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해외동향]‘미국版 대우’ 엔론, 눈덩이 부채 숨기다 파산

[해외동향]‘미국版 대우’ 엔론, 눈덩이 부채 숨기다 파산

「포천」지 선정 6년 연속 ‘가장 혁신적인 기업’,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뽑은 ‘올해(2000년)의 에너지 업체’. 지난 12월2일 파산보호신청을 낸 미국의 에너지업체 엔론에 대한 그간의 평가다. 1년 뒤 망한 기업치고는 관대한 평점을 받아온 셈이다. 엔론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연간 매출액이 1천7억 달러인 미국 7대 기업에, 1년 동안 매출이 2백% 이상 급증하는 초고속 신화의 주역이었다. 엔론은 천연 가스와 전기·원유 등 에너지를 온라인 상에서 거래하는 세계 최대 네트워크를 구축, ‘창조적 파괴자’라는 호평을 받아 왔다. 1990년만 해도 가스 송유관 사업은 엔론 매출 가운데 80%를 차지했으나 그 후 10년 동안 엔론 매출구조는 다각화되고, 복잡하게 변했다. 엔론의 매출 가운데 95%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파생상품거래까지 포함하는 소위 ‘도매 에너지 영업 및 서비스’를 통해 나왔다. 많은 경영학 관련 서적들은 텍사스 휴스턴의 중소 에너지회사에 불과했던 엔론이 15년 만에 어떻게 초고속 신화를 구축했는지를 대표적인 21세기형 성공 케이스로 칭찬해 왔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은 엔론이 규모와 성장성·혁신성까지 갖췄고, 향후 10년 간 최고의 성장주로 각광을 받을 것이라며 앞다퉈 매수 추천을 냈다. 엔론에 대한 월가의 낙관론은 주가급락이 본격화되던 지난 10월까지도 지칠 줄 몰랐다. 일례로 자체 운용펀드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가 지난 4분기 동안 엔론 주식을 4백30만주 매입, 엄청난 손실을 봤다. 엔론의 실적이 지나치게 신식이었고, 현실이기엔 너무 좋았다는 사실을 월스트리트는 간과한 것이다. 엔론의 운명에 최초로 빨간 신호등이 들어온 시기는 지난 3월 초. 당시 「포천」지는 엔론의 실제가치를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며, 주가가 고평가됐을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했다. 포천은 엔론이 분기실적을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추정(pro forma)처리하기 때문에 엔론의 능력은 ‘블랙박스(blackbox)‘라고 지적했다. 연중 최고 수준인 80달러를 웃돌던 엔론 주가는 3월 한 달 동안 20% 급락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했던 「포천」지도 엔론의 실적이 분식회계로 뻥튀기된 사실은 짐작하지 못했다. 정보력이 강한 월스트리트에서는 엔론의 부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지난 5월 월가 내 한 소형 투자자문회사는 엔론의 주가가 50% 이상 급락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냈다. 오프 월스트리트라는 이 회사는 엔론의 주가수익률(PER)이 대표적인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보다도 2배 이상 높다고 꼬집었다. 오프 월스트리트는 엔론의 수익 마진율이 악화되고 있으며, 세전 영업이익률은 1.59%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오프 월스트리트에 따르면 엔론의 세전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1분기 4.75%였으나, 같은 해 4분기에는 2.08%로 감소했다. 오프 월스트리트의 26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접한 월가의 주요 투자은행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엔론의 주가는 조금씩 하락하고 있었다. 엔론의 위기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지난 10월 발표된 3분기 실적 때문이었다. 엔론은 뚜렷한 이유 없이 4년 만에 첫 분기 손실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연 매출 증가율이 최대 3백%에 달했던 기업이 갑자기 적자를 본 이유를 투자자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지적해온 엔론의 위기 가능성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엔론의 실적 배경이 부실하다는 보고서가 잇따라 공개됐고, 투자자의 의혹은 커져갔다. 특히 엔론이 자사의 발전소 일부를 경쟁사에 매각한 사실이 매입회사의 공시를 통해 우회적으로 알려지는 등 엔론의 불투명성이 하나하나 표면 위로 드러났다. 이윽고 엔론의 주가가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10월 초 35달러를 넘어섰던 엔론의 주가는 한 달 만에 10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뉴욕증시가 ‘9·11테러’ 충격에서 벗어나 급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엔론의 운명은 다한 듯 보였다. 지난 11월9일 다이너지는 주식 스왑 방식으로 엔론을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다이너지는 인수안 발표와 함께 엔론에 15억 달러를 긴급 투입했다. 엔론은 마지막 회생기회를 잡은 듯 보였다. 그러나 몇 주 후 다이너지는 엔론의 인수안을 철회했다. 엔론이 숨겨 놓았던 추가 부실이 드러났고,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엔론의 투자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엔론의 주가는 다이너지의 인수계획 취소로 1달러 밑으로 추락하게 된다. 엔론은 ‘미국판 대우’라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추락하기 직전까지 화려한 찬사를 받아 왔고, 아무도 부실을 짐작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 과거 대우그룹을 연상시킨다. 특히 분식회계를 통한 실적조작 혐의는 대우와 빼닮았다. 숨겨 놓은 부실이 하나 둘 표면화되자 엔론은 지난 97년 이후 순익을 6억 달러나 부풀려 발표했고, 투자 실패에 따른 5억 달러의 부채를 숨겼다고 밝혔다. 엔론의 이 같은 실적 조작은 회계회사인 아더 앤더슨과의 공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더 앤더슨은 엔론의 회계장부를 부풀리기 위해 12억 달러의 투자손실을 없애줬다고 밝혔다. 아더 앤더슨은 회계장부 조작을 눈감아주고 대가를 받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현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엔론의 분식회계 여부와 대주주 및 경영진의 내부자 거래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 전면적인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회계장부 조작 등 엔론의 수법은 일개 기업이 해왔다기에는 너무 과감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엔론과 현 집권당인 공화당 간의 정치적 커넥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엔론의 회장인 케네스 레이는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재무부 장관 후보로도 자주 거론됐던 인물이다. 엔론의 본사는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고, 과거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를 역임했다. 실제로 정치적 커넥션이 있었는지는 현재 미 의회에서 진행 중인 청문회가 끝나봐야 알 수 있다. 하원 내 에너지상업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빌리 타우린 의원은 “매우 공격적인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며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사가 정치권에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엔론의 파산이 미국 산업 및 금융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충격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엔론의 장부상 부채 규모는 1백30억 달러로 채권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주 채권은행인 씨티그룹과 JP모간 등은 채무에 대해 일부나마 담보를 잡아 놓은 상태다. S&P의 타냐 아자크스 은행 분석가는 “엔론의 규모가 중간급 투자은행 수준이며 일부 금융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대마불사’론이 대두할 만큼 총체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기관에 노출된 부실은 상당한 규모지만 최소한 당초 발표를 기준으로 할 때 이것이 이들 기관의 생존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97년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 때와 같은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엔론의 파산 이후 급락했던 뉴욕증시가 상승세로 돌아서 다우존스지수와 나스닥지수가 각각 1만선·2천선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엔론의 충격이 크지 않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채권단은 엔론의 무담보 채무 규모에 대해 밝히길 꺼리고 있다. 이 때문에 엔론의 부실 규모는 현재까지 많은 추정과 억측만 낳고 있는 실정이다. 엔론의 추가 부실이 드러날 경우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은 있다. 지난 12월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엔론의 파산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크진 않겠지만 신생상품 시장인 신용 파생상품 시장에는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시장 규모가 미약했던 신용 파생상품 시장은 최근 1조 달러(골드만삭스 추정) 규모로 급성장했다. 엔론의 파산을 계기로 SEC는 회계장부 규정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늘어난 기업간 인수·합병(M&A) 및 신기술 등장으로 회계장부상 ‘추정’치를 허용하는 등 느슨한 조치를 취했던 SEC는 엔론의 파산을 계기로 관련 규정을 강화할 계획이다. 필요하다면 규정 개정도 고려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엔론은 일부 경쟁업체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아 놓은 상태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비용절감 차원에서 해고됐고, 발전소 등 자산들은 매각을 기다리고 있다. 한때 84달러를 넘어섰던 엔론의 주가는 현재 1달러 밑으로 떨어져 단기 모멘텀을 노린 데이 트레이더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엔론 주가의 하루 상하 변동률은 두자릿수에 달한다. 최첨단 고성장 기업으로 명성을 날리던 엔론의 현재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서울 뺑소니 연평균 800건, 강남 일대서 자주 발생한다

2가상세계 속 시간을 탐구하다

3고령화·저출산 지속되면 "2045년 정부부채, GDP 규모 추월"

4해외서 인기 폭발 'K라면'…수출 '월 1억달러' 첫 돌파

5한국의 ‘파나메라’ 어쩌다...“최대 880만원 깎아드립니다”

6치열한 스타트업 인재 영입 경쟁…한국도 대비해야

7G마켓 쇼핑축제 마감 임박..."로보락·에어팟 할인 구매하세요"

8"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9"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실시간 뉴스

1서울 뺑소니 연평균 800건, 강남 일대서 자주 발생한다

2가상세계 속 시간을 탐구하다

3고령화·저출산 지속되면 "2045년 정부부채, GDP 규모 추월"

4해외서 인기 폭발 'K라면'…수출 '월 1억달러' 첫 돌파

5한국의 ‘파나메라’ 어쩌다...“최대 880만원 깎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