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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형의 일본에서 건지기/日영화 실락원]50대 실직자의 불륜 도 상품화

[이규형의 일본에서 건지기/日영화 실락원]50대 실직자의 불륜 도 상품화

지금 포도주를 맛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일본에 와서 처음 사 먹어 보는 포도주다. 맥주를 사러 동네마다 있는 소매상에 들어갔더니 한쪽에 고급스럽게 치장된 이 포도주 ‘샤토 마고’가 있었다. 특별진열대 앞엔 이런 문구가 있다. <실락원 포도주> ― 두 남녀가 정사(情死) 전에 마셨던 그 포도주. 값은 7천8백엔(7만원 가량). 주위의 대중적 포도주들보다 압도적으로 비싸다. 이런 동네 소매점에선 안 팔릴 술이다. 그것도 원래는 2만엔(18만원) 정도 하는 것인데 너무 많이 팔려 특별히 이 기간(실락원 붐 기간)에만 세일을 한다는 거다. 평소 와인에는 별 관심도 없는 나이지만 영화를 이런 식으로 또 팔아먹는 재주에 감복하며 흔쾌히 썼다. 실락원. 97년도 극영화 부문 최고 히트작. 관객 2백60만명 동원에 일본 전국을 불륜 붐에 빠뜨린 영화. 우선 이 영화 내용은 대충 이렇다. ―‘두 남녀의 시체 검시결과 보고서.’ 여관방에서 발견된 남녀는 완전히 나체였고 두 사람의 성기가 결합된 상태였음. 남녀의 그 부분이 너무 단단히 얽혀 있어 떼내는 데 힘이 몹시 들었음. 남녀의 죽음은 붉은 포도주에 타서 같이 마신 독극물이 원인…. 지금 일본을 엄청난 불륜붐에 빠뜨리고 있는 영화 ‘실락원’의 라스트 자막이다. 물론 이 자막이 뜨기 직전의 화면은 정사를 약속한 뒤 남녀의 격렬한 정사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남자가 독이 든 포도주를 입에 머금고 여자 입에 흘려넣으며 일생일대의 후회없는 섹스를 벌인다.― 바로 이 장면에 나오는 포도주가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실락원 포도주’이다. 영화의 정사장면을 생각하며 마시면 왠지 맛이 틀리다. 나랑 비슷한 생각들을 하며 지금 수도 없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취해가고 있겠지. 특히나 현재 불륜여행(?)중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실락원’의 히트요소를 읽으면 우선 돈이 보인다. 이 영화에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뭔가? 제대로 된 인기배우가 진짜 키스(혀가 얽히는)를 해 낼 정도의 농염한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 영화에서 왕년엔 잘 나갔지만 어느 날 갑자기 회사내 한직으로 밀려난 50대 남자를 연기하는 배우는 ‘야쿠쇼 호우지.’ 올해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안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우나기’(뱀장어)의 주연배우다. 96년 최고 흥행작 ‘Shall We Dance’로 일본 아카데미상 남우 주연상을 거머쥔 인기절정의 연기자다. 말이 필요없는, 여자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원작인 ‘와타나베 준이치’의 애정소설은 영화화 돼 ‘야쿠쇼 호우지’가 숨을 불어넣고, 주인공 이미지를 형상화시킴으로써 급작스럽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 전국 여성들이 이 남자배우를 생각하면서 소설의 정사장면을 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배우도 차갑고 야무진 연기로 정평있는 ‘구로키 히토미.’

40대 주부층 공략이 성공요인 실제로도 30대 유부녀인 그녀는 영화 속에서도 의사 남편에게서 몸과 마음이 떠난 30대 여자로 분한다. 중견감독 ‘모리타 모시미츠’의 조금씩 점점 더 진하게 섹스테크닉의 도를 높여가는 연출도 일품. 처음엔 서로가 젖가슴만 애무하는 신에서 중반엔 오럴섹스 그리고 막판에는 발가락까지 핥는 완전한 사랑(?)…. 그러나 영화 내용보다는 전혀 틀린 면에서 이 영화가 히트했다. 그건 세대차 공격이다. 일본 낮의 TV방송들은 주로 연예계 스캔들과 주간지성 사고·사건으로 도배질 되는 ‘와이드 쇼’를 방영한다. 어떤 민방도 하루 서너 시간을 ‘와이드 쇼’에 편성하는 바 여러 TV국들의 공식적인 타깃은 정해져 있다. ‘40대 주부를 잡아라!’ 40대 주부를 잡으면 30대와 50대가 따라 움직이며 시청률을 좌우한다는 거다. ‘실락원’의 히트도 마찬가지다. 30, 40대 주부들이 볼 TV프로는 있지만 그녀들을 위한 오락거리는 세상에 거의 없다. 어린애들과 남자 어른이 볼(즐길) 영화는 있지만 주부용 와이드쇼 성격의 극장판이 없었다는 얘기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전혀 무방비상태(?)의 그녀들에게 한 번 폭탄을 쏟아볼 가치가 있다. 비단 소프트웨어만이 아니다. 돈과 시간을 사실은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그녀들이 아닌가. 그녀들을 정신적으로 시원하게 해 줄 상품, 오락장, 모임, 파티 등을 생산하거나 주최해 보시라. ‘실락원’의 경우 영화상영 시간대를 분석해 보면 이 특별한 집단이 얼마나 황금덩어리인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일본의 평일 극장 오픈시간은 원래 정오쯤이 일상적인데 이 영화는 1시간30분 앞당겨져 오전 10시30분부터 손님들을 부른다. 남편이 출근하면 오전 시간이 남는 아줌마 관객들을 싹쓸이 하겠다는 전략이다. 원래 주부층은 영화관의 관람객 대상에서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런 영화계 상식을 ‘실락원’은 날카롭게 꾸짖고 있는 인상마저 풍기고 있다. “영화 만드는 친구들. 불륜을 멋있게 좀 다뤄봐. 우리가 극장 대박 터지게 해 줄게. 젊은 애들 영화만 만들지 말고 우리한테도 좀 신경써 달라구!”하는 식으로. 실제로 10시30분 표가 매진되자 또 다시 한 시간 반 댕긴 특회 9시까지 몽창 매진되는 영화흥행상의 대 이변이 벌어졌다. 여름방학중 어린애들 영화에나 가끔 있는 특회 매진현상이 방학도 아닌 평소에 터진 거다. 남편과 애들을 출근시킨 직후 옆집 엄마와 손에 손잡고 달려오면 9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정오 상영 전까지 두 회를 빼먹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을 우리는 가만 놔둘 것인가. “왜 너는 그럼 안 만드냐? 영화감독이라면서”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이거 보슈! 돈이 된다고 무조건 합니까? 여태까지 청소년영화만 만들고 살아온 내가 이것 때문에 속보일 순 없는 거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돈 되는 사업이라는 것도 임자가 있다는 얘기다. 나 말고도 이런 영화를 잘 만들 감독들이 많이 있으니 그 사람들 영화를 보면 되는 거다.

영화장면 관련 패키지 상품 잘 팔려 그러나 나 역시 기획자로서(감독으로서가 아닌) ‘실락원’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돈벌이가 있다. 영화 중에 나오는 기차노선, 카페, 정사하는 여관을 묶은 여행사 패키지 상품까지 날개돋친 듯이 팔리고 있는 게 일본의 현실이다. 도쿄에서 카루이자와까지 가는 기차여행은 이후 불륜커플들의 즐거운 노선이 되었다. 여행사의 패키지 아이템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실락원 포도주’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히트가 아니라면 내가 세상에 ‘샤토 마고’란 포도주가 있는 줄이나 알았을까? 영화가 히트했을 때 빨리 그 영화를 분석해 장소와 상품을 팔아먹을 수 있는 기획! 이것이 ‘실락원’이 나에게 준 교훈이며 어쩌면 ‘영화를 읽으면 돈이 보인다’의 테마이기도 한 것이다. ‘실락원’에서 보았듯 우리가 영화를 돈으로 만드는 기본적인 감각은 국내 영화든 외국 영화든 그 영화 속에 나오는 상품과 장소를 팔아먹는 거다. 실락원 포도주라고 영화명을 붙여 소매로 팔면 아무 문제가 없다. 가끔 저작권이 존재하는 상품을 팔아 문제가 되긴 하지만 먹는 것, 마시는 것 같은 소비상품은 문제될 이유가 없다. 두 번째는 장소로서 ‘콰이강의 다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관광명소가 됐듯 여행상품에 동반되는 운송사업, 숙박사업, 관광가이드 사업, 관련 기념상품 사업 등이 히트영화에 편승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업 아이템이다. 미국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불멸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로케이션 장소들은 끊임없이 잘 나가는 장사가 된다. 영화의 무대인 남부지방과 핵심지인‘애틀랜타’를 각 영화사들이 패키지 상품으로 팔고 있는 거다. 그냥 로마 여행하라고 여행사에서 광고하면 안 가던 사람들에게 영화‘로마의 휴일’을 완전히 맛볼 수 있는 ‘로마의 휴일’ 패키지상품을 팔면 성공한다. 일본 최대 여행사 ‘니혼 조오코’사는 그레고리 팩과 오드리 헵번을 마치 자기네 모델인양 내세워 단단히 한몫 봤다. 국제통화기금(IMF) 시대인 만큼 국외로 나가는 패키지보다는 한국영화의 최고 화제작을 잘 연구해 상품과 장소를 파는 기획을 한다면 실속있는 영화장사가 될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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