장이었다. 현재까지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대한극장은 1958년에 세워진 영화관으로 2001년에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고, 최신 영화를 상영하며 운영되고 있다. 영화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대형 멀티플렉스 또한 어려운 상황 속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극장의 영업 종료 소식은 영화관 사업의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는 현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거리두기로 극장 내 좌석 띄어 앉기, 취식 금지, 영업시간 단축 등 극장 운영의 악재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정부의 지속 가능한 지원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서울극장 폐관은 시대를 상징하는 영화로운 장소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대 속 극장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를 의미하고, 그 가운데 지원 예산을 확보해 영화 산업을 지켜나가야 하는 골든타임임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2021.07.10 10:00

2분 소요
에스.티. 듀퐁클래식에 새긴 그의 스토리(13) 소리꾼 장사익

산업 일반

소리꾼 장사익은 셔츠에 ‘자연스럽게’라고 새겼다. 인터뷰 중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인왕산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종로구 세검정로 그의 집 거실에서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과 소리꾼 장사익이 만났다. 인터뷰를 주선한 김영만 사진작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분야의 인물간 대화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하다”며 동석했다. 장사익은 “차를 너댓번 나눠 마셔야 마음이 통한다”며 아끼던 보이차를 내놓았다. 집 마당에 걸린 풍경이 내는 소리가 차를 마실 때나 인터뷰 중간에 시간의 멋을 더해 주었다. 송길영(이하 송): 셔츠에 ‘자연스럽게’라고 새기셨다. 어떤 의미인가?장사익(이하 장):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로 옆 바위를 가리키며)저 바위는 만들어진지 엄청난 시간이 흘렀을거다. 바위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하루살이다. 자연의 일부인 셈이다. 자연 계절처럼 살면 좋겠다 싶어 자연스럽게라고 적었다. 원래의 때가 있는데 그보다 앞서서 좋을 게 없다는 의미다.송: 노래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나?장: 요새는 기계가 좋으니까 다들 노래를 참 잘한다.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노래도 많다. 무엇이든 제맛을 내려면 기술보단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 무언가가 필요하다. 숙성된 김치가 맛나듯 사람은 성숙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은 표현을 잘한다.송: 매달 공연이 있는 것으로 안다. 선생님의 노래를 듣다보면 위안이 된다.장: 공연은 꾸준히 하는 편이다. 내가 밝은 노래를 하면 관중석에서 “왜 슬픈 노래를 안하냐”고 말한다. “저 울러 왔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울고나면 마음에 찌꺼지가 내려가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 한 소절에 꽂혀 좋아하더라 송: 일상에선 눈물이 안 나는데 음악이나 영화 보면서 울고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선생님의 노래들도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것 같다.장: 대개 한 가수를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모든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다. 한 곡, 그 중에서도 한 소절에 꽂혀 좋아하는 것 같다.송: 선생님은 충청도 분 아닌가? 남도 출신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장: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 출신이다. 서해안 짠 바람, 짠 물 보고 자랐다. 다만 군 생활 3년을 문화선전대로 전라도에서 보냈다.송: 문화선전대는 노래를 잘해서 들어가셨을 텐데 어떻게 배웠나?장: 내가 노래 배울 당시엔 교육 시스템이 없었다. 지금의 탑골공원 옆 허리우드 극장 부근엔 작곡가 사무실이 많았다. 당시 남진, 나훈아씨도 거기서 배운걸로 안다. 당시 화신백화점 근처가 내가 상고 나와서 다니던 직장이었는데 저녁마다 낙원동 작곡가 사무실에 가서 월급 탄 거 다 주고 노래를 배웠다. 3년 동안. 그 실력으로 문화선전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군대 제대하고 나선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갔다.송: 잘하는 걸 왜 그만뒀는지? 이후 어떻게 음악과 인연을 다시 맺게 됐나?장: 당시 슈퍼스타는 단연 나훈아, 남진이었다. 난 촌놈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1972년에 제대하고 73년 무역회사 들어갔는데 에너지 파동이 왔다. 그때 회사에서 잘리고 다른 직장을 다니다 80년부터 국악을 배우기 시작했다.태평소, 대금, 피리를 배우면서 직장 15군데를 옮겨 다녔다. 마지막 직장이 옛 도산대로에 있는 옛 앙드레김 사무실 근처에 있는 카센터였다. 계속 노래를 하고 악기를 배우다 우연히 임동창과 함께 사물놀이 하는 김덕수 밑에서 3년을 배웠다. 어느날 사물놀이 공연을 마치고 뒷풀이에서 노래를 했는데, 그게 인연이 돼 기획사를 만나 첫 앨범을 냈다.송: 무언가를 꾸준히 하면서 놓지 않아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흥미로운 건 국악이 먼저가 아닌 가요를 먼저 배우신 점이다. 사람들은 소리꾼이라고 하지않나?장: 나는 엄밀히 말해 대중음악 하는 사람이다. 소리꾼은 과분한 칭찬이라 생각한다. 난 원래 국악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즉흥적이고 재즈적 요소가 있는 태평소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들 생각하시는 것 같다. ━ 나를 소리꾼으로 불러주는 건 과분한 칭찬 송: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나오는 태평소 소리는 선생님이 연주하신 건가?장: 앨범 녹음은 김덕수가 했고 공연에서 라이브는 내가 불렀다. 그냥 흥에 따라 불렀다.송: 지난해 수술을 하셨다고 안다. 이제 목소리는 완전히 회복하신건가?장: 밤이 지나니 다시 낮이다. 2년 전 호흡도 짧아지고 목이 계속 안 좋아 지난해 1월 검사를 받았더니 목 성대에 혹을 발견해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보름 동안 말 한마디 못했다. 무섭더라. 소리가 얼마나 귀한지 알게됐다. 한편으론 수술하게 된 건 건강히 오래 노래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송: 저 역시 강연을 자주 하다보니 소리가 안 나오는 상황을 겪는다. 지금도 성대결절 상태다. 난 목소리만 나오면 되는데 선생님의 경우는 다른 것 같다. 쉽게 이야기해서 악기가 바뀐 것 아닌가?장: 혹 떼어내고 나서 새 살이 나오니 소리 밸런스가 맞지 않더라. 이제는 많이 잡혔다. 영원히 소리 잃는 경우도 있는데 참 감사하다.송: 공연을 많이 하시더라. 괜찮으신가?장: 지난해 단독공연만 12개 했다. 올해도 이미 3차례 했다.송: 한번에 노래 몇 곡하시나?장: 20곡 정도한다.송: 관객이 훌륭하면 나도 모르게 몰입되지 않나?장: 그렇다. 세종문화회관이 3000석이다. 노래 시작하고 3분이다. 그 시간 안에 관객과 내가 하나가 되면 3001의 힘으로 노래를 한다. 깃털 같은 힘으로 가능한 셈이다. 그게 안되면 너무 힘들다. 강연도 마찬가지 아닌가?송: 다시 여쭙겠다. 노래는 자연스럽게 하려면 얼마나?장: 요새는 다들 워낙 잘하니까… 그런데 사시사철 겪은 다음에 씨앗이 열매가 되지 않나. 노래는 매끄럽게 하는 것 보다 깊이하는게 중요하다. 기술이 아닌 표현으로 승부하면 좋겠다. 여름을 보내지 않은 과일은 달기만 하고 제맛을 찾긴 어렵다.송: 우리는 고음이 안 올라가면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말씀대로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장: 그렇다. 노래의 높낮이, 부르는 톤, 느낌은 부르는 때마다 다르다. 앨범은 기록일 뿐이다. 지금 내 1집 앨범의 노래를 불러서 같은 느낌이 나오겠나. 이젠 주름상도 많고 허리도 굽었다. 이게 내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내 노래를 듣는 관객도 같이 늙었다. 나만 그대로라면 얼마나 어색한가.송: 대표곡 중에 을 좋아하는데 알고 보니 선생님이 직접 작사하신 곡이더라. 장: 내가 잠실 5단지에 살때였다. 그 동네가 덩쿨장미가 참 예쁘다. 마땅히 하는 일이 없는 백수였는데 버스정류장 가는 길에 향기가 참 좋더라. 향기를 따라 갔더니 화려한 장미꽃이 아니라 같은 장미과 중에 찔레꽃이 소복히 피어있더라. 찔레꽃 향기였다. “저게 나다.” 찔레꽃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서 깨지고 터지면서 큰소리 하나 못내는 나. 그 마음을 글로 적어 노래를 했다. 한마디로 당시 감정을 토해낸 거다. (장사익은 즉석에서 찔레꽃 노래 몇 소절을 불렀다.) 부르고 나니 온몸이 개운하더라. 찔레꽃은 박자가 없다. 느끼는 대로 호흡에 맡겨 부른다. (그는 다시 박자가 없이 찔레꽃을 두 소절 불렀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게 노래야, 국악이야 헛갈려 하더라. 10년 정도 지나니 이 호흡을 따라오더라. (장사익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불렀다.) 이렇게 유행가도 박자 무시하고 자신의 느낌에 맞춰 불러보면 참 좋다. 송: 마치 시조를 읊는 것 같다. 예측할 수 없으니 몰입하게 된다. 소리를 못 듣는 분도 만났다고 하던데? 장: 지인 중에 이현주 목사님이 계신다. 그분이 한 여성 청각장애인을 모시고 찾아왔다. 11살 때 청력을 잃었는데 연습을 통해 말은 어느정도 하시더라. 그런데 이 분이 내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만난 김에 다시 내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주위를 돌더라. 소리의 음파를 찾는 거였다. 그 모습에 다들 울기도 했다. 그 여성도 내게 연습한 노래를 들려주더라. 아주 어릴적 청력을 잃기전에 배운 찬송가였다. 음은 엉망이었지만 감동이었다. 그때 이현주 목사님이 시를 한편 가지고 오셨다. 제목이 ‘우리는 만나 서로 무얼 버릴까’다. 내용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남과 북을 떼어내니 한강, 큰 강이 되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의 무엇을 버려야 할까. 이런 내용이다. 이 내용으로 노래를 지었다. 송: 다들 서로 얻으려고 하는데 무얼 버릴까 이야기하는 게 울림이 있다. 다른 주제이지만 질문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불안해 한다. 취업도 안 되고 경쟁이 심하니까. 내가 한 강연에서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라”고 말한 동영상에 ‘한가로운 이야기’라는 댓글이 달렸더라. 선생님은 40대에 길을 바꾸셨다.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장: 단시간에 승부를 내려고 하면 금방 지친다. 꾸준히 해야 한다. 10년을 하면 된다. 한국인에게 3이 문제다. 3년만 꾸준히 하면 10년은 간다. 그러면 일가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안 하더라. 20살 친구에게 30살까지 연습하라고 하면 도망간다. 10년을 앞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 금방 승부내려고 하지말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난 늙어서도 시작한 일이 몇개 있다. 그 중 하나가 붓글씨다. 꾸준히 하다보니 여기저기서 글씨를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2007년 이상봉 파리 패션쇼에서 쓴 글씨가 내 글씨다. ━ 3년만 꾸준히 하면 10년은 간다 송: 26살에 직업을 고민했다. 이후 10년 정도 하니 길이 조금 보이더라. 장: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좋겠다. 하지만 과정이 필요하다. 언젠가 보니 노래를 듣다가 궁금하면 금새 핸드폰으로 찾더라. 송: 사운드하운드란 어플이 있다. 쉽게 찾는다. 장: 과거에 연애하려고 편지를 쓰려면 시집을 읽고 찾으며 시 공부를 했다. 요새는 컴퓨터에서 그냥 찾는다. 길을 걷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세상이 된거다. 송: 초등생에게 꿈이 뭐냐 하면 건물주라고 답한다고 하더라. 과정 없는 결과를 꿈이라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슬프더라. 게다가 학교 내신은 상대평가라 친구들에게 자신이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조차 안가르쳐 준다. 대학에선 노트를 안 빌려주고. 경쟁만 배워서 협동이 안 된다. 장: 젊음은 여름이잖나. 여름이 중요하다. 덥고 짜증날 거다. 그런데 열매가 성장하고 익는 건 여름이다. 젊은 사람에게 여름은 필요하다. 산악인 고 박영석씨가 사고를 당한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에 우리 집에 찾아왔다. 내가 거길 어떻게 올라가냐고 물었다. 대답이 목적지를 보면서 가지 않고 발 앞을 보며 간다고 하더라. 오늘 하루가 내 10년의 모습을 결정하는 벽돌이다. 송: 일본 작가 무라야미 하루키는 그의 책 『소설가로 산다는 것』에서 좋은 작가가 되려면 체력을 키우라고 하더라. 장: 2009년 중앙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기록은 4시간 12분. 당시 환갑을 맞이해 내 자신의 몸에 선물을 하나 하고 싶었다. -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정리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

2017.05.26 10:39

7분 소요
[Seoul Serenade] 소싯적 꿈 되살려준 ‘음악의 낙원’

산업 일반

서울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아래의 장소들이 언급될 듯하다. 청계천, 삼청동, 경복궁, 이태원, 인사동, 압구정동, 홍대 입구, 여의도 공원…. 외국인을 위한 서울의 관광 안내서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곳들이다.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어느 관광 안내서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불결하고, 칙칙하고, 낡아빠진 4층짜리 건물이어서일까?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라. 결코 출입 금지구역도, 우범지대도 아니니까. 바로 낙원상가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그곳에 가면 온갖 악기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놀라운 별천지가 펼쳐진다.나는 그 별천지를 우연하게 찾아냈다. 실은 영화를 볼 요량으로 영화 광고를 열심히 쳐다보다가 필름포럼(옛 허리우드 극장)이 있는 낙원상가를 알게 됐다. 때마침 한국어로 제작된 영화만 상영된다는 말에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근데 왠지 모를 호기심에 이끌려 그 건물 2, 3층으로 올라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내 눈앞에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복도마다 빼곡히 놓인 피아노, 수백 개는 너끈히 될 듯한 가게를 가득 메운 기타, 앰프, 만돌린, 바이올린, 밴조, 심지어 하와이 원주민들이 쓰는 4줄 현악기 우쿨렐레까지-. 지금은 홍보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나의 소싯적 꿈은 달랐다. 그때만 해도 멋진 록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를 꿈꾸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표주자 격인 영국 출신의 ‘예스’ 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결성된 3인조 록밴드 ‘러시’나, 그것도 아니라면 보다 정통파에 속하는 ‘밴 헤일런’이나 ‘더 후’ 같은 록 그룹의 멤버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연주 기법을 향상시키려고 밤에도 음악전문지를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할 정도였다.그러나 록그룹의 멋진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내 꿈은 꿈으로 그쳤다. 고교와 대학 시절,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조그만 밴드에서 연주를 했던 정도였다. 나의 최고 전성기를 꼽으라면 워싱턴 DC의 유명한 ‘9:30 클럽’에서 일당 100달러를 받고 연주하던 시절이었던 듯하다(맥주는 무료로 마셨다). 그래도 그 생활이 좋았고 그 시간들을 즐겼던 듯하다. 결국은 음악과 무관한 직업을 갖게 됐지만 악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직도 결코 식지 않았다. 낙원상가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모든 가게가 한 곳에 밀집해 있다는 점이다. 나 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얼핏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게란 한 곳에 모여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다른 동네로 가는 편이 훨씬 낫다는 ‘시장원칙’을 어릴 적부터 주입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낙원상가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가격과 품질을 서로 비교해가며 쇼핑하기에 안성맞춤일 뿐 아니라 상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악기점으로 봐도 미국의 여느 대형 악기점보다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랜드 피아노, 각종 녹음 소프트웨어, 아코디언 등 모든 악기와 장비가 한 지붕 아래에 있다(도쿄 신주쿠에서도 이런 곳은 구경하지 못했다). 조금만 발품을 팔아도 필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로도 충분히 의사전달이 가능하다(가령, “어, 시퀀서 있어요?”라고 물으면 된다. 시퀀서는 여러 가지 사운드를 작곡·편곡·재생에 이용하게 하는 장치다).그곳을 어슬렁거리다가 ‘놀라운’ 수확물을 건진 적도 있다. 록음악의 전설인 에릭 클랩턴이 크림 밴드 시절에 쓰던, 몽환적 분위기의 무지개 무늬가 새겨진 기타의 완벽한 복제품을 발견한 까닭이다. 물론 낙원상가엔 정말 ‘소름’ 돋게 하는 물건도 있다. 흉측하게 생긴 기타와 볼썽사나운 기타 스트랩(멜빵)이 그런 예다. 특히 1980년대 제작된 집채만 한 가라오케 기계와 시퀀서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덕분에 이젠 완전히 무용지물이 됐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누군가의 ‘낙점’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내가 윈도 쇼핑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고 따뜻한 음색을 가진 아름다운 야마하 피아노를 거기서 구입했다. 그 피아노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가장 아끼는 물품 목록 중에서도 맨 위에 올라있다(이웃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악기점 주인들에게 어떤 신제품이 나왔는지를 직접 묻곤 한다. 그 과정에서 외국인과 한국인을 불문하고 음악인들과도 친해질 기회도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면 상가 복도를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듯하지만 실은 놀라운 효과음을 내는 최신형 이펙트 페달(전자기타의 음 변환 장치), 드럼 스틱, 악보대의 출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어디서 살든지 간에 나는 악기점 ‘탐사’를 즐긴다. 낙원상가 같은 곳이 서울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더군다나 내 사무실과도 가깝다. 물론 낙원상가는 낡고, 불결하고, 어쩌면 초라하다. 그래도 애착을 떨칠 수 없어 다시 찾곤 한다. 그러고 보니 기타 줄을 새로 갈아 끼울 때가 된 듯하다.

2009.02.17 16:19

3분 소요
시네마테크 친구들 뭉쳤다

산업 일반

“저기, 소개가 덜 끝났는데요…. ” 행사 관계자가 무대에서 내려서려던 사회자를 조심스럽게 불러세웠다. “아참! 죄송합니다. 깜빡했네요. 여러분, 봉준호 감독입니다. ” 1000만 관객의 신화를 일군 ‘괴물’의 감독을 빼먹다니 영화제 사회자로 너무한다 싶었다. 그런데도 사회자는 귀빈 소개를 잊은 중대과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너스레까지 떤다. “솔직히, 가끔 좀 빼먹으면 어떻습니까?” 지난 1월 18일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설립을 위한 200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라는 상당히 긴 이름의 영화제가 시작됐다. 개막식에는 사회를 맡은 영화배우 권해효와 박찬욱 감독을 비롯한 영화계의 유명인사들이 참가해 관객과 같이 객석의 한 켠을 채웠다. “이곳에 오면 유명감독이든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모두 똑같은 영화 관객, 영화 팬일 뿐”이라고 김수정 서울아트시네마 사무국장은 말했다. 박찬욱 감독은 “덕분에 미처 보지 못한 옛 영화들을 실컷 본다”며 시네마테크 예찬론을 폈다. 영화교육은 무조건 열심히 많이 보기 말고는 방도가 없다고 했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 중 한 명인 그에게 시네마테크는 평생학교인 셈이다. 흔히 시네마테크(Cinemath뢲ue)를 예술영화 전용관이나 독립·실험영화 전용관과 혼용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시네마테크는 일종의 도서관이다. 옛 영화, 예술영화, 실험영화, 대중영화 등 모든 장르의 영화필름을 수집하고 보관하며 상영한다. 원래 시네마테크란 프랑스어로 필름 보관소를 뜻한다. 시네마테크 운동은 영화가 보존돼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세계 각지의 영화를 수집하고 보관하며 상영하는 기능을 고루 갖춰야 한다. 운영은 민간이 하더라도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도 민간이 운영하지만 예산의 90% 이상을 정부가 지원한다. 하지만 한국의 시네마테크는 사정이 매우 열악하다. 부산영화제의 성공 덕분에 부산시가 흔쾌히 지원에 나선 ‘시네마테크 부산’을 제외하면 서울의 시네마테크조차 전용관 하나 없다. 국고 지원을 받지만 임대료를 내고 나면 영화 한두 편 구비하기조차 힘들다. 대전, 대구 등지의 시네마테크는 영화를 좋아하는 개인이 사재를 털어가며 손실을 메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시네마테크 전용관 노릇을 하지만 상영관만 있을 뿐 자료실을 갖추지 못해 절름발이 신세다. 더구나 2년마다 셋집을 전전해야 한다. 현재는 낙원상가 옥상 옛 허리우드극장 터에 자리 잡았지만 언제 내줘야할지 모른다. 2년 전 아트선재센터로부터 계약 갱신 거부를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트시네마 사무국은 여전히 마음을 졸인다. 그래서 감독, 배우, 평론가 등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로 나섰다. 모임의 대표를 맡은 박찬욱 감독과 김홍준, 홍상수, 김지운, 봉준호, 류승완·오승욱 감독, 영화평론가 김영진, 정성일, 배우 유지태와 엄지원 등이다. “여기가 아니면 시네필들이 갈 곳이 없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절박함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수익금은 전부 전용관 건립에 사용된다. 2월 6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친구들’이 직접 추천한 10편과 함께 일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절규’가 일본보다 먼저 개봉된다. ‘친구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은 만큼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관객이 뽑은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16세기 천재화가 카라바조의 삶을 그린 ‘카라바조’도 상영된다. 지난해 여름 ‘시네바캉스’ 영화제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빌리 와일더의 특별전도 준비된다. ‘7년 만의 외출’에서 나풀대는 메릴린 먼로의 치마를 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한국 영화감독의 우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김기영 감독의 특별전도 열린다. 대표작 ‘하녀’ ‘육식동물’을 비롯, 새로이 복원돼 처음 소개되는 63년 작품 ‘고려장’도 상영된다. 김기영 하면 왠지 음산하고 기괴한 느낌이라 꺼려졌다면 이번 영화제에 꼭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개막식에서 ‘고려장’ 상영 내내 객석을 가득 메웠던 웃음의 비밀을 알게 된다. 블록버스터 영화나 멀티플렉스 문화에 물렸거나, 좀 더 색다른 영화에 목마른 관객에게는 시네마테크가 제격이다.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문화다양성이라면, 그 문화다양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시네마테크다.

2007.01.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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