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추억] ‘대성그룹 종자돈’ 만든 사업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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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5월 10일 고인의 고희날 가족들이 서울 자택인 돈암장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고 김수근 전 명예회장, 여귀옥 여사.(뒷줄 맨 왼쪽 셋째부터) 3녀 김성주 사장, 둘째 며느리 민영옥씨. 첫째 며느리 차정현씨, 장남 김영대 회장, 차녀 김정주 사장, 장녀 김영주 화백, 삼남 김영훈 회장. |
대성그룹의 성장 불씨 피워 김 명예회장이 연탄 사업을 기반으로 성장시킨 대성그룹은 70년대 초까지 굴지의 10대 그룹이었다. 이런 대성그룹 성장의 불씨를 여 여사가 만들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김 명예회장은 47년 5월 대구 칠성동에 100평짜리 땅을 사 석탄 사업을 시작했다. 맨 처음 한 트럭 분의 석탄을 사 그것을 손으로 돌리는 기계로 찍어내는 작업을 했다. 도쿄 유학을 다녀와 금융조합 이사장까지 지낸 김 명예회장이 100평 땅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 조합 이사장 시절 월급만으로 생활하는 정직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 큰 땅을 살 수 없었다고 했다. “하루는 아버님이 친구한테 사기를 당했어요. 갖고 있던 주식(대동)을 다 날렸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전 재산을 다 잃었다며 몸져누웠어요.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돈을 잃은 건 작은 것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는 건 큰 것을 잃는 것이니 하루빨리 툭툭 털고 일어나시라고 용기를 주셨죠.” 역시 김정주 사장의 회상이다. 김 명예회장이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하루는 여 여사가 교회에서 찬양 연습을 하는데 그곳에서 소사 일을 보던 젊은 부인이 난로에 탄을 피우려 했으나 연기만 났지 불이 붙지 않아 고생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집에 있던 안 쓰는 ‘로스톨(석탄이나 장작을 땔 때 밑에 대는 철판)’을 주기 위해 젊은 부인을 집으로 불렀다. 그는 밥을 차려주며 “남편이 무슨 일을 하기에 젊은 부인이 이 고생을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부인은 “남편은 칠판을 만드는 기술자인데 공장에서 쫓겨나 이 고생을 한다”고 말했다. 여 여사는 젊은 부인이 안쓰러워 남편 공장 옆에 칠판 공장을 차릴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물건만 잔뜩 만들어놓고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뒤 칠판은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 됐다. 인민군이 밥을 짓느라 학교마다 칠판을 다 부수어 불을 때는 데 썼기 때문이었다. “전국에 칠판이 없다고 야단이었어요. 도청에서 우리가 쌓아 놓은 칠판을 거액을 주고 다 사갔죠. 그때 번 돈이 대성그룹의 종자돈이 된 셈이었어요.” 이후 남편인 김 명예회장은 조선연료를 인수하고 완전히 재기했다. 이후 대성그룹은 사업을 확장해 서울과 대구 도시가스를 인수, 에너지 회사로서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덕을 쌓으면 큰 복을 받는다”는 평소 고인의 지론이 회사 성장의 발판이 된 셈이다. ‘대기만성’의 줄임말인 ‘대성’이란 그룹 이름도 고인인 여귀옥 여사가 만든 이름이다. 허세를 부리지 말고 차곡차곡 덕을 쌓아 투명경영을 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실제로 대성은 남의 돈을 끌어다 쓰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절제회 운영하며 절약·검소 실천 고인은 6·25전쟁 직후 낭비·음주·도박의 폐해를 뿌리뽑아 나라의 재건에 이바지하겠다는 일념으로 절제회 운동에 참가했다. 1952년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대구지회 이사로 선임됐고, 서울로 이주한 뒤에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62년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서울연합회 이사로도 선임됐다. 그는 대기업 사장의 부인이었지만 생활은 검소했다. 고인은 평소 스타킹을 기워 신고 다닐 정도였다. 잘 알고 지내던 종로1가에 있는 ‘종각주단’에 가서는 한복을 만들고 남은 비단 쪼가리를 달라고 해서 이불을 만들고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화장품 사는 게 아까워 600원짜리 녹말가루를 바르고 다니기도 했다. 손수 기운 속옷을 자녀들에게 대물려 입히는 건 예사였다. 1만원을 주고 동대문에서 천을 사와 옷과 모자를 만들어 입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만찬장에 갔던 일화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보고 “너무 패션이 멋져서 재일동포 부인인 줄 알았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고인은 생전 자녀들에게 “기업인의 아내로서 함부로 돈을 쓸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어머니에게 저희가 배운 건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닥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으니까요.”
고인의 긍정적 사고를 배운 자녀들 김정주 사장은 85년 서울 서교동의 도시가스 폭발 사건을 떠올렸다. “성주와 영훈, 저는 미국에 유학 중이었죠. 뉴스를 듣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다음날 사시나무 떨 듯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는 목소리 하나 안 바뀌시면서 ‘걱정하지 마라. 냄비를 사도 불량품을 바꿔준다. 서울시 도시가스사업소의 부실 시공이 원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질 거다’라고 하시더군요.” 김 명예회장은 이 사건으로 재판까지 받았지만 법원은 대성의 손을 들어줬다. “나중에 아버님이 저희에게 그러셨어요. 재판장 가기가 떨렸는데 어머님이 얼마나 단호하게 용기를 주던지 힘이 나더라고요.” 고인은 자녀들에게도 평소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 안 했다. 하지만 모두를 수재로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책만 읽느라 반에서 50등을 한 김정주 사장에게도 고인은 칭찬을 했다. “너는 책을 많이 읽으니 꼭 하버드를 갈 거다.” 당시에는 본인에게도 황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정주 사장은 고인의 말대로 이화여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을 갔다. 장남 김영대 회장은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수석 졸업했고, 영민·영훈 회장과 영주 부회장은 서울대 출신, 성주 사장은 미국 앰허스트대 사회학을 전공하고 현재 글로벌 CEO로서 주목받고 있다. “잘 될 거다. 모두 잘 될 거다.” 고인의 ‘칭찬과 긍정의 삶’은 기업인 남편과 자녀들의 삶에 큰 발자국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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