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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소버린 쇼크’ 1년 무엇을 남겼나

[포커스]‘소버린 쇼크’ 1년 무엇을 남겼나

지난 1월30일 SK(주) 황두열 부회장이 기업설명회에서 지배구조개선안을 발표하고 있다.
"SK는 소버린 때문에 이제 두고두고 괴로울 겁니다.” SK그룹 한 고위 임원의 말이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SK그룹은 요즘 3월 중순에 있을 SK㈜의 주주총회를 앞두고 비상사태다. 물론 소버린 때문이다. SK그룹은 지주회사 격인 SK㈜의 지분 14.99%를 가지고 있는 소버린이 과연 어떤 맘을 먹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실 SK는 지난해 4월 정체불명의 증권사인 크레스트가 SK㈜의 주식 8.64%를 확보, 1대주주로 부상하면서부터 노심초사해 왔다. 지분 매집에 나선 지 불과 15일 만에 SK㈜의 지분 14.99%를 확보한 크레스트는 이후 SK그룹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됐다. SK로서는 ‘황당’ 과 ‘당황’ 그 자체였다. 매출 규모 50조원이 넘는 한국의 3대 재벌그룹이 불과 1천7백억원이라는 돈에, 그것도 정체불명의 유럽 중소형 펀드에게 그룹의 지배권을 내맡기게 된 상황까지 왔기 때문이다.

1천7백억으로 50조 그룹 장악 SK㈜는 SK텔레콤은 물론 SKC·SK해운·SK네트웍스 등 주요 계열사를 모두 지배하고 있다. 한마디로 소버린은 1천7백억원이라는 금액으로 SK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게 됐다. SK도 이에 맞서 그룹을 방어하기 위해 지난 1년간 SK㈜ 주식을 매집했다. 그 결과 주가가 올라 소버린이 보유한 지분의 평가이익만 6천억원에 이를 정도로 실익을 챙겼다. 일단 SK㈜ 3월 주총에서 SK 측이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26일 마감된 주주명부에 따르면 SK 측의 우호지분이 36.77%, 소버린 측의 우호지분이 20.73%다. 나머지는 외국인 지분과 소액주주지만 일단 이번에는 큰 변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3월 주총 이후다. 주총 이후에도 계속 외국인들이 연합해 경영권 분쟁을 시도할 경우 SK는 또다시 지분을 사들여야 한다. 문제는 지난해 3월 5천원대였던 주식이 지금은 4만4천원까지 올랐다는 것. 산술적으로는 한주당 9배의 돈이 들어간다. SK 사태를 보는 재계의 느낌은 남다르다. SK 임원도 말했듯 소버린의 경영권 분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천문학적인 돈이 경영권 방어에 들어가게 된다. 재계가 소버린 쇼크에 대해 지분율 확대로 대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해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현대자동차 주식 1백61만주(지분율 0.74%)를 매입했다. 이에 따라 정회장의 지분율은 4.82%로 높아졌다. LG전선그룹은 이미 지분상 계열분리 요건이 충족됐는데도 구자홍 전 LG전자 회장, 구자명 극동도시가스 사장 등 40여명의 특수관계인이 LG전선 주식 2백81만주(0.99%)를 추가로 사들여 보유지분을 28.11%로 늘렸다. 이외에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등이 지분을 늘렸다.

세계를 무대로 경영권 방어해야 그간 M&A의 무풍지대로 인식됐던 한국의 재벌그룹이 SK 사태를 겪으면서 상황을 달리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재계는 SK 사태를 계기로 지배구조를 보다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소버린이 강조한 지배구조 개선과는 반대로 반응하고 있는 셈. 때문에 일부에서는 “소버린 때문에 재벌의 지배구조가 더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M&A 컨설팅 업체인 프론티어 M&A의 황호승 대표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지배구조 문제를 제기한 곳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였다”고 전제한 뒤 “이들은 자본이 없기 때문에 기업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버린 등 해외펀드는 스스로 자금을 가지고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파고들기 때문에 상당히 위협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재벌도 사실상 세계를 상대로 경영권을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 그룹의 재무담당 임원은 “지난해 소버린 사태 이후 재무담당자는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세력이나 펀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로 떠올랐다”고 얘기할 정도다. 한 외국계 투자회사의 대표는 “해외의 중소형 펀드들 중 신흥시장의 법률문제나 지배구조 문제만 전문적으로 관찰하는 펀드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선진국 투자자의 관점에서 보면 법률적 문제와 지배구조만 개선하면 몇 배의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기업이 많다는 것이다. 재계도 이런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최근 법무팀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삼성·LG·SK·현대자동차 등 4대 그룹을 비롯해 국내의 주요 기업들은 최근 법무 관련 부서의 규모를 늘리거나 최고 책임자의 직급을 파격적으로 상향 조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LG는 지난해 연말 임원인사를 통해 김상헌 법무팀 상무를 부사장으로 전격 승진시키는 등 사실상 법률전문가 전진배치에 들어갔다. 삼성도 현재 40명에 달하는 법률팀의 전문인력을 추가 보강하는 방안을 점검 중이다. 현대·기아차와 SK 역시 법무팀을 강화하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 효과도 있어 소버린 사건을 계기로 주요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선진국형으로 개선되는 효과도 있다. 지난 1월30일 지배구조 개선안을 발표한 SK㈜는 물론이고 SKT·KT·포스코 등 많은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오너의 지배권을 위해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는 다른 기업들 역시 사실상 SK와 비슷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SK그룹의 한 임원도 “자의적이진 않지만 이미 SK그룹은 다시 과거 재벌 체제로 돌아가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곽수일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SK 외 다른 기업도 이번 사태를 보고 경각심을 많이 가졌을 것”이라면서 “특히 국내 자본뿐 아니라 해외펀드들도 기업경영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곽교수는 “이번 사태가 재벌들의 지배구조나 경영 형태 자체를 변화시킬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평가했다. 소버린의 목표가 지배구조 개선이 아니라 이윤 추구인 이상 언제든 적절한 이윤만 달성되면 지배구조 개선과 관계없이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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