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 인생’은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다. 그를 거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가끔은 주저할 때가 있지만 그의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이 시대의 놀라운 장인이라는 점에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영화의 주인공이 조승우가 연기하는 깡패 ‘태웅’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격변의 한국 현대사이며, 태웅과 그의 아내는 4·19, 5·16과 같은 굵직한 역사의 중심에 선다. 밥을 먹다가, 해결사 노릇을 하러 길을 가다가, 아이를 낳으러 가다가 그들은 역사의 현장에 발이 묶인다. 그들의 삶은 역사적 시간 사이의 ‘행간’에서 펼쳐진다. 시작은 자유당 정권 말기. 거리는 시위대의 행렬로 넘쳐나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쌈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태웅은 무관심하다. 그가 씩씩거리며 찾아간 곳은 홍익고. 친구를 두들겨 팬 놈을 찾아내겠다는 생각으로 다른 고등학교 교실에 뛰어들어 목적을 달성하지만 분노한 승문에게 칼을 맞는다. 칼이 꽂힌 몸으로 피를 흘리며 승문의 집으로 찾아간 태웅은 이를 계기로 정치가 박일원과 관계를 맺고, 승문의 누나 혜옥(김민선)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 후 태웅은 순탄하지 않은 깡패의 삶을 산다. 4·19와 5·16을 깡패로서 겪은 그는 영화 제작도 해보지만 실패하고, 선배의 도움으로 시작한 군납업을 하면서 실력자로 커간다.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을 거듭하지만 세력이 뒤바뀌고 나면 또 다시 물밑작업을 해야 하는 도돌이표 인생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는 역사의 풍경, 즉 역사 고증이라고 할 수 있다. 260여개에 달하는 벽보나 간판을 통해 시대의 모습을 잡아내는 장면들은 확실히 장인의 손길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일일이 손으로 서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등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태웅이라는 인물은 역사의 풍경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태웅의 삶은 권력의 반대편, 권력이 교체되는 행간 사이에서 기생하는 또 다른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의 급변하는 정치 권력과 태웅의 깡패 인생은 상통한다. 태웅의 아내이자 교사인 혜옥은 한때 학생운동을 했던 동생의 말을 빌어 태웅의 삶을 대변해 준다. 정치 권력과 조폭의 권력은 힘의 행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조폭은 힘을 표면적으로 과시하고 드러내는 데 반해 권력은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정치 권력은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의 잇속만 챙긴다. 그런 점에서 조폭의 삶이 훨씬 더 솔직하다. 이것은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99번째 영화 ‘하류 인생’에서 태웅이라는 인물을 내세우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의 인생은 권력에 기생하는 너저분한 인생이지만 급변하는 현대사의 정치 권력보다는 오히려 소박하고 순진하다. 그가 점점 타락해 갈 때 혜옥은 넌지시 말을 건넨다. “당신의 순진하던 모습이 변해 버렸어.” 하지만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순진함이 과연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무지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노는 계집 창’과 같이 역사 속에 담겨 있는 한 개인을 그려낼 때 임권택 감독의 시야는 좁아 보인다. 수많은 역사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판단은 미뤄둔 채 시대의 흐름 속에 떠돌아야 하는 하류인생들이 있다고 전시하고 말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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