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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태 한은號’의 과제] 부동산 잡고 금융 리더십 강화 필요

[‘이성태 한은號’의 과제] 부동산 잡고 금융 리더십 강화 필요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 경제호(號)의 항해사다. 어두운 밤중에 망망대해에서 별자리를 등대 삼아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한다. 가물가물 보이는 빛이 별빛인지, 멀리 지나가는 배의 불빛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경륜과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통화정책의 키를 넘겨받은 이성태 신임 총재는 가능성과 위험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거시정책의 한 축을 4년 동안 이끌게 됐다. 가계 부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내수 경기가 3년간의 침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회복이 기대되는 시점이어서 그는 박승 전임 총재에 비해 우호적인 여건에서 한은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수출 증가율이 둔화되고 있으나 여전히 물량면에서는 호조다. 모처럼 내수와 수출의 동반 성장이 기대되고, 경제성장률(GDP)도 올해는 잠재성장률(경제가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성장률) 수준인 5% 선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악재도 있다. 원화 강세나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같이 경제의 시동을 꺼뜨릴 수 있다. 이런 위험들은 서서히 금리가 상승하는 것과 맞물려 기업 채산성에 악영향을 주고, 고용과 소비에도 연쇄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와 모처럼 살아나고 있는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박승 전 총재보다는 우호적 여건 한은이 존립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물가 관리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싼 수입품 등의 영향으로 몇 년째 목표 범위 안에서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원재료 가격이 오르고, 내수가 살아나는 것과 결합해 하반기로 갈수록 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은은 지난해 10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콜금리를 0.75%포인트 올려놓은 상태라 다소 여유가 있다. 하지만 물가 오름세 심리는 한번 불 붙으면 기세가 무섭다. 면밀한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무엇보다 부동산 가격 상승 같은 자산 거품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각에서는 한은이 물가 안정에 만족한 채 정작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는 자산 거품은 방치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8·31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최근 강남·분당·여의도·목동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의 집값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다른 지역으로 오름세가 확산되고 있다. 집값 상승은 국민의 주거비용을 높이고 경제 양극화를 심화시켜 서민의 근로의욕 감퇴와 높은 임금인상 요구로 귀결된다. 또 집값 거품이 꺼지는 날에는 담보 대출 부실이 증가하고 금융권의 연쇄타격도 우려된다. 한은은 그동안 특정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통화정책을 동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박승 전임 총재는 “부동산값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면서도 “이 문제는 세제나 금융 쪽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범국가적 대개혁이 있어야 한다”며 통화정책의 한계를 토로했다. 미국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중앙은행이 자산 거품 여부를 알기 어렵고 대응에도 한계가 있다며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자산가격에 대한 통화정책적 대응에는 전문가들 사이에도 합의점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통화를 느슨하게 운영한 것이 부동산 가격 급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 한은 홈페이지에는 “금리를 올려 부동산 가격을 잡아라”는 글이 많이 올라오는 등 집값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국민은 “백약이 무효인 만큼 통화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자산가격 거품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위험의 크기를 고려할 때 마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다”고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금융연구원 하준경 연구위원은 “부동산만 놓고 통화정책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경제의 거품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라며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거품이 생기더라도 꺼져서 부작용이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경지에 이른 통화정책”이라고 말했다.
많은 연구원 있는데도 분석력 미흡 한은이 정책의 전달 통로인 금융시장에서 리더십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금리에 대한 한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만 아직도 시장은 때때로 한은을 믿기보다는 재경부 등 정부 당국자의 ‘입’을 쳐다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은의 독립성과 전문성에 대해 시장이 확고하게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은은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가장 많은 이코노미스트를 가진 연구소이면서도 경제 예측 능력은 다른 연구기관에 비해 탁월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한진 피데스투자증권 전무는 “작은 지표의 변화 등 시그널에 대한 진중한 판단이 모여서 좋은 통화정책이 나오는 것”이라며 “조직이나 시스템, 접근법 등에서 실무진의 이런 ‘내공’을 높일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은이 시장을 선도하려면 시장과 대화 방법을 좀 더 세련되게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화정책은 경제 주체들의 기대를 통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과 시장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효과적이어야 한다. 과거처럼 중앙은행이 비밀주의에 갇혀 있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연금술사처럼 발언을 조절해가며 시장의 기대를 통솔했던 것은 좋은 본보기다. 한은의 독립성은 많이 높아졌으나 여전히 과제는 남아있다. 한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통위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좀 더 높여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이를 위해 재경부·금감위뿐 아니라 관료 출신을 추천해 온 은행연합회 등 사실상 세 명에 이르는 정부 추천도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 금통위 내에 친(親) 한은과 친 정부 인사의 구성이 ‘3대 4’라느니, ‘4대 3’이라느니 하는 힘겨루기를 그만 두고 금융계·학계·노동계·재계의 다양한 시각을 반영할 수 있도록 인적 구성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갈수록 불어나는 한은의 적자 및 통안증권 누증 문제도 해결해야 할 숙제다. 지난해 1조87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한은의 적자는 정책 수행 과정의 비용이란 성격이 있지만 자꾸 커지면 이를 메우느라 재정에 부담을 주고 대외 신인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난해 말 현재 155조원에 이른 통안증권 누증 문제는 한은의 오랜 숙제다. 통안증권은 외환시장 개입에 따라 늘어나는 측면이 있는데 너무 많아지다 보니 한 해 이자로만 6조원이 지출돼 그 자체로 통화 증발 요인이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전임 총재가 추진하다 중도에 포기한 리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가치 변경)도 다시 추진해야 한다. 경기가 어려우니까 논의를 유보하자고 해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액권 발행이나 리디노미네이션 같은 화폐 개혁은 선진국 경제로 가는 길에서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인 만큼 새 총재가 적극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성태 한은號 6대 숙제는… ● 부동산 가격 상승 같은 자산가격 거품 가능성에 주의 기울여야 ● 금융 시장 리더십 강화… 시장이 韓銀 독립성·전문성 믿도록 해야 ● 앨런 그린스펀의 연금술 배워라… 시장과 대화 방법 더 세련되게 ● 親 정부-親 한은파 힘겨루기 그만하고 금통위 전문성 높여야 ● 1조8000억원대 적자, 155조원 이르는 통안증권 누증 문제도 대책 세워야 ● 고액권 발행이나 리디도미네이션(화폐 액면가치 변경) 재추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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