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칼럼] 한국 사회의 ‘뻐꾸기 둥지’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밀로스 포먼 감독·니컬슨 주연·1975년 작)는 정신병원을 무대로 현대 사회 부조리의 한 단면을 잘 들춰낸 명작이다. 관객은 환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다루는 간호사 밀드레드 래치드야말로 격리 수용돼야 할 진짜 정신질환자임을 느끼게 된다. 도대체 누가 정상인이고 누가 비정상인인가. 대체로 병동 안의 갇힌 공간에 웅크린 자들보다 밖의 열린 공간에서 활보하는 환자들이 더 많은 하나의 커다란 뻐꾸기 둥지가 현대 사회인 셈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몹시 ‘현대화’됐다. 정신병자들이 정상인들을 호통치며 설치고 있으니 말이다. 2002년 9월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몇 명이 지난 1월 6일 판문점을 통해 공동 고소장을 보내왔다. 이들은 자기들이 복역한 감옥살이 기간을 모두 합쳐 2074년으로 치고, 그간의 정신적 피해를 제외한 육체적 피해만 따져도 10억 달러에 이른다고 손해배상을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요청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성향으로 미뤄 보면 고소인들에게 유리한 판정이 내려질 수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자극받은 탈북인사 4명이 맞대응하고 나섰다. 1월 9일 납북돼 30년간 강제노역을 당한 대가로 북한이 1인당 1억 달러씩 총 4억 달러를 지급하라는 고소장을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냈다. 피고소인은 김정일과 북한노동당인데, 마약래·화폐위조 등 온갖 불법행위로도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궁핍한 자금사정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판 ‘뻐꾸기 둥지’ 속편 영화의 다음 장면은 홍콩에서 벌어진다. 한국의 농민·노동자·사회단체 운동가 등 1,500여 명이 지난해 12월 12일 홍콩에 도착해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 반대해 처음에는 평화시위를 벌이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국내에서 늘 그랬듯이 폭력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시위대 전원이 연행됐다가 풀려났으나 핵심 11명은 구속됐다. 시위대의 기행(奇行)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구속된 11명을 무죄 석방하지 않을 경우 1,000명의 시위대를 다시 보내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민주노총이 홍콩 사법 당국에 으름장을 놓았다. 그 후 8명은 3차 재판 끝에 공소취하 석방됐으나, 3명은 계속 구속돼 후속 사법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인들이 한 토막의 코미디를 보듯이 즐겼을 만한 대목이다. 코미디의 백미(白眉)는 시위대가 변호사 선임비·여행비·체재비 등 제반비용을 정부에 물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정부가 거절했다고 보도됐지만, 그간 정부가 시민단체들을 어찌 대접해 줬기에 시위대가 그토록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을까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쌀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국내 시위의 충돌 후유증으로 불행하게도 인명 피해가 있었다. 폭력시위에 대한 ‘과잉’ 진압의 책임을 지고 경찰수뇌가 갈렸으나 시위 ‘폭력’의 책임은 아직 가려지지 않고 있다. TV 카메라는 시위대 측 부상을 크게 잡을 뿐 전경들의 부상은 외면했다. ‘인권’은 시위대에만 있는 듯했기에 전경의 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전경들이 명찰을 달고 진압에 나서게 해 신원을 노출시키는 반면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시위대에는 아무 제약도 부과하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맥머피)은 자유를 그리는 환자들을 데리고 병원 탈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탈출할 바깥 세상이 없다. 바깥 세상이 온통 뻐꾸기 둥지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젊은 계층에서 기러기 가족들이 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에게는 자금력·언어장벽·낯선 풍속 등 때문에 해외 이민은 선택 가능한 범위 밖이다. 기업의 경우는 선택의 여지가 넓다. 국내에선 기업이 정부 부처들이 설치해 놓은 규제의 장애물을 헤치고 장사해야 한다. 회사 안에는 강성 노조가 진을 치고 있고, 회사 밖에는 환경 등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우리 사회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폐습이 풍미하는 곳이다. 여기서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하고, 제품을 만들어 팔아 이익을 내고 세금을 내야 한다. 곳곳에서 정부의 도움은 멀리 있고 규제의 족쇄는 가깝다. 정부가 법과 질서를 지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준다면, 세금으로 낸 돈이 제대로 쓰인다는 보장이 있다면, 기업의 의욕이 살아나고 납세 보람도 커질 텐 데도 말이다. 잠재성장 여력에 못 미치는 경제성장 실적은 사회 전체를 삼켜버릴 듯 커버린 뻐꾸기 둥지 탓이다. 뻐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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