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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교 KOTRA 사장···“고객이 원하는 사업 외엔 다 정리”

오영교 KOTRA 사장···“고객이 원하는 사업 외엔 다 정리”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 3년 전인 지난 2001년 오영교(56)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사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의 머리에 꽉 들어찬 고민은 단 한가지, 코트라라는 공기업을 어떻게 개혁시킬까였다. 부임하기 전 산업자원부에서 뼈가 굵었고 차관까지 지낸 그는 사실 산하기관이기도 한 코트라가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아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임하기 전 민의(民意)을 들을까 하고 여기저기 ‘정보’를 수소문하던 그는 의외의 ‘정보’를 접했다. ‘요즘 뭐 하는 일이 있나요?’ ‘옛날에야 코트라가 필요했지…’. 코트라 무용론이었다. 사장으로 부임해야 할 곳이 있으나마나 한 조직이라니 암담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없어질 곳이 1등이라니…” 침몰해 가는 배의 선장이 된 그는 부임하던 날(4월7일)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코트라 운영은 성과주의에 기반할 것이며 인사청탁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결의에 차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의에 찬 건 그뿐이었고 그는 따르는 군사가 없는 장군이었다. 그의 트레이드인 추진력이 이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혁신작업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갔다. 그렇게 3년-. 지난 1일 서울 염곡동에 있는 코트라 사장실을 찾았을 때 그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볕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난 5월25일 3년 임기의 사장으로 재임명됐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하신 분들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의 말도 있어 대대적인 물갈이가 예상됐던 만큼 오사장의 연임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참여정부에서 공기업 사장으로 첫 연임이기도 한데다 참여정부의 눈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임한 기분이 어떤가 하고 묻자 그는 또다시 환하게 웃으며 “진짜 좋은 것은 (이 자리에) 더 있을 수 있게 된 것보다 공기업 혁신을 이룬 것에 대해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코트라의 변화와 혁신에 관한 질문이 주어지면 준비한 듯 곧바로 “첫째는, 둘째는”식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그는 어떻게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천하무적’ 공기업을 보기 좋게 변화와 혁신의 한복판으로 끌어냈을까?

밖으로부터의 평가는 연임으로 나타났듯 긍정적인데 본인의 평가가 궁금합니다. “우선 코트라 무용론이 만연한 상황에서 추락해 가고 있던 회사를 반드시 있어야 하는 회사로 바꾸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부임 당시 상당한 고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 밖에서 보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어요. 코트라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세계 일류의 무역·투자 전문기관’으로 정하고 곧바로 조직혁신에 들어갔죠. 가장 먼저 한 것은 비대한 본부 덩치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36개팀으로 돼 있던 체제를 18개팀으로 통합·축소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여유인력 96명은 모두 해외로 보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로 고민하던 그는 부임 두 달 뒤인 7월1일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시작했다. 우선 본사에 집중된 권한을 현장조직으로 분산했다. 코트라의 강점이 해외 네트워크에 있다고 판단했던 것. 하지만 모두가 바빴다. 바쁜데 슬림화라니…. 저항의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직무분석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사업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과감한 사업정리를 단행했다. ‘왜 바쁜가’에 대한 분석도 함께 해 잡무도 없앴다. 슬림화로 여분이 된 인력은 모두 해외와 지방으로 전진배치했고 권한도 대폭 이양했다. “최고경영자가 모든 것을 다 알고 판단할 수 없잖습니까. 한국에서는 중동 하면 석유만 생각하는데 현지에 가보면 가전·자동차 시장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이런 건 현지조직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책임과 권한을 위임해야 합니다. 스스로 변할 수 있어야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지시에 익숙한 현장조직들이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 것. ‘예산이 모자라다’고 투덜거리던 조직에 예산을 주자 제대로 쓰지를 못했고, ‘본사의 통제와 간섭이 너무 심해 일을 할 수가 없다’던 현지 조직들이 ‘스스로 여건 분석-사업 개발-책임 완수를 하라’고 하자 ‘왜 본사에서 하던 일을 우리에게 떠넘기느냐’는 불만을 쏟아냈다. 오사장은 근무시간의 60%를 해외 현장에서 보내면서 혁신 과정에서 오는 이런 갭을 메웠다.

편안한 조직을 살벌하게 만드셨군요.(웃음) 일반적으로 이런 혁신과정에는 상당히 강력한 저항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잘 하고 있는데 …’ ‘이 겨울만 견디고 보자’ ‘누구를 위한 개혁이냐’ 등 다양하게 나타나더군요. 정면 돌파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이렇게 가면 우리 모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며 위기의식을 공유했는데 다행히 똑똑한 사람들인지라 수용이 빨랐어요.”

그래도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2002년이었는데 노조에서 ‘숨막히게 혹사당하고 있다’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정부의 공기업 평가가 좋게 나와 예산도 많이 주고 직원들 인센티브도 올라가 잘 무마가 됐죠. 이게 혁신에 꼭 필요한 작은 성공입니다. 당시 공기업 경영평가를 주관했던 기획예산처의 한 간부가 그러더군요. ‘공기업 중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1등(사장 경영계약 이행실적평가)을 하다니 놀랍다’고요. 사실 말이 나왔으니 그 전까지만 해도 해외에서 코트라 직원을 어떻게 불렀는지 아십니까? ‘거지’라고 불렀답니다. 몸으로만 때운다고 말이죠. 어쨌든 평가가 좋게 나와 근무환경이 좋아지자 ‘혁신이 나를 위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아져 저항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조직개편과 함께 추진한 인사제도 혁신에서도 저항은 거세지 않았습니까? “대단했죠. 인사청탁을 배제한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해외까지 전화가 오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로서도 거부하기 힘든 청탁이 들어오는데 직감적으로 ‘위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거 안 들어줘 생기는 불이익이라고 해봐야 이 자리 그만두는 것밖에 더 있겠나’라고 말이죠. 직원들에게도 ‘차관까지 지냈는데 그만두면 그만’이라는 메일도 띄웠죠.” ‘청탁을 하면 명단을 공개하고 무조건 배제하겠습니다.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내용의 메일이 날아가자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앞다퉈 사과 메일을 보내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떤 경우에는 인사청탁이 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자진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장기로 보면 외통수가 먹힌 셈이었다. 그는 특히 인사혁신에 힘을 주었다. “부임해서 지금까지 인사청탁을 단 한 건도 받지 않았다”는 그는 “정말이냐”는 질문에 “예전에는 (인사청탁이) 가장 많은 곳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지사가 많아 ‘높은 분’을 접촉할 기회가 많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인사혁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일한 만큼 보상한다는 원칙이 전체 혁신의 근간이었습니다. 참여를 이끌어내는 지름길이죠.” 하지만 단순히 ‘망치질’로 혁신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향점이 있어야 했다. 그때 그가 발견한 것이 ‘고객’이었다. 흔하디 흔한 게 고객이라는 말이었지만 코트라에는 고객이 없었다. ‘적당히’ 예산 따내고 ‘적당히’ 승진해 ‘적당히’ 일하면 그만이었다. 고객이 있는 곳에 코트라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는 고객을 향해 일과 조직을 다시 배열시켰다. “코트라의 주기능은 수출촉진과 투자유치인데, 사실 수출 촉진이라고 해봐야 국내기업과 외국기업을 만나게 해주면 그만이었어요. 어떤 결과가 생기든 관심 밖이었고 많이 만나게 해주는 게 일 잘하는 것이었죠. 좀 과하게 말하자면 남녀의 만남을 주선한다면서 할머니와 총각을 맞선 보게 하는 것과 같았다고 할까요. 이러니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있나요? 친절하다고 만족하는 게 아니잖아요. 바람직한 결혼으로 이어져야 만족하는 거죠.” 오사장이 말하는 코트라의 고객만족경영은 2002년 6월 도입한 CRM(고객관계관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스템은 고객이 코트라 서비스에 접속하는 순간부터 결과가 도출될 때까지(수출이라면 수출이 이뤄질 때까지) 전 과정이 자동처리되고 이 과정이 실적평가에 실시간으로 반영돼 모든 사람들이 어느 부서가 몇등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곳에 들어가면 전 세계 지사의 성적이 1등부터 매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일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시스템이다. 덕분에 코트라는 ‘비효율의 공룡’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99년 11개 공기업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11위(52점)로 꼴찌였고, 2000년에도 10개 기관 중 9위(56점)에 머물렀던 코트라는 오사장의 혁신 드라이브를 지렛대 삼아 2001년 3위(70점), 2003년 2위(80점)로 뛰어올랐다. 기획예산처가 주관하는 공기업 대상 경영평가는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2001년 기관평가 2위, 사장경영계약 이행실적평가 1위가 그것이다. 2002년에는 두 부문 2위였고 2003년 평가는 현재 평가 중이다. 코트라에 대한 호평은 외국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 62년 설립시 벤치마킹 모델이었던 일본무역진흥공사(JETRO)는 2년 전부터 거꾸로 코트라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지난해 호주에서는 네번에 걸쳐 벤치마킹을 해갔다. “혁신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경험이나 스킬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실패 원인은 성과나 시간에 대한 압박감입니다. 차근차근 해야 하는데 혁신 기간을 줄이려는 조급증이 실패를 불러오죠.” 오사장은 “지금까지 하드웨어를 바꿨다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꿀 것”이라며 “수출도 보이는 물건뿐만 아니라 지식 같은 보이지 않는 상품도 생각해야 한다”고 계획을 밝혔다. 90년대 쓰러져가던 IBM을 살린 루이스 거스너 전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코끼리도 춤을 출 수 있다”며 “모든 조직은 한 사람의 확장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그는 또 “IBM이 새로운 시장지향모델을 수용하게 만드는 데 5년 이상 걸렸다. 단 하루도 안심할 수 있는 날이 없었다. 그것은 굉장한 싸움이었다”고 변화의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이번 연임은 1라운드의 연장선상에 있는 2라운드가 아니다. 본 게임이다. 혁신은 실현하기도 어렵지만 틈만 나면 과거로 회귀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영교 사장 약력> 1948년 충남 보령 生.
보문고·고려대 경영학과 卒
72년 제12회 행시 합격
73년 국세청 사무관
94년 상공자원부 중소기업국장
97년 통상산업부 산업정책국장
99년 산업자원부 차관
2001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사장
2004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장(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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