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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계 스타 10인의 20년 전 모습

경제계 스타 10인의 20년 전 모습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85년 VCR 생산 1백만대 돌파 기념식 시절.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조운호 웅진식품 사장 89년 은행원 시절 운동회를 마친 뒤 부인(이순련·왼쪽)과 함께.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김정태 국민은행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84년 대학원생 시절.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사장. 84년 농활에 참가한 대학생 시절(오른쪽에서 두번째).
조정현 비트 컴퓨터 사장 85년 창업 초기의 조현정 사장(왼쪽).
이헌재 경제부총리. 87년 한국신용평가 사장 시절./박봉흠 청와대 정책실장


경제계 스타 10人의 20년 전… 컴퓨터 예비재벌, 의대생 등 다양한 경력 김정태 국민은행장·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헌재 경제부총리…. 오늘의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창간되던 지난 1984년 이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대학생부터 기업 임원까지 다양한 모습이었지만, “미래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겠다”는 포부는 한결같았다. 당시 이미 스타로 발돋움하기 위한 의욕적인 몸짓을 보여준 이도 있었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은 ‘컴퓨터 예비재벌’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정도다. 이들은 “20년 전 한국경제도 어려웠지만,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지금의 한국경제가 더 어려운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 21세기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 속 한국경제 위상 높이기 등의 과제가 코앞에 닥친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중견기업·금융·벤처기업·경제부처를 이끌고 있는 10인의 20년 전 모습을 살펴봤다. <편집자> -

“VCR 개발하다 탈모증 생겨”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故 이병철 회장 관심은 ‘엄청난 스트레스’
“말도 마세요. 원형탈모증까지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글로벌 CEO로 불리는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이지만 지난 1984년 그의 모습은 비디오·TV 사업 때문에 고생 고생하던 윤종용 상무였다. 84년에 막 불혹(만 40세)에 접어든 그는 그해를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VCR이었다. 삼성전자는 79년 세계 네번째로 VCR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관한 기초기술이 거의 없었다. 당시 VCR은 전자제품 중 최첨단 기술을 요구하는 사업으로 선진업체들도 기술을 전혀 공개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무진인 윤종용 상무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그는 일본으로 날아갔다. “원가 절감을 위해 일본 경쟁사의 담당자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 쉽게 얘기해 줍니까? 비위도 맞춰주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러면 하나씩 이야기가 나오죠.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 다 기억했다가 밤에 국제전화로 우리 회사 기술자들에게 알려주곤 했지요. 그 일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또 일본 가전업체인 JVC로부터 표준인증을 받기 위해 영하 10℃가 넘는 연구실에서 연구원들과 밤을 세우기도 했다. 연구원들이 연구하는데 나 몰라라 뒷짐지고 구경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사업은 고 이병철 회장님께서 워낙 관심을 많이 쏟았어요. 그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사업본부장 입장에서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지요.” 지금은 세계 전자시장의 방향을 주도하는 윤부회장이지만 그 역시 그런 고난의 과정을 밟고 오늘날의 ‘높은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 임직원의 이런 치열한 노력이 모여 80년대 중·후반부터 독자적인 기술로 컬러TV·CDP·전자레인지·모니터 등을 생산해 내며 기술 자립을 이뤘다”고 회고한다. 84년은 삼성전자 기흥반도체 공장이 완공돼 메모리 사업이 본격화된 때이기도 하다.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냉장고 만들며 창원공장 누벼”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입사 15년 만에 공장장 “샐러리맨 성공 신화”
“창원공장은 제 손바닥 보듯 훤합니다. 당시 창원 공장을 휘젓고 다녔으니까요.”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은 1984년 냉장고 공장장(부장)으로 창원에 있었다. 69년 엔지니어로 LG전자에 입사한 지 15년 만에 공장장이 됐다. 이미 그때부터 김부회장은 창원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통했다. 대졸 신입사원이지만 그는 사무실이 아니라 공장을 택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디에 어떤 라인이 있고, 어디에 무슨 창고가 있는지 훤하다고 할 정도다. 당시 공장장의 가장 큰 임무는 생산직관리와 품질관리. 공장은 어떤 이유에서든 가동이 중단되면 손실이 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이미 현장 직원들과 격의없이 대화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당시 김부회장은 생산직관리와 공장관리에 탁월했죠. 직설적이고 화통한 성격이 때로는 직원들에게 부담도 되지만 그런 화법이 생산직 사원들에게는 잘 통하는 편이었니까요.” LG전자에 근무했던 한 인사가 전한 당시 김부회장에 대한 평가였다. 그의 회사 생활은 80년대 후반 극심한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87·89년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노사분규는 매출 손실 6천억원, 파업 손실 일수 50일로 회사를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당시 김부회장을 비롯한 공장의 간부들이 매일 아침 20∼30명씩 일렬로 줄지어 서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불신을 메워갔다. 이후 김부회장은 리빙시스템 사업본부장, 디지털어플라이언스 본부장을 맡으며 LG전자의 가전 부문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바꿔놓았다. 지난해 구본무 그룹 회장은 전자 임원 간담회에서 “여기 김부회장은 여러분의 미래 모습”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샐러리맨의 또다른 성공신화로 자리잡았다.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낮엔 은행원, 밤엔 대학생”
조운호 웅진식품 사장… “한국형 곡물음료로 코카콜라 누른다”
“당시엔 매일 코피를 쏟으면서 출근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별명이 ‘철인’ ‘오뚝이’라고 불릴 만큼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아침마다 코피가 쏟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그때는 제가 투잡스(two-jobs) 족이었거든요.” 조운호(당시 23세) 웅진식품 사장은 20여년 전 직업이 두 개였다. 편모 슬하에 3남1녀의 장남이라 조사장은 일찍부터 직업을 가져야 했다. 1981년 부산상고를 졸업하면서 그는 제일은행에 합격해 동래지점에 배치받았다. 그러나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일은행 취업과 함께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야간학부 회계학과에도 합격해 ‘이중생활’을 했던 것. “4시 30분에 은행 문을 내린다고 해서 그때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감을 하려면 9시가 되기고 하고, 10시가 되기도 합니다. 수업시간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업무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정해진 근무시간에 업무효율을 1백20% 끌어올린다’ ‘단 1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근무원칙이 생겼다는 것. 조사장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정시출근·정시퇴근을 지키고 있다. 직장 생활도 활발해 맡은 일 처리는 물론 과외활동으로도 바빴다. ‘어름새’라는 풍물패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울산지점에 근무할 때는 「새벽」이라는 문예지를 만들기도 했다. 복무기간 동안 「스물네번째 겨울」이라는 개인 수상록을 만들기도 했다. 조사장의 ‘그릇 크기’를 알아본 웅진그룹이 지난 90년 그를 스카우트했고, 99년에는 30대(38세) CEO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곡물음료 ‘아침햇살’ ‘초록매실’을 연속 히트시키면서 웅진식품을 2천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지금은 “코카콜라보다 더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각오를 품고 있다. 이상재 기자·sangjai@joongang.co.kr

“부끄러움 타면서 옷가게 시작”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 지식경영으로 제2의 전성기 열어
1984년 박성수(52) 이랜드 회장은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당시 ‘옷가게 주인’ 박성수는 이제 막 사업 프랜차이즈로 전환된 ‘잉글랜드’와 ‘브렌따노’ 사업에 여념이 없었다. 법인도 아닌 그런 옷가게 주인이 지금처럼 1조원이 넘는 이랜드 그룹의 회장이 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지금처럼 대성공할지 몰랐다. 스스로 “당시만 해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옷장사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할 정도. 하지만 84년은 옷가게 주인 박성수에겐 잊지 못할 한 해였다. 80년에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에서 잉글랜드라는 가게로 처음 옷장사를 시작했고, 그해 11월부터 잉글랜드와 브렌따노 옷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경제발전과 함께 소비자들이 패션에 눈을 뜰 것으로 내다본 포석이었다. 이후 그는 85년 ‘언더우드’, 88년 ‘헌트’를 연속적으로 히트시키면서 한국 중저가 캐주얼 시장의 새 장을 열었다. 박회장은 자신이 쓴 책에서 “지난 20년간 양심에 가책을 느낀 것 중 하나가 직원들에게 화를 잘 내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지금의 이랜드를 만든 원동력인 것도 사실이다.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예나 지금이나 ‘구조조정 명수’
김정태 국민은행장… 맺고 끊는 게 분명한 30대 엘리트 임원
김정태 현 국민은행장의 20년 전 모습은 부지런히 뛰고 있는 30대 증권사 상무(당시 37세, 한신증권 상무)였다. 동원산업이 5개 은행이 공동 출자한 한신증권(현 동원증권)을 1982년 입찰로 인수하면서 김정태는 한신증권과 인연을 맺었다. 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주의 비서실장을 하면서 4년 만에 대신증권 임원으로 승진했던 그는 김재철 동원산업 회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82년에 동원맨으로 변신했던 것. 30대의 김정태 상무는 84년 당시 한신증권에서 기획업무를 총괄했다. 한신은 당시만 해도 10여개 지점만 갖고 있던 소형사에 불과했다. 당시 한신증권에는 요즘 말로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닥쳤다. 은행들이 공동 출자해 운영하던 무주공산식 증권사라서 새 주인(동원)이 등장함과 동시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가피했던 것. 이때 김정태 상무는 한신증권의 체질개선에 박차를 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신증권 사장이던 이정우 마이에셋자산운용 고문은 “당시 김정태 상무는 아이디어가 많고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엘리트였다”고 회고한다. 김정태 상무는 당시 한신증권의 주식·채권관리, 영업점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게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김정태 상무는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탓에 지금과 같은 카리스마를 드러내진 않았다고 한다.

증권연구소 차린 대학원생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20년 만에 금융그룹 일궈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20년 전인 1984년에는 26살짜리 고려대 대학원생이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주식에 관심을 갖고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던 그는 84년 사설 투자자문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했다. 주식 투자 종자돈은 학비와 생활비였다. 이 돈을 투자해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건물에 20평 남짓한 연구소를 차렸다. 당시 증시는 작전이 횡행했다. 분석보다는 소문에 따라 투자를 하던 시절 박소장은 ‘시장 분석’을 통해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당시 그가 주목했던 대목은 84년부터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소위 ‘3저’ 기조와 자본 자유화 등이었다. 국내 증시가 곧 활황세를 보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한국 증권시장의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2년 뒤인 86년에는 동양증권에 입사해 본격적인 증권 인생을 시작한다. 사설 투자연구소를 설립한 지 20년 만에 그는 증권사·투신사·자산운용사를 거느린 미래에셋 그룹의 회장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상건 기자·sglee@joongang.co.kr

“그땐 ‘진짜 바이러스’ 잡았죠”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사장…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 선택”
“그때만 해도 제가 이 길을 걷게 될 줄은 몰랐죠.”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은 1984년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안사장은 22세의 서울의대 본과 3학년생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가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많이 배우고 혜택받은 사람으로서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 고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고민 끝에 안사장은 주말마다 구로동 봉사진료를 다녔고, 방학 때는 무의촌 봉사진료로 경북 산골을 헤맸다. 84년 당시 의대생 안철수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아니라 진짜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전국을 누빈 셈이다. 의대 전공 공부 때문에 컴퓨터를 공부했던 의사 안철수는 88년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인 ‘브레인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V3백신’을 개발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업을 목표로 두거나 컴퓨터 쪽으로 진로를 돌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개발 뒤 7년간 V3백신을 무료로 사용하게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졸업하면서 고민도 했죠. 한사람 한사람의 환자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당시 컴퓨터 백신 일은 제가 그만두면 아무도 이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의사의 길을 버리고 컴퓨터 백신 쪽으로 마음을 잡았죠.”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컴퓨터 예비 재벌’ 대학생 사장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 호텔 스위트룸을 사무실로 사용
“20년 전이요? 하하하. 생각해 봅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의 입에서는 ‘구석기 시대’ 정도로 ‘추정’되는 용어들이 흘러나왔다. 플로피 디스크에서 자판이 없어 한글전동타자기를 연결해 쓰던 일까지…. 마치 ‘IT의 원시시대’를 듣는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벤처업계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20년 전 84년의 조현정은 27세의 새파란 젊은이였다. 직함은 사장이었지만 신분은 전해인 83년 창업한 ‘대학생 사장’(인하대 전자공학과 78학번으로 당시 3학년)이었다. 지금이야 고등학생도 벤처기업을 만드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 창업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컴퓨터’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자본금은 틈틈이 모아뒀던 4백50만원. 직원은 동생과 여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상품도 차별화시켰죠. 동네 의원들이 일일이 수작업을 하던 의료보험 청구서를 전산화한 프로그램이 첫 제품이었습니다.” 다행히 사업은 순조로웠다. 당시 그를 취재했던 한 잡지는 창업 첫해에 5천만원, 다음해인 84년에 2억7천여만원의 매출을 올린 비트컴퓨터를 두고 ‘어떻게 이런 매출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하는 의문부호를 붙였다. 이후 비트컴퓨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사장은 “3년 주기로 사무실을 두 배씩 늘려야 했을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서광원 기자·araseo@joongang.co.kr

‘반도체맨’으로 뛰었던 야인시절
이헌재 경제부총리… 탁월한 기획력 돋보여
‘한국경제의 소방수’로 불리는 이헌재 부총리의 1984년 모습은 ‘반도체맨’이었다. 막 불혹(만 40세)에 접어든 당시 그의 직함은 대우반도체 대표이사 전무였다. 79년 율산 사태로 구설수에 오르면서 공직(재무부)을 그만둔 35세의 이헌재는 미국 보스턴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 후 평소 그를 총애하던 김용환 전 재무부장관의 추천으로 경기고 선배이기도 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만났다. 82년의 일이다. 대우그룹 임원 출신의 한 인사는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던 이헌재씨를 추천받은 김회장이 같이 일할 것을 권유해 이씨가 대우그룹에 입사했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그룹들은 앞다퉈 반도체 분야에 뛰어들었다. 이헌재 상무는 이 신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당시 김회장은 그를 상당히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시절 ‘차관급 과장’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기획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김회장은 신규 사업인 반도체 사업을 그에게 맡겨 대우 반도체사업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대우가 반도체 진출 계획을 접은 탓이다. 대우가 반도체 사업을 접자, 85년 이헌재는 대우와 결별하고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이헌재가 김우중 회장에게 섭섭함을 느꼈다는 얘기가 항간에 돌기도 했다. 김회장이 계속 그를 총애했다면, 당시 이헌재 전무가 자리를 옮기는 것을 만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이헌재 부총리는 대우 시절 얘기를 지인들 앞에서도 거의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건 기자·sglee@joongang.co.kr

빈틈없는 완벽주의자 사무관
박봉흠 청와대 정책실장… 참여정부 들어 중용돼
“당시 우리 학교(밀양초등학교)는 성적순으로 급장·부급장을 했습니다. 봉흠이는 급장을 놓치지 않았지요.” 소설가 이문열(56)씨는 박봉흠(56) 청와대 정책실장을 ‘모범생 중의 모범생’으로 기억한다. “한마디로 빈틈이 없었어요. 공부도 잘했지만 합기도 2단의 유단자일 정도로 몸도 단단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그 흔한 방황 한번 없었다니까요.” 박실장이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은 지난 1973년. 20년 전의 박봉흠(당시 36세) 실장은 경제기획원 물가국 사무관이었다. 물가국은 소비자물가는 물론 원유·원자재·공공요금 대책을 총괄하는 부서. 박실장은 주로 물가와 예산 분야에서 근무했다. 그의 행시 동기생인 S씨는 박실장에 대해 “좌우간 샤프하고 같은 13기지만 뭔가 달랐다”고 회고한다. “당시는 일에 중독돼 있던 시절입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14시간 일하고, 토요일 6시 퇴근은 기본이었지요. 일요일도 출근하지 않으면 이상한 분위기였으니까요. 박사무관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데 탁월했습니다. 막걸리도 곧잘 마셨지요.” 이후 박실장은 물가총괄과장(91년)·경제개발예산심의관(96년)·예산총괄국장(98년)을 거쳤다. 노무현 대통령이 “내가 본 가장 유능한 두 명의 관료 중 한 명”이라고 꼽을 만큼 업무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기획예산처 장관·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중용됐다. 이상재 기자·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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