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함께한 용감한 법황의 선종
대중과 함께한 용감한 법황의 선종
Beloved and Brave
희미한 기도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드넓은 성 베드로 광장의 침묵 속에서 부모들은 자녀의 귀에 속삭였다. 커플들은 서로를 위안했다. 많은 남녀들은 교황이 누운 채 서거해 가는 불켜진 창문을 바라보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4월 2일 밤(이하 바티칸 현지 시간) 마침내 교황의 선종(善終) 소식이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전해졌다.
검은색 성복을 착용한 한 무리의 고위 성직자들이 마치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를 바라는듯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단 한쪽 끝에 모였다. 바티칸 국무차관직을 맡고 있는 레오나르도 산드리 대주교가 “여러분들께 매우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됐습니다. 교황께서 성부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고 말했다. 울음 소리는 아무 데서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들 사이로 슬픔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리곤 그 성직자들이 로사리오 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곧 선종을 알리는 한 개의 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3월 31일 84세의 교황이 고열과 패혈증 쇼크로 혈압이 크게 떨어지면서 전세계인들은 거의 48시간 동안 철야 기도를 했다. 3월 31일 새벽이 되기 전 교황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미사를 집전했다. 한 측근은 그리스도의 유죄 선고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일, 그리고 매장에 이르는 십자가 행로의 14처를 암송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몇 년 전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이 오면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 없이 경건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해주소서. 왜냐하면 당신을 만나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주님을 추구해오던 우리가 지상에서 알아왔던 모든 진정한 선을 마침내 다시 한 번 더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희망을 가진 채 우리를 먼저 떠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4월 2일 오후 9시 37분 교황은 의사·교황청 직원·친구 등 약 12명에게 둘러싸인 채 영면을 맞았다.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대부분의 다른 교황들보다 재위 기간이 길다. 그는 26년 이상 교황으로 재직해왔다. 거의 10년 간을 파킨슨병으로 서서히 고통받아 오면서도 이를 인내하며 교황직을 지켰다. 휴가철이면 스키와 산악 하이킹을 즐길 정도로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고, 배우 출신으로 세계를 자신의 무대로 만들었다. 지칠 줄 모르고 전세계를 순방할 때면 아무리 작은 나라에 도착해도 허리를 굽혀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토록 많은 나라를 방문한 교황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 교황이 우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이가 들고 쇠약해져갔다. 그래서 우리는 교황이 걷는 능력을 상실하거나, 발음이 분명치 않거나, 교회 행사 도중 머리가 숙여지거나, 입술에서 침이 떨어지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교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고통을 환영해야 한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도 절대 감추려 하지 않았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의 면모를 바꿔놓았다고 기록할 게 분명하다. 그런 변화는 10차례의 비밀투표 끝에 압도적으로(1백9표 중 1백3표로) 그를 교황에 선출한 추기경들 중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교황청을 세계 정치의 중심 무대로 바꿨다. 모스크바·워싱턴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교황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자주 그의 발언을 경청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 세기 전만 해도 바티칸시에 국한돼 있던 교황직 수행의 무대를 전세계로 넓혔다. 그는 아프리카 방문 4차례, 중남미 방문 5차례를 포함해 전세계 1백29개국을 1백4차례나 순방했다. 그 과정에서 멀리 떨어진 교황의 존재를 모두에게 친숙한 얼굴로 만들었다. 바로 자신의 얼굴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위 기간 중 가장 많이 대중에 노출된 교황이다. 복음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조차 그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다. 교황이 남기고 간 모습 중 네 가지가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1979년 공산 치하의 조국 폴란드를 첫 방문했을 당시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들을 불러모은 저항적인 모습의 새로운 교황, 자신에게 총을 쏜 정신나간 터키인 메메트 알리 아그자를 용서한 아량 깊은 교황,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의 문화부 장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에게 훈계하던 엄격한 교황, 그리고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죄악을 적은 종이를 벽 사이에 끼워넣음으로써 죄를 회개한 교황의 모습이 그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개석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으로도 매우 대조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채석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직접 책을 펴낸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사제 시절 그는 폴란드 청년들을 이끈 신부였지만 동시에 세계적 수준의 철학자였다. 주교 시절 그는 머리 싸움에선 공산주의 관리들에게 한 발 앞섰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수도사 이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교황 재직 중 성직자는 독신을 지켜야 한다고 옹호했지만 부부 간의 사랑을 찬양하는 열광적인 설교를 수 차례 했다.
또 피우스 12세 이후 가장 권위적인 교황이었음에도 자신의 책을 펴낼 때면 교황들이 즐겨 쓰는 ‘우리’란 표현 대신 ‘카롤 보이티와’란 자신의 본명을 사용했다. 본인 스스로가 정치인이었지만 중남미의 사제들에겐 정치적 운동에 가담하지 말 것을 강조했고, 미국의 사제들에겐 선출직 관직에 나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유대인 대학살을 거듭 언급하면서도 전세계 사람들에겐 나치 하에서 순교한 그리스도의 아들과 딸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교회를 통합하고 정화하려는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그의 임기 말 여전히 분열돼 있었다. 수세기 동안 볼 수 없었던 스캔들로 고통받고 있었다.
역사는 이 같은 역설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치와 공산주의 치하에서 성장한 보이티와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한 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과정을 직접 목도했다. 그는 또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통합된 가톨릭 교회만이 전체주의 국가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제도임을 알고 있었다.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국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1979년 폴란드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교황의 조국 방문을 허용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한 말은 옳았다.
보이티와가 생각하던 ‘연대’의 개념은 일종의 정신적 깃발이었다. 폴란드 근로자들은 결국 그 깃발을 들고 일어나 공산 권력자들로부터 권력을 되찾았다. “이 슬라브족 교황”(교황은 스스로를 곧잘 이렇게 불렀다)은 동유럽에 잠재돼 있던 ‘범슬라브주의’를 일깨워 공산주의 정권의 합법성에 대담하게 도전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옛 소련 제국은 전쟁도 치르지 않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대를 산 미국인으로 역시 같은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처럼 보이티와는 자신의 적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성공을 이뤄냈다. 그렇다면 교황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은 주요 국가들이 중국·북한·베트남,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인 것도 놀랄 게 못된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멸망의 효과 중 하나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세계적 정치인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국제 기구 중 규모에서 유엔 다음인(그러나 정책에선 훨씬 일관된) 조직의 수장인 교황은 바티칸을 대통령과 총리들의 주요 집결지로 만들었다. 지미 카터에서 조지 W. 부시에 이르는 미국의 모든 대통령이 그를 알현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는 폴란드 출신 교황과의 개인적 유대를 서둘러 수립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아래 바티칸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최대의 정치적 영향력과 외교적 인정을 누렸다.
1980년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국 군주로는 최초로 바티칸에서 교황을 알현했다. 2년 뒤 영국은 4백50년 전 국왕 헨리 8세가 바티칸과의 외교를 단절한 이래 최초로 그곳에 대사를 파견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신교를 믿는 국가들이 영국의 뒤를 따랐다. 1984년 미국은 바티칸과 전면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러시아·멕시코·이스라엘·요르단 외에 한때 공산국가였던 동유럽 국가들 중 대부분도 그렇게 했다. 2차대전 발발 전인 1939년과 비교하면 바티칸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의 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 동안 3배로 늘었다.
보이티와가 갖고 있던 세계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그 자신이 선택한 역할이 한동안 모호해졌다. 교황이라면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으뜸가는 스승·신부·행정가를 가리키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역할을 주로 복음 전도사로 간주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는 전세계의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답”이라고 공언했다. 교황의 가르침에서 이처럼 복음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 중에는 또다른 복음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있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서방의 도덕적 양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레이엄과는 달리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가 스스로 말한 “문화의 복음 전도”를 정력적으로 추구했다. 그리고 동료 주교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따르도록 촉구했다. 보이티와는 그리스도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현신일 뿐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같은 그리스도적 인도주의를 정치철학의 언어로 옮겼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도록 각국 정부에 촉구했다. 그는 사회와 관련된 주요 회칙에서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모두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발전을 저해하고, 자본주의는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회칙 ‘노동의 존엄성에 관해’(1983)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 순위’에 기초해 근로의 새로운 복음을 제시했다. 그리고 동유럽의 산업 국유화를 뒷받침하는 수준 높은 근거를 제공했다. 이에 고무된 미국과 서유럽의 가톨릭 주교들은 자국 정부의 경제적 우선 순위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교서들을 발표했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사회주의가 대안으로서의 타당성을 상실하는 듯하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1991년의 회칙 ‘1백년’에서 그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로 반쯤 마음이 돌아섰다. “개별 국가와 국제 관계의 차원에서 자유시장은 자원의 활용과, 수요에 대한 효과적 대응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임을 그는 인정했다.
심지어 “이익은 한 사업체가 원활히 기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합당한 지표”라고까지 말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전임자들이 대체로 기피한 이익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교황이 순수 자본주의의 추종자가 된 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주장을 펴는 언론 기사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국가가 사회정의의 구현이란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았고, 떠오르는 중유럽 민주국가들에 물질만능의 소비 지상주의를 날카롭게 경고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세계 평화의 이상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는 1991년의 걸프전과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모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유엔에 두 번씩이나 직접 나타나 더 이상 전쟁이 국제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비록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형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극단적 경우를 제외하면 비도덕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직접, 그리고 단호하게 바꿔 모든 종류의 폭력에 일체 반대했다.
물론 역사를 살펴보면 그의 호소가 외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간의 긴장 해소에는 좀더 효과적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교황이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 몸소 용서를 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례없이 교황 사과문을 잇따라 발표했다. 유대인들에겐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신교도들에겐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전쟁에서 가톨릭 교회가 맡은 역할에 대해,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에겐 갈릴레오에 대한 징계와 같은 교회의 오만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실제로 가톨릭의 몇몇 추기경들은 교황의 사죄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교회가 사과받아야 할 것도 적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대인들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6년 그는 교황으로선 처음으로 로마의 고대 유대 교회당을 방문한 데 이어 1993년엔 바티칸과 이스라엘 간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개인적으론 자신이 어렸을 때 함께 축구를 했던 유대인 친구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유대인 사회가 어디에 존재하든 그 대표들과 반드시 만났다. 2000년 그의 감동적인 이스라엘 순례는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개인적 업적으로 손꼽혔다. 4년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랍비들은 바티칸으로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함으로써 그에게 보답했다.
기독교계의 단합을 위한 교황의 노력은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몇몇 혁신적인 제스처가 담겨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직 자체가 기독교의 재통합을 가로막는 걸림돌임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재결합된 교회에서 교황청이 맡아야 할 역할을 검토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다른 기독교 기구들에 보냈다. 다른 기구들은 그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밀레니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또 다른 제스처를 취했다. 20세기 나치·공산당, 그리고 기타 반기독교 독재정권 치하에서 순교한 모든 기독교도들(신교와 정교회 신도 포함)의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주교들에게 지시한 것이다. “(교파를 초월한) 세계 교회주의의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는 성인과 순교자의 세계 교회주의일 것”이라고 그는 공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수십 년에 걸친 공산주의의 탄압으로부터 회복 중이던 정교회들은 바티칸과의 화해를 고려하기엔 너무 힘이 약했다. 특히 교황은 옛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방문을 위해 노력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도 그를 모스크바로 초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교황의 제의를 번번이 거절했다. 신교와 가톨릭계의 대표들은 다수의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선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특히 주교로서의 역할에 대해선 성공회를 비롯한 다른 종파들과 교황청 간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졌다.
무슬림에 대한 교황의 화해 제스처는 그보단 약간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 그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교회와 이슬람 간의 긴장 완화를 거듭 호소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무슬림 단체나 권위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1986년 종교 지도자들, 힌두교 성자들, 그리고 여러 다양한 부족 주술사들을 포함하는 전례없는 국제적 종교행사를 아시시에서 주최했다. 당시 그는 종교계에서 그를 제외하곤 유일한 ‘성하’(聖下·His Holiness)인 달라이 라마와 나란히 앉았다.
전세계 10억 명에 달하는 로마 가톨릭 신도의 최고 스승이자 지도자로서 보이티와는 교회의 모든 측면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전임자인 호인형의 알비노 루치아니는 요한 바오로 1세의 이름을 따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요한 13세와, 그 완성을 이끈 바오로 6세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러나 루치아니는 취임 후 불과 33일만에 관동맥 색전증으로 서거했다.
보이티와는 공의회의 심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처음엔 두드러지지 않았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를 자신의 호칭으로 택했을 때는 공의회의 개혁적 성향을 이어받겠다는 표시인 듯했다. 그는 전세계를 여행하며 아기를 들어올려 키스하고,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요한 바오로 2세,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구호를 외치는 페스티벌에서 함께 노래 불렀다. 또 비가톨릭 지도자들을 편안하게 대해줬으며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을 해마다 자신의 여름 별장에 초대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곧 그가 실은 가톨릭 이론과 실무에서 이른바 위험한 좌경화를 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엄격한 원칙주의자임을 깨닫게 됐다.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 중 하나는 교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미완의 작업으로 남겨둔 과제였다. 보이티와는 법전을 한 줄 한 줄 일일이 검토해 여백에 수정안을 적어 넣음으로써 교황청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현지 주교 합회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민주화 의지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교회 행정의 중심인 교황청의 역할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후론 주교 선발에 현지 교단보다는 현지에 파견된 로마 교황사절이 더 큰 역할을 맡게 됐다. 그 결과 오늘날 대부분의 주교들은 교황이 뽑은 보수적 인물들이며 교황의 후임자를 뽑을 추기경들 역시 보수 성향의 인물들이 주를 이루게 됐다.
임기 초 요한 바오로 2세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신부들의 결혼 금지 원칙을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바오로 6세 당시만 해도 로마 교황청은 매년 약 2천 명 신부들의 (대부분 결혼을 하기 위한) 신부직 사임을 허용했다. 보이티와는 그 수를 현격히 줄여 미미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신부들이 성직과는 별도로 결혼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동의하지만 교황은 신부들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다. 독신생활이야말로 성직자가 교회에 바칠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도 신부가 될 수 있다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1995년 교황은 교황 서한 ‘사제서품’에서 예수님도 남자 사도들만 택했으므로 교회는 여성에게 성직을 부여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그는 추후의 교황들도 자신의 생각을 따르게 하기 위해 “이 결정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지켜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같은 결정들은 교회의 ‘정통성’을 결정하는 새로운 기준이 됐다. 그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신부들은 주교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처럼 개혁적인 사고에 공감을 표시하는 주교들은 변두리 말단직으로 밀려났다.
정통성의 새로운 기준은 가톨릭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이끄는 로마 교황청 산하 신앙교리위원회는 신부의 신앙 기준을 강화했다.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성직자들은 교황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웅인 스위스 태생의 진보적 지식인 한스 큉을 비롯한 10여 명의 성직자들은 가톨릭 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기엔 더 이상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밖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쓴 책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남미에선 복음서와 마르크스주의 사회 분석을 섞어 놓은 듯한, 정치색 강한 해방신학이 억압을 받았다.
해방신학이 중남미에서 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데 이용돼 왔다는 교황의 판단 때문이었다. 가톨릭 고등 교육계에서도 이 같은 지적 탄압이 감지됐다. 교황청이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교도권 또는 교황이 ‘가르칠 권위’를 지지하겠다는 ‘규정’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세계 나머지 국가의 가톨릭 대학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의 가톨릭 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이제 이 규정으로 인해 주교들이 가톨릭 대학의 교직원에 대한 임명권을 갖게 될지 모른다(주교들은 실제로 그 분야에 경험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그 같은 역할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결국 학문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이 모든 규율도 이전의 교황들이 내린 침묵이나 파문의 징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선대 교황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을 시작했다. 예수회의 자치권을 빼앗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임시 지도자로 내세운 것이다. 그는 예수회가 특히 해방신학과 관련된 교육을 통해 “교단에 심려를 끼쳤다”고 비난했다. 예수회는 2년 안에 자치권을 회복했지만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미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준 뒤였다. 코뮤니오네 에 리베라치오네, 리저네어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고 특히 비밀 의식으로 유명한 오푸스 데이 같은 보수적인 평신도·성직자 운동 단체들이 그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새로운 정통교리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성 도덕에 대한 교황의 강조였다.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낙태·피임·안락사 등에 반대해왔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같은 관행이 서구에서(특히 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에게서조차) 급속히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예컨대 폴란드는 탈 공산화 이후 정상적인 출산보다 낙태가 더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교도를 포함한 모든 세계인들에게 확산일로의 “죽음의 문화”에 맞서 “생명의 문화”를 지키자고 요청했다. 제3세계의 인구 증가를 막는 일차적 해결책으로 피임과 낙태를 권장하는 유엔의 노력에 반대하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과도 연대했다. 반면 미국은 유엔의 그 같은 활동을 주도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처럼 강경한 태도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톨릭계의 낙태 반대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의 피임 수용을 막을 순 없었다.
교황의 건강이 악화된 말년은 아무래도 전체 재임 기간을 통틀어 활동이나 성과가 가장 미미한 시기였다. 기독교의 세 번째 밀레니엄이 시작되자 교황은 “새로운 복음 전도”를 천명했다. 교황은 이를 통해 본인 스스로가 말한 “진리의 광채”를 모든 교회가 증거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곧 교회는 역사상 최대의 추문 중 하나로 기억될 사건에 직면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이 미국·아일랜드, 그리고 유럽 곳곳에 만연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극소수 성직자였지만 피해자들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일부 주교들(특히 보스턴의 버나드 로 추기경)의 사실 은폐는 가톨릭 평신도들을 분노케 했다. 교회 권력의 투명성을 높이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일어났다. 성추문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교황이 소임을 다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황은 교회를 뒤덮은 불명예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도록 오래 살았던 다른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의 여러 하위 부분을 나눠 맡고 있는 아랫사람들에게 교회의 일상적 업무를 이양한지 이미 오래였다.
보이티와가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하려면 수십 년은 족히 지나야 할 것이다. 교황의 연설과 저술은 두툼한 책으로 1백50권 분량도 넘는다. 교회는 항상 전통을 중시한다. 따라서 교황의 가르침이 살아 숨쉬는 그 거대한 광맥은 다음 번 교황이 임기를 다한 후에도 계속 영향을 발휘할 게 분명하다.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새 교리문답을 내놓거나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임으로써 교회의 기본 교리에 새로운 확실성을 부여해왔다. 그는 교회의 성인 달력도 다시 만들어 전임자들이 한 것을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복자(福者)와 성인(聖人)을 추대했다.
보이티와 자신도 성인이었을까? 교황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자들은 바로 같은 가톨릭 신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조치들이 교회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하는 신도들도 교황 개인과 그의 업적을 분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보이티와는 분명 진실한 기도자였고, 사려 깊으면서도 과감한 실천가였다. 묵상은 그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시끌벅적한 대중 집회 한가운데서도 평온히 묵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매일 몇 시간씩 무릎을 꿇고, 때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기도를 올렸다. 원기왕성하던 중년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말년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픈 몸은 교황의 내적 강인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정치와 교회에 관해 그가 내렸던 결정이 전부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교황이 아무리 과실이 없는 존재라 해도 실수를 전혀 안할 수는 없다. 교황의 가장 명백한 실패는 무엇보다 한때 기독교의 땅이었던 유럽을 그 영적인 뿌리로 되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롤 보이티와는 지칠 줄 모르는 복음의 전파자였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세상을 향해 자신과 함께 “희망의 문턱을 넘어” 가자고 끊없이 촉구했다. 4월 2일 그가 떠나간 후 세상에 남겨진 신자들은 로마 교황청 창문 밖을 지키며 폴란드에서의 유년 시절부터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로 뛰어난 치세를 펼칠 때까지 교황의 삶 전체를 지배한 말씀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애도하는 군중들은 ‘성모송’을 연거푸 부르며 읊조렸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지금도, 저희가 죽을 때도, 저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주소서 빌어주소서.” 그리고 가브리엘에게서 그리스도 잉태 소식을 들은 후 마리아가 했던 말이 담긴 ‘성모마리아 찬가’가 울려퍼졌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렙니다.” 그 오랜 세월 묵상과 희망을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 설렜던 교황에게 꼭 맞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With CHRISTOPHER DICKEY, EDWARD PENTIN and BARBIE NADEAU in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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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도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드넓은 성 베드로 광장의 침묵 속에서 부모들은 자녀의 귀에 속삭였다. 커플들은 서로를 위안했다. 많은 남녀들은 교황이 누운 채 서거해 가는 불켜진 창문을 바라보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4월 2일 밤(이하 바티칸 현지 시간) 마침내 교황의 선종(善終) 소식이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전해졌다.
검은색 성복을 착용한 한 무리의 고위 성직자들이 마치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를 바라는듯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단 한쪽 끝에 모였다. 바티칸 국무차관직을 맡고 있는 레오나르도 산드리 대주교가 “여러분들께 매우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됐습니다. 교황께서 성부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고 말했다. 울음 소리는 아무 데서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들 사이로 슬픔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리곤 그 성직자들이 로사리오 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곧 선종을 알리는 한 개의 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3월 31일 84세의 교황이 고열과 패혈증 쇼크로 혈압이 크게 떨어지면서 전세계인들은 거의 48시간 동안 철야 기도를 했다. 3월 31일 새벽이 되기 전 교황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미사를 집전했다. 한 측근은 그리스도의 유죄 선고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일, 그리고 매장에 이르는 십자가 행로의 14처를 암송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몇 년 전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이 오면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 없이 경건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해주소서. 왜냐하면 당신을 만나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주님을 추구해오던 우리가 지상에서 알아왔던 모든 진정한 선을 마침내 다시 한 번 더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희망을 가진 채 우리를 먼저 떠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4월 2일 오후 9시 37분 교황은 의사·교황청 직원·친구 등 약 12명에게 둘러싸인 채 영면을 맞았다.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대부분의 다른 교황들보다 재위 기간이 길다. 그는 26년 이상 교황으로 재직해왔다. 거의 10년 간을 파킨슨병으로 서서히 고통받아 오면서도 이를 인내하며 교황직을 지켰다. 휴가철이면 스키와 산악 하이킹을 즐길 정도로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고, 배우 출신으로 세계를 자신의 무대로 만들었다. 지칠 줄 모르고 전세계를 순방할 때면 아무리 작은 나라에 도착해도 허리를 굽혀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토록 많은 나라를 방문한 교황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 교황이 우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이가 들고 쇠약해져갔다. 그래서 우리는 교황이 걷는 능력을 상실하거나, 발음이 분명치 않거나, 교회 행사 도중 머리가 숙여지거나, 입술에서 침이 떨어지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교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고통을 환영해야 한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도 절대 감추려 하지 않았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의 면모를 바꿔놓았다고 기록할 게 분명하다. 그런 변화는 10차례의 비밀투표 끝에 압도적으로(1백9표 중 1백3표로) 그를 교황에 선출한 추기경들 중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교황청을 세계 정치의 중심 무대로 바꿨다. 모스크바·워싱턴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교황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자주 그의 발언을 경청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 세기 전만 해도 바티칸시에 국한돼 있던 교황직 수행의 무대를 전세계로 넓혔다. 그는 아프리카 방문 4차례, 중남미 방문 5차례를 포함해 전세계 1백29개국을 1백4차례나 순방했다. 그 과정에서 멀리 떨어진 교황의 존재를 모두에게 친숙한 얼굴로 만들었다. 바로 자신의 얼굴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위 기간 중 가장 많이 대중에 노출된 교황이다. 복음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조차 그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다. 교황이 남기고 간 모습 중 네 가지가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1979년 공산 치하의 조국 폴란드를 첫 방문했을 당시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들을 불러모은 저항적인 모습의 새로운 교황, 자신에게 총을 쏜 정신나간 터키인 메메트 알리 아그자를 용서한 아량 깊은 교황,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의 문화부 장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에게 훈계하던 엄격한 교황, 그리고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죄악을 적은 종이를 벽 사이에 끼워넣음으로써 죄를 회개한 교황의 모습이 그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개석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으로도 매우 대조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채석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직접 책을 펴낸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사제 시절 그는 폴란드 청년들을 이끈 신부였지만 동시에 세계적 수준의 철학자였다. 주교 시절 그는 머리 싸움에선 공산주의 관리들에게 한 발 앞섰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수도사 이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교황 재직 중 성직자는 독신을 지켜야 한다고 옹호했지만 부부 간의 사랑을 찬양하는 열광적인 설교를 수 차례 했다.
또 피우스 12세 이후 가장 권위적인 교황이었음에도 자신의 책을 펴낼 때면 교황들이 즐겨 쓰는 ‘우리’란 표현 대신 ‘카롤 보이티와’란 자신의 본명을 사용했다. 본인 스스로가 정치인이었지만 중남미의 사제들에겐 정치적 운동에 가담하지 말 것을 강조했고, 미국의 사제들에겐 선출직 관직에 나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유대인 대학살을 거듭 언급하면서도 전세계 사람들에겐 나치 하에서 순교한 그리스도의 아들과 딸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교회를 통합하고 정화하려는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그의 임기 말 여전히 분열돼 있었다. 수세기 동안 볼 수 없었던 스캔들로 고통받고 있었다.
역사는 이 같은 역설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치와 공산주의 치하에서 성장한 보이티와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한 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과정을 직접 목도했다. 그는 또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통합된 가톨릭 교회만이 전체주의 국가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제도임을 알고 있었다.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국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1979년 폴란드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교황의 조국 방문을 허용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한 말은 옳았다.
보이티와가 생각하던 ‘연대’의 개념은 일종의 정신적 깃발이었다. 폴란드 근로자들은 결국 그 깃발을 들고 일어나 공산 권력자들로부터 권력을 되찾았다. “이 슬라브족 교황”(교황은 스스로를 곧잘 이렇게 불렀다)은 동유럽에 잠재돼 있던 ‘범슬라브주의’를 일깨워 공산주의 정권의 합법성에 대담하게 도전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옛 소련 제국은 전쟁도 치르지 않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대를 산 미국인으로 역시 같은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처럼 보이티와는 자신의 적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성공을 이뤄냈다. 그렇다면 교황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은 주요 국가들이 중국·북한·베트남,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인 것도 놀랄 게 못된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멸망의 효과 중 하나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세계적 정치인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국제 기구 중 규모에서 유엔 다음인(그러나 정책에선 훨씬 일관된) 조직의 수장인 교황은 바티칸을 대통령과 총리들의 주요 집결지로 만들었다. 지미 카터에서 조지 W. 부시에 이르는 미국의 모든 대통령이 그를 알현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는 폴란드 출신 교황과의 개인적 유대를 서둘러 수립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아래 바티칸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최대의 정치적 영향력과 외교적 인정을 누렸다.
1980년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국 군주로는 최초로 바티칸에서 교황을 알현했다. 2년 뒤 영국은 4백50년 전 국왕 헨리 8세가 바티칸과의 외교를 단절한 이래 최초로 그곳에 대사를 파견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신교를 믿는 국가들이 영국의 뒤를 따랐다. 1984년 미국은 바티칸과 전면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러시아·멕시코·이스라엘·요르단 외에 한때 공산국가였던 동유럽 국가들 중 대부분도 그렇게 했다. 2차대전 발발 전인 1939년과 비교하면 바티칸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의 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 동안 3배로 늘었다.
보이티와가 갖고 있던 세계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그 자신이 선택한 역할이 한동안 모호해졌다. 교황이라면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으뜸가는 스승·신부·행정가를 가리키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역할을 주로 복음 전도사로 간주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는 전세계의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답”이라고 공언했다. 교황의 가르침에서 이처럼 복음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 중에는 또다른 복음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있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서방의 도덕적 양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레이엄과는 달리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가 스스로 말한 “문화의 복음 전도”를 정력적으로 추구했다. 그리고 동료 주교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따르도록 촉구했다. 보이티와는 그리스도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현신일 뿐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같은 그리스도적 인도주의를 정치철학의 언어로 옮겼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도록 각국 정부에 촉구했다. 그는 사회와 관련된 주요 회칙에서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모두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발전을 저해하고, 자본주의는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회칙 ‘노동의 존엄성에 관해’(1983)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 순위’에 기초해 근로의 새로운 복음을 제시했다. 그리고 동유럽의 산업 국유화를 뒷받침하는 수준 높은 근거를 제공했다. 이에 고무된 미국과 서유럽의 가톨릭 주교들은 자국 정부의 경제적 우선 순위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교서들을 발표했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사회주의가 대안으로서의 타당성을 상실하는 듯하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1991년의 회칙 ‘1백년’에서 그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로 반쯤 마음이 돌아섰다. “개별 국가와 국제 관계의 차원에서 자유시장은 자원의 활용과, 수요에 대한 효과적 대응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임을 그는 인정했다.
심지어 “이익은 한 사업체가 원활히 기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합당한 지표”라고까지 말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전임자들이 대체로 기피한 이익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교황이 순수 자본주의의 추종자가 된 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주장을 펴는 언론 기사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국가가 사회정의의 구현이란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았고, 떠오르는 중유럽 민주국가들에 물질만능의 소비 지상주의를 날카롭게 경고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세계 평화의 이상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는 1991년의 걸프전과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모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유엔에 두 번씩이나 직접 나타나 더 이상 전쟁이 국제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비록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형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극단적 경우를 제외하면 비도덕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직접, 그리고 단호하게 바꿔 모든 종류의 폭력에 일체 반대했다.
물론 역사를 살펴보면 그의 호소가 외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간의 긴장 해소에는 좀더 효과적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교황이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 몸소 용서를 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례없이 교황 사과문을 잇따라 발표했다. 유대인들에겐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신교도들에겐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전쟁에서 가톨릭 교회가 맡은 역할에 대해,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에겐 갈릴레오에 대한 징계와 같은 교회의 오만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실제로 가톨릭의 몇몇 추기경들은 교황의 사죄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교회가 사과받아야 할 것도 적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대인들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6년 그는 교황으로선 처음으로 로마의 고대 유대 교회당을 방문한 데 이어 1993년엔 바티칸과 이스라엘 간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개인적으론 자신이 어렸을 때 함께 축구를 했던 유대인 친구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유대인 사회가 어디에 존재하든 그 대표들과 반드시 만났다. 2000년 그의 감동적인 이스라엘 순례는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개인적 업적으로 손꼽혔다. 4년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랍비들은 바티칸으로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함으로써 그에게 보답했다.
기독교계의 단합을 위한 교황의 노력은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몇몇 혁신적인 제스처가 담겨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직 자체가 기독교의 재통합을 가로막는 걸림돌임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재결합된 교회에서 교황청이 맡아야 할 역할을 검토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다른 기독교 기구들에 보냈다. 다른 기구들은 그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밀레니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또 다른 제스처를 취했다. 20세기 나치·공산당, 그리고 기타 반기독교 독재정권 치하에서 순교한 모든 기독교도들(신교와 정교회 신도 포함)의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주교들에게 지시한 것이다. “(교파를 초월한) 세계 교회주의의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는 성인과 순교자의 세계 교회주의일 것”이라고 그는 공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수십 년에 걸친 공산주의의 탄압으로부터 회복 중이던 정교회들은 바티칸과의 화해를 고려하기엔 너무 힘이 약했다. 특히 교황은 옛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방문을 위해 노력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도 그를 모스크바로 초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교황의 제의를 번번이 거절했다. 신교와 가톨릭계의 대표들은 다수의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에 대해선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특히 주교로서의 역할에 대해선 성공회를 비롯한 다른 종파들과 교황청 간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졌다.
무슬림에 대한 교황의 화해 제스처는 그보단 약간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 그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교회와 이슬람 간의 긴장 완화를 거듭 호소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무슬림 단체나 권위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1986년 종교 지도자들, 힌두교 성자들, 그리고 여러 다양한 부족 주술사들을 포함하는 전례없는 국제적 종교행사를 아시시에서 주최했다. 당시 그는 종교계에서 그를 제외하곤 유일한 ‘성하’(聖下·His Holiness)인 달라이 라마와 나란히 앉았다.
전세계 10억 명에 달하는 로마 가톨릭 신도의 최고 스승이자 지도자로서 보이티와는 교회의 모든 측면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전임자인 호인형의 알비노 루치아니는 요한 바오로 1세의 이름을 따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요한 13세와, 그 완성을 이끈 바오로 6세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러나 루치아니는 취임 후 불과 33일만에 관동맥 색전증으로 서거했다.
보이티와는 공의회의 심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처음엔 두드러지지 않았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를 자신의 호칭으로 택했을 때는 공의회의 개혁적 성향을 이어받겠다는 표시인 듯했다. 그는 전세계를 여행하며 아기를 들어올려 키스하고, 수백만 명의 가톨릭 청소년들이 “요한 바오로 2세,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구호를 외치는 페스티벌에서 함께 노래 불렀다. 또 비가톨릭 지도자들을 편안하게 대해줬으며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을 해마다 자신의 여름 별장에 초대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곧 그가 실은 가톨릭 이론과 실무에서 이른바 위험한 좌경화를 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엄격한 원칙주의자임을 깨닫게 됐다.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 중 하나는 교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미완의 작업으로 남겨둔 과제였다. 보이티와는 법전을 한 줄 한 줄 일일이 검토해 여백에 수정안을 적어 넣음으로써 교황청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현지 주교 합회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민주화 의지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교회 행정의 중심인 교황청의 역할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후론 주교 선발에 현지 교단보다는 현지에 파견된 로마 교황사절이 더 큰 역할을 맡게 됐다. 그 결과 오늘날 대부분의 주교들은 교황이 뽑은 보수적 인물들이며 교황의 후임자를 뽑을 추기경들 역시 보수 성향의 인물들이 주를 이루게 됐다.
임기 초 요한 바오로 2세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신부들의 결혼 금지 원칙을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바오로 6세 당시만 해도 로마 교황청은 매년 약 2천 명 신부들의 (대부분 결혼을 하기 위한) 신부직 사임을 허용했다. 보이티와는 그 수를 현격히 줄여 미미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신부들이 성직과는 별도로 결혼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동의하지만 교황은 신부들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다. 독신생활이야말로 성직자가 교회에 바칠 수 있는 귀중한 선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도 신부가 될 수 있다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1995년 교황은 교황 서한 ‘사제서품’에서 예수님도 남자 사도들만 택했으므로 교회는 여성에게 성직을 부여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게다가 그는 추후의 교황들도 자신의 생각을 따르게 하기 위해 “이 결정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지켜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같은 결정들은 교회의 ‘정통성’을 결정하는 새로운 기준이 됐다. 그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신부들은 주교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처럼 개혁적인 사고에 공감을 표시하는 주교들은 변두리 말단직으로 밀려났다.
정통성의 새로운 기준은 가톨릭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이끄는 로마 교황청 산하 신앙교리위원회는 신부의 신앙 기준을 강화했다.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성직자들은 교황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웅인 스위스 태생의 진보적 지식인 한스 큉을 비롯한 10여 명의 성직자들은 가톨릭 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기엔 더 이상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밖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쓴 책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남미에선 복음서와 마르크스주의 사회 분석을 섞어 놓은 듯한, 정치색 강한 해방신학이 억압을 받았다.
해방신학이 중남미에서 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데 이용돼 왔다는 교황의 판단 때문이었다. 가톨릭 고등 교육계에서도 이 같은 지적 탄압이 감지됐다. 교황청이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교도권 또는 교황이 ‘가르칠 권위’를 지지하겠다는 ‘규정’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세계 나머지 국가의 가톨릭 대학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의 가톨릭 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이제 이 규정으로 인해 주교들이 가톨릭 대학의 교직원에 대한 임명권을 갖게 될지 모른다(주교들은 실제로 그 분야에 경험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그 같은 역할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결국 학문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이 모든 규율도 이전의 교황들이 내린 침묵이나 파문의 징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선대 교황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을 시작했다. 예수회의 자치권을 빼앗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임시 지도자로 내세운 것이다. 그는 예수회가 특히 해방신학과 관련된 교육을 통해 “교단에 심려를 끼쳤다”고 비난했다. 예수회는 2년 안에 자치권을 회복했지만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미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준 뒤였다. 코뮤니오네 에 리베라치오네, 리저네어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고 특히 비밀 의식으로 유명한 오푸스 데이 같은 보수적인 평신도·성직자 운동 단체들이 그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새로운 정통교리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성 도덕에 대한 교황의 강조였다.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낙태·피임·안락사 등에 반대해왔지만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같은 관행이 서구에서(특히 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에게서조차) 급속히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예컨대 폴란드는 탈 공산화 이후 정상적인 출산보다 낙태가 더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교도를 포함한 모든 세계인들에게 확산일로의 “죽음의 문화”에 맞서 “생명의 문화”를 지키자고 요청했다. 제3세계의 인구 증가를 막는 일차적 해결책으로 피임과 낙태를 권장하는 유엔의 노력에 반대하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과도 연대했다. 반면 미국은 유엔의 그 같은 활동을 주도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처럼 강경한 태도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톨릭계의 낙태 반대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의 피임 수용을 막을 순 없었다.
교황의 건강이 악화된 말년은 아무래도 전체 재임 기간을 통틀어 활동이나 성과가 가장 미미한 시기였다. 기독교의 세 번째 밀레니엄이 시작되자 교황은 “새로운 복음 전도”를 천명했다. 교황은 이를 통해 본인 스스로가 말한 “진리의 광채”를 모든 교회가 증거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곧 교회는 역사상 최대의 추문 중 하나로 기억될 사건에 직면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이 미국·아일랜드, 그리고 유럽 곳곳에 만연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극소수 성직자였지만 피해자들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일부 주교들(특히 보스턴의 버나드 로 추기경)의 사실 은폐는 가톨릭 평신도들을 분노케 했다. 교회 권력의 투명성을 높이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일어났다. 성추문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교황이 소임을 다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황은 교회를 뒤덮은 불명예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도록 오래 살았던 다른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의 여러 하위 부분을 나눠 맡고 있는 아랫사람들에게 교회의 일상적 업무를 이양한지 이미 오래였다.
보이티와가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하려면 수십 년은 족히 지나야 할 것이다. 교황의 연설과 저술은 두툼한 책으로 1백50권 분량도 넘는다. 교회는 항상 전통을 중시한다. 따라서 교황의 가르침이 살아 숨쉬는 그 거대한 광맥은 다음 번 교황이 임기를 다한 후에도 계속 영향을 발휘할 게 분명하다.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새 교리문답을 내놓거나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임으로써 교회의 기본 교리에 새로운 확실성을 부여해왔다. 그는 교회의 성인 달력도 다시 만들어 전임자들이 한 것을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복자(福者)와 성인(聖人)을 추대했다.
보이티와 자신도 성인이었을까? 교황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자들은 바로 같은 가톨릭 신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조치들이 교회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하는 신도들도 교황 개인과 그의 업적을 분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보이티와는 분명 진실한 기도자였고, 사려 깊으면서도 과감한 실천가였다. 묵상은 그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시끌벅적한 대중 집회 한가운데서도 평온히 묵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매일 몇 시간씩 무릎을 꿇고, 때론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기도를 올렸다. 원기왕성하던 중년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말년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픈 몸은 교황의 내적 강인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정치와 교회에 관해 그가 내렸던 결정이 전부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교황이 아무리 과실이 없는 존재라 해도 실수를 전혀 안할 수는 없다. 교황의 가장 명백한 실패는 무엇보다 한때 기독교의 땅이었던 유럽을 그 영적인 뿌리로 되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롤 보이티와는 지칠 줄 모르는 복음의 전파자였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세상을 향해 자신과 함께 “희망의 문턱을 넘어” 가자고 끊없이 촉구했다. 4월 2일 그가 떠나간 후 세상에 남겨진 신자들은 로마 교황청 창문 밖을 지키며 폴란드에서의 유년 시절부터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로 뛰어난 치세를 펼칠 때까지 교황의 삶 전체를 지배한 말씀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애도하는 군중들은 ‘성모송’을 연거푸 부르며 읊조렸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지금도, 저희가 죽을 때도, 저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주소서 빌어주소서.” 그리고 가브리엘에게서 그리스도 잉태 소식을 들은 후 마리아가 했던 말이 담긴 ‘성모마리아 찬가’가 울려퍼졌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렙니다.” 그 오랜 세월 묵상과 희망을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 설렜던 교황에게 꼭 맞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With CHRISTOPHER DICKEY, EDWARD PENTIN and BARBIE NADEAU in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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