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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디자인 산업편향 심해요
돈벌이 좋지만 의식도 갖춰야"

"우리 디자인 산업편향 심해요
돈벌이 좋지만 의식도 갖춰야"

“이제는 디자인 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상품의 질이나 가격경쟁 못지않게 상품을 표현하고, 알리고, 전달하는 디자인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디자인은 예술과 경제 양쪽에 걸쳐 있다. 디자인은 이제 우리 생활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그리고 건물들의 장식이나 배치 그 어느 것 하나 디자인이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디자인은 우리의 미의식과 직결된 우리 문화의 얼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화로서 디자인을 알아보기 위해 안상수 홍익대 교수를 찾았다. 그는 20년 전 ‘안상수체’라는 독특한 한글서체를 만들어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시도로 디자인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고 있다.

문화의 첨병인 디자인 분야에서 남보다 앞서간다고 하는 안상수 교수가 막상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띄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전에 갖고 다녔는데 잃어 버렸습니다. 그 후로 다시 장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대전화를 들고다니면 나 자신이 옥죄어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편리함 이면에 놓인 구속감과 같은 것이 예술가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인 듯싶다. 그의 말처럼 그는 첫눈에도 예술가처럼 보였다.

안상수 교수는 1952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시각디자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95년 한양대에서 타이포그래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간 <멋> 과 <마당> 의 아트디렉터를 거쳐 (주)안그래픽스 대표를 지냈으며, 85년에는 한글 글자체 ‘안상수체’를 만들어 디자인계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낸 서울 정도 600년 로고와 공식 포스터, 광복 50주년 공식 휘장, 고양 세계 꽃박람회 휘장 등 수많은 평면 입체 디자인 작품들을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 2000년에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유엔총회라고 불리는 이코그라다(ICOGRADA) 서울 총회를 유치해 집행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2001년에는 세계 90여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모은 타이포잔치 조직위원장을 맡아 전시를 치러내기도 했다.

또한 디자이너로서는 흔치 않게 개인전·그룹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속적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2002년에는 순수미술 작가들만을 엄선해 전시하는 로댕갤러리에서 <안상수·한·글·상·상·전> 이란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고정관념을 넘어선 다양한 한글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쌈지스페이스에서는 2004년 9월 30일부터 지금까지 <한글다다> 라는 역시 범상치 않은 제목으로 전시를 기획, 예술에 관한 고정관념을 또 한 번 허물고 있다.

디자이너들이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그런데도 그는 1995년부터 꾸준히 전시회를 해오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해서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시들이 꽤 많이 있지만, 매스컴에서 잘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포스터 전시라는 형태로 많이 하지요. 지난해 분당에서 시작해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세계 포스터 비엔날레라는 대표적인 큰 전시 행사도 있습니다.”

그래도 화가나 조각가들에 비해서는 적지 않을까. 화가나 조각가들은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려야만 한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경우 그들 작품이 생활과 산업현장에서 바로 연결되고 소화되는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해서가 아니겠느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순수 작가라는데 비즈니스 감각 뛰어난 사람 많아”

“그렇게 비교를 한다면, 디자이너들이 전시회를 자주 한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일생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비즈니스적 측면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순수미술 작가 가운데에서 비즈니스적 감각이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고, 실제 주변에서 많이 보기도 하고요. 다시 말해서 전후좌우를 살피고 고객관리나 인기관리가 뛰어난 사람들이 순수미술 작가들 가운데 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유명한 디자이너들 가운데에는 전면에는 디자이너라고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 작가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그 작가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나 작품 경향의 흐름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 생각과 독창적인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고집이 있기에 85년 ‘안상수체’라는 독특한 글자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됐다. 당시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데, 그 동기와 그 안에 담긴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글에 대한 원리적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자음·모음 받침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글자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 각각이 독립성을 가지면서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에서 ‘ㄱ’과 ‘그’에서의 ‘ㄱ’의 모양이 같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어느 글자 속에서 사용되든 ‘ㄱ’은 그 자체의 독립적인 모양과 위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나타내려다 보니 글자가 이상하거나 불균형하게 보여졌고, 처음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그의 이런 작업이 네모 틀에 한글을 정돈해 놓은 방식에서 탈피함으로써 문자 환경의 다양화와 한글의 시각적 조형성에 대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자가 단지 뜻을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 디자인의 비주얼적인 측면들도 갖추게 되었다. 또 그런 점들이 주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네모 틀로부터의 탈피’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렇다.

“네모 틀이라는 것은 사실 한자의 영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님께서도 ‘네모의 감옥’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그 당시 세종대왕께서 우리 고유의 한글을 만드신 것은 독창적인 생각이 담긴 글자체를 만드신 것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셨을 당시의 독창적인 생각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그렇다면 모양도 같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안상수체’를 발표하면서는 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불편해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묘한 기쁨과 확신 같은 것을 가졌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새로운 미감과 디자인에서의 새로운 시도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네모 틀의 탈피란 곧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장벽이 무너지자 많은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그는 ‘이상체’·'미르체’·‘마노체’ 등의 글자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 한글로 디자인한 대문, 넥타이와 셔츠의 한글 디자인, 글자로 만든 초상화 등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는 디자인에 있어서 파격적 새로움을 실천해 디자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디자인의 근본은 한글”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저는 우리 역사에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작품은 한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모양 자체가 무척 도발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셨을 당시 중국 문화가 우리에게 미친 위압감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미국 문화의 영향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위압감을 뚫고 만든 한글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독립성과 독창성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안에 이론적·철학적인 독창성도 담겨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글은 독창성이 뛰어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우리 디자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시 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이 중요하다는 말인 듯싶다. 그런 점에서 그는 11권으로 된 한국전통문양집도 출판했다. 그것도 같은 맥락인지 물었다.

“그런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분야가 너무 많고 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들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저는 시각적 기준에서 그리고 소재별로 구분을 했었는데, 특히 도깨비에 애착이 갔습니다. 그래서 도깨비 문양에 대해 그 의미와 형태들을 실은 책을 독일어로 써서 이번 프랑크푸르트 책 전시회에 내놓았습니다.”



서구지향적 디자인에서 벗어나야

디자인이 우리 생활 속에 직접적으로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사람의 문화실천가로서 생각하는 디자인의 문화적 사명감 같은 것은 어떤 것일까로 질문을 돌려 보았다.

“글쎄요.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공공성이라는 말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디자인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산업적으로 디자인이 많은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공공성 부분은 많이 낙후되어 있습니다(많은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게 하고, 미의식을 고양한다는 점에서의 공공적 기능을 말하는 것 같다).

돈·자동차 번호판 ·교과서·서울의 건축도 하나의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고요. 너무 많은 부분들이 그런 디자인의 공공적 기능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너무 개인적인 것에만 치우쳐 있어서 지금 곳곳에서 이런 점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상업적인 디자인만으로는 허망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의식이 있어야만 하고, 사회 참여라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있고, 문화로서 인식되는 디자인에 대한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결국 우리 디자인계의 앞날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입니다만, 이제까지 디자인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이바지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환경·생명·생태·평화와 같이 보다 크고 더 중요한 문제들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동안 디자인이 산업 쪽으로만 기울었다면, 이제는 문화에 신경을 더 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 한국적 디자인으로만 그치지 않고 아시아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의 디자인이 서구지향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아시아적인 것, 동양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생각이 담긴 디자인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주변에 걸린 간판들, 건물 틈새의 공간들 그리고 곳곳의 포스터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거리의 디자인들이야말로 우리 주변을 메우고 있는 문화라는 이름의 공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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