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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兵은 죽지 않는다…”

“老兵은 죽지 않는다…”

남들은 한 번 이기기도 힘든 국내 모든 바둑대회를 석권한 전관왕(全冠王) 세 번, 최우수 기사 8번,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의 주인공 조훈현 9단. 그의 이름 앞에는 ‘최연소’ ·'최초' · ‘최우수’라는 수식어가, 이름 뒤에는 ‘왕위’ ·'국수' ·‘기왕’ ·'명인' ·‘패왕’ 등의 호칭이 붙는다. 가히 ‘바둑 황제’로 불릴 만한데, 그는 아직도 스스로 “19로(路)(바둑판)의 모퉁이에 서 있다”며 쉰을 넘긴 나이에도 젊은이들과 대국을 치르며 변신을 멈추지 않는다.
장미꽃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5월 하순이면 북한산 밑자락 서울 평창동 조훈현 9단의 집은 활기가 넘친다. 전부 합치면 수백 단에 이르는 유명 신예 바둑기사 80여 명이 이 집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조 9단의 집들이식 초청으로 이뤄지는 행사로, 요즘 뜨는 신예 기사들과 화제 대국을 복기(復棋)하는 형식의 바둑 연구 모임이다. 신예 기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온통 가로 세로 두 뼘짜리 바둑판에 집중되고, 조 9단이 여러 가지 변화도를 그리며 몇 수 가르침을 준다.
“5월이면 젊은 후배들을 집으로 불러 함께 바둑을 연구하고 저녁도 함께합니다. 매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는 게 흥미롭습니다.”

서울 왕십리 한국기원 대국실에서 조 9단을 만났다. 그는 소탈하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는데도 소년처럼 순수한 느낌을 준다.
62년 불과 9세의 나이에 프로에 입단한 조 9단의 바둑 인생은 어느새 40년이 넘었다. 프로 기사들에게는 바둑 두는 스타일에 따라 별명이 붙는다. 그에게도 연륜만큼 여러 별명이 따라다니는데, 그 궤적은 조훈현 바둑 스토리 그 자체다.

“그냥 돌을 놓는 것으로 치면 어릴 적부터 수만 판을 두었겠지요. 프로 입단 이후 정식 시합만 해도 2,000판은 넘을 것입니다.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은 89년 9월 5일 제1회 잉창치배(應氏盃) 결승이지요. 힘들 때마다 그날 우승의 기쁨을 되새기곤 합니다.”
89년 조훈현 9단은 한국 바둑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단신으로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잉창치배 대회에 나가 중국 ·일본의 고수를 물리치고 정상에 오르며 40만 달러의 상금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그는 변방에 있던 한국 바둑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렸다. 29세의 나이에 한국 최초 9단으로 인정받은 82년부터 90년대 초까지가 그의 전성기다. 이 시기는 한국 바둑사에 조훈현의 무적(無敵)시대로 기록된다. 20?0대 그의 몸처럼 바둑이 유연하고 스피드가 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속력행마(速力行馬)’와 ‘제비’다.

40대 좌절 딛고 대변신

하지만 그에게 영광과 환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대 후반~30대의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 하고 40대에 접어들면서 좌절과 시련의 시기가 찾아왔다. 90년대, 그는 세월과 자기보다 강한 후배들 때문에 고전한다. 93년 말 그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어울리는 제자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하루아침에 초라해진 그는 스스로 변신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했다.
“여러 타이틀이 있다가 사라졌는데…. 우선 마음을 편히 먹었어요.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다’ ·'거꾸로 보면 이제 좋은 일밖에 없다’라며 스스로 달랬습니다. 더욱 열심히 산에 다녔지요. 그러자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성적도 올라가더군요.”

그는 이 무렵 바둑을 두는 스타일을 바꿨다. 대국에 들어가면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천부의 재능에 전투력을 갖추자 그의 바둑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지난해 펴낸 책에서도 적은 대로 ‘전신(戰神)’과 ‘화염방사기’다. 바둑판의 단맛과 쓴맛을 다 본 그의 ‘사오정’극복기는 위에 눌리고 아래에서 치받치는 요즘 40대 샌드위치 세대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했지요.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건강이 중요합니다. 운동을 해야지요. 그리고 사업이나 공부에 전념하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신세 타령을 해봤자 한숨만 나오지요. 이 무렵 그 좋아하던 장미 담배도 끊었습니다.”
젊은 시절 대국장에서 줄담배를 피워 체인 스모커(chain smoker)로 알려진 그가 나중에 금연초 모델이 된 인연도 여기서 잉태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신예들이 바둑계를 누비고 있다. 어느새 그는 웬만한 대회에 나가면 최고령자 대접을 받는다. 그때마다 “1승이라도 거두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자신을 낮춘다.
“대국을 치르다 보면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보통 밤 10시까지 합니다. 20?0대 시절에는 1년에 100차례 이상 대국도 거뜬히 소화해냈지요. 사실 바둑을 빨리 두는 편인데도 하다 보면 피곤합니다. 10?0대 젊은이들을 이기기 어려워요. 아무래도 정신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실력은 엇비슷한데 체력과 정신력에서 밀리거든요. 바둑은 마라톤과 비슷해요. 한 판에 100수, 200수 두는데 한수 삐딱하면 갑니다.”
대국을 치르는 것 자체가 ‘노동’이다. 따라서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이기기 어렵다. 조 9단의 건강은 오랜 등산에서 나온다. 그는 등산 예찬론자인 동시에 강북(江北) 예찬론자다. 산이 좋아서 서울 강북을 떠나지 않았고, 90년대 초 평창동으로 이사했다. 부인은 겨울철에 춥다며 아파트로 이사하길 원했지만 북한산 밑자락이 좋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집을 고치고 눌러앉았다.

바둑의 사업성 ·세계화 ‘실험 중’

조훈현 9단도 ‘기업 경영인’이다. 국내 최대 바둑 사이트인 타이젬(TYGEM.com)의 대표이사다. 조훈현 ·유창혁 9단 등 프로기사 40여 명과 동양메이저 ·데이콤 등 기업들이 출자해 2000년에 만든 타이젬은 중국 ·일본 등 해외에 바둑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는 타이젬의 바둑과 관련된 대외 업무만 하고 경영은 전문 경영인이 맡고 있다. 조 9단의 홈페이지(www.chohunhyun.com)는 명국선 ·기보 감상실 ·조훈현 스토리 등으로 잘 정돈돼 있다.

조 9단은 바둑의 활로가 인터넷 사업의 성패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온라인 바둑의 활성화를 위해 바둑 돌 대신 마우스를 잡고 사이버 대국실에 출전한다. 주로 심야에 사이트에 들어가 익명의 아이디로 불특정 다수와 여러 판을 둔다. 그는 바둑 사이트를 노름이나 게임 사이트와 달리 봐달라고 강조한다.
“바둑 사이트를 찾는 네티즌의 참여와 흥미를 돋우기 위해 누가 이기는지 응원하고 사이버 머니를 걸 수 있도록 하는데, 이를 노름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에 별도 심의를 건의했지만 ‘하나 봐주면 다 봐줘야 한다’며 ‘일단 (돈을) 걸면 안 된다’고 하네요. 바둑 사이트를 포커나 고스톱 사이트, 리니지 게임 등과 같이 보면서 사이버 머니가 이전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사실 바둑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흥책이 없는데, 바둑 사이트의 특성을 좀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작가의 작품과 같은 성격인 바둑기사의 기보(棋譜) 저작권도 보호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이 문제가 머지않아 바둑기사들의 자존심과 결부되는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고, 정당한 저작권료가 주어진다면 바둑인들의 환경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둑의 발상지가 중국이고, 일본이 400~500년의 역사에다 땅도 넓지만 현재 3국 중 한국이 가장 막강하다. 한 ·중 ·일(韓 ·中 ·日) 바둑 삼국지는 한국이 평정했으며, 바둑의 ‘한국류’는 20년 정도 더 불 것으로 조 9단은 내다본다. 공한증(恐韓症)은 축구만이 아닌 바둑에도 있다.

“그전보다 모든 게 강해졌습니다. 이창호 ·이세돌 9단 등 정상급이 서너 명에 이르고 중간 허리와 그 아래 10대 층도 두텁습니다. 구조적으로 좋아요. 그렇다고 방심해선 곤란합니다. (바둑 말고) 놀 게 많잖아요. 젊은이들이 바둑을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은퇴는 없다…자꾸 패하면 퇴역병

조훈현 9단은 일본에서 두 스승에게 배웠다. 내제자로 들어간 세고에 겐사코(瀨越憲作) 선생에게선 바둑 그 자체보다 정신적으로 더 많이 배웠다고 회고한다. 바둑 실전은 60대의 나이에 타이틀을 따낸 것으로 유명한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로부터 터득했다.

“손을 잡고 1+1=2란 식으로 가르치는 게 스승의 길은 아니지요. 나무를 볼 수 있는 길을 보여주며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제자 이창호를 일본식으로 가르쳤다. 후진을 잘 키우는 것이 스승에게 보답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이제 세계 랭킹 1위로 스승을 앞선 이창호 9단을 자주 만나며, 때로는 맞수로 치열한 대국을 치르기도 한다.

조 9단이야말로 한국 신예를 키우는 최고의 조련사로 꼽힌다. 84년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 2년 만에 입단시켰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훈련교관’. 그는 프로 기사에게는 승부사로서의 끼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프로 기사의 성격이 바둑 실력과 직결된다고 본다.
“프로 입단은 어느 정도 노력하면 가능합니다. 계속 성장하려면 ‘자기 바둑’을 두어야지요. 언제부턴가 젊은 기사들의 바둑에 개성이 사라진 느낌을 받습니다. 모험보다 안전운행을 선택하다 보면 발전이 더딜 밖에요. 이 한 판은 누구 바둑이라고 짐작할 수 있도록 연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의 나이 올해 쉰둘. 은퇴를 생각해보았느냐는 물음에 그저 허허 웃는다. 그 모습에 대가의 연륜과 여유가 담겨 있다. 통산 타이틀로 보면 조 9단이 157개(국제 11, 국내 146)로 여전히 압도적 세계 1위다. 또 2000년 이후 5년여의 성적을 봐도 승률 66%(238승 124패)로 한국기원 소속 202명의 프로 기사 중 7위다.
“바둑 세계는 은퇴만 안 하면 계속 현역이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성적을 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에도 정년은 있지만 일선에서 활동하며 성과를 낼 때까지 대접받는 것 아닌가요. 일은 하지 않고 이름뿐이면 의미가 없잖아요. 바둑을 둘 때마다 진다면 이미 현역이 아니지요.”



조훈현 9단 프로필
1953년 전남 목포 生, 일본 신메이중학교 졸업, 목포대 체육학 명예박사
62년 프로 입단(9세, 세계 최연소 입단)
63년 일본 유학, 세고에 겐사코 9단 문하
66년 일본기원 초단
72년 귀국, 일본기원 5단 인정
82년 한국 최초 9단 인정(29세)
89년 은관 문화훈장 서훈
국내 대회 全冠王 3회 기록(80년 9관왕, 82년 10관왕, 86년 11관왕)
최우수 기사 통산 8회(78∼83년 6년 연속, 89년, 94년)
94년 세계대회 사이클링히트 달성(89년 잉창치배, 93년 동양증권배, 94년 후지쓰배 우승)
95년 1,000승 기록 달성
96년 한국기네스협회 선정 최다 연승 및 최다 타이틀 획득
2002년 바둑문화상 ‘우수기사상’ 수상
<조훈현 9단의 주요 대국 성적>
1989년 제1회 잉창치배 우승(對 네웨이핑, 3승2패)
93년 동양증권배 우승(對 요다 노리모토, 3승1패)
94년 후지쓰배 우승(對 유창혁), 진로배(단체전) 우승
96년 동양증권배 우승(對 고바야시 사토루, 3승0패)
99년 제1회 춘란배 우승(對 이창호, 2승1패)
2000년 후지쓰배 우승(對 창하오),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對 이창호)
2001년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對 목진석)
후지쓰배 우승(對 최명훈)=대회 2연패, 통산 3회
제6회 삼성화재배 우승(對 창하오)
2002년 제1회 KT배 우승, 제7회 삼성화재배 우승(2연패)
TV아시아바둑선수권 준우승, 제7기 박카스배 천원전 준우승
2003년 제37기 왕위전 준우승, 제14기 기성전 준우승
2004년 제1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봉황부 결승 진출
바둑의 길은 끝이 없다

조훈현 9단은 프로 바둑기사로서 어느 정도 벌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부인 정미화 씨가 운전기사 ·매니저 ·코디네이터 등 말 그대로 멀티플레이어로 내조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행복한 남자’다.
“성적에 따라 수입에 기복이 심합니다. 세계대회에서 우승할 시절에는 연간 수입이 3억원 내지 5억원에 이를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요즘은 잘나갈 때에도 1억원 이상 벌기 힘들어요.”

아이들을 좋아하는 조 9단은 평소 불우아동을 돕고 싶던 참에 2003년 말 이창호겴?▤?이세돌 9단과 자선 바둑대회를 둔 것을 계기로 국제 아동후원단체인 플랜(Plan)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조 9단은 지난해 여름 부인과 함께 중국에 가서 후원하는 어린이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타고난 바둑 천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두는 바둑에 훈수를 하고 다섯 살 때 부친의 손을 잡고 기원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바둑 외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지만 어떤 때는 프로 기사로서, 직업인으로서 바둑을 두기 싫을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솔직히 힘들고 후배한테 쫓길 때는 바둑판이 보기 싫습니다. 정상을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패자는 비참할 밖에요. 이제 좋은 시절은 가고 이따금 허전할 때도 있지만, 제 나름대로 한국 바둑계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바둑의 세계화에 관심이 많다. 이를 비롯해 바둑문화사업 분야에서 할 일을 찾고 있다.
“두뇌 스포츠로서 바둑을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시키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받으려면 체육회에 가맹해야 하므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바둑에는 도가 튼 그이지만 생활인으로선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조작도 어렵지만 사실 전화 걸 일이 없다”며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고, 운전면허도 없다. 그래서 아내가 힘들어 할 것이라며 미안해 한다. 조 9단은 1남2녀를 두었는데 “다 바둑은 안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독서광이다. 어렸을 적 만화를 시작으로 소설 등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붓글씨 솜씨 또한 수준급으로 자신의 휘호를 담은 도자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 잘나가던 조 9단도 2003년 이후 준우승과 4강, 8강에는 여러 차례 올랐지만 우승 기록이 없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슬럼프가 오래가는 것 같다며 분발을 당부하는 팬들의 글들이 올라 있다. 이에 답장하듯 그는 홈페이지 첫 장에 이렇게 적고 있다.
“바둑의 길은 끝이 없어 보이고 바둑을 대할 때면 으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치곤 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진리의 바다가 앞에서 넘실거리는데 나는 기껏 해변을 거닐며 색다른 조개나 조약돌을 줍고 있는 정도인지도 모릅니다.”

프로 입단, 9단 인정 등 최연소 ·최초 기록과 국내 전관왕, 세계대회 사이클링히트 등 조 9단의 업적은 대부분 40대 이전에 이룬 것들이다.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어선 그는 스승 후지사와 슈코처럼 50?0대에 새로운 바둑 역사를 쓰기 위해 오늘도 혼을 쏟아 바둑 돌을 놓는다. 그가 만난 상대들이 조훈현과 함께 연출한 기보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악보처럼 격정적이었다고 기억하길 바라면서. (본지 편집위원)



조훈현 선배의 후배 사랑, 바둑 사랑 소소회 회장 이정우 5단
소소회는 89년 최규병 9단이 만든 신예 프로기사 단체다. 처음 4, 5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회원이 70명에 이르는 큰 단체로 성장했다. 이창호?유창혁겷零또?박영훈겮北째?등 요즘 활약이 대단한 정상급 기사들이 모두 소소회 회원이다. 조훈현 선배님과 소소회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조 선배님은 97년부터 해마다 5월이면 소소회 회원들을 집으로 초청해 크게 한턱 내신다. 회원들은 모처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기회라서 5월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올해도 5월 28일 오후 3시 평창동 댁 현관을 들어서자 사모님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셨다. 매해 그랬듯 가운데 바둑판을 놓고 기대 반 긴장 반 속에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바야흐로 ‘연구’를 할 차례다. 얼마 전 제1회 마스터즈배에서 우승한 박정상 군이 1번 주자가 됐다. 화제 대국을 복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연구과정에서 여지없이 조 선배님의 천재성이 발휘된다. 다른 기사들이 전혀 보지 못한 점들을 지적할 때면 다들 놀란다. 박정상 5단 역시 그렇게 지적을 많이 당할지 몰랐던지 진땀을 흘렸다.

2번 주자로 이영구 4단이 원성진 6단과 두었던 왕위전 준결승전 바둑을 선보였다. 새로운 점을 많이 알게 된 이영구 4단의 표정은 진지함으로 가득했고, 옆에서 보던 최철한 9단이 “에이 못 먹어도 GO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3번 주자로 한 ·중(韓中) 신인왕전 3번기에서 일격을 당한 박영훈 9단이 등장했다.

박 9단을 보자 조 선배님은 “신인왕 접수하더니 단수도 못보고 말이야. 조작 아니었어”라고 농담을 던졌다. 복기가 갈수록 열기를 더해가면서 바둑판에는 조 선배님의 자상함과 넉넉함이 묻어났다. 연구회가 끝난 뒤 우르르 잔디밭 앞마당으로 나가 뷔페로 저녁 식사를 즐겼다. 뒤풀이로 더러는 카드 놀이를, 몇몇은 맥주를 마셨고, 나머지는 조 선배님의 구수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평창동에서의 5월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004년 제1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봉황부 결승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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