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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숙정문 개방과 요즘 女風

[특별기고] 숙정문 개방과 요즘 女風

지난 4월부터 개방된 숙정문(肅靖門)은 여성과 관계가 깊다는 점에서 여풍이 드센 현 시국과 맞아떨어진다. 숙정문의 본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인데, 작명자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다. 언제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중종실록』에 숙청문과 함께 쓰이다가 점차 숙정문으로 통일되었다. 숙청문뿐만 아니라 사문(四門)과 사소문(四小門)도 신 도읍의 설계자 정도전이 모두 지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대궐의 위치를 둘러싸고 승려 무학과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 백악산(白嶽山:북악산)을 좌청룡, 목멱산(木覓山:남산)을 우청룡으로 삼아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국왕이 동면(東面)하고 정사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정도전이 반대했다. “예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고 정치를 했지, 동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무학이 “내 말을 듣지 않다가는 200년만 지나면 꼭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고 반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00년 후에 발생한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것이지만 『태조실록』이 아니라 후대의 기록들에 나오기 때문에 고증이 필요하다.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게 타살되기 직전까지 불교를 비판하는『불씨잡변』을 쓴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학적 합리주의자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풍수보다 개국이념의 실현이었다. 사문과 사소문, 즉 도성 팔문(八門)의 이름을 모두 유학이라는 개국이념에 따라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문의 이름은 유학의 최고 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지향해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었다. 북대문에는 ‘지(智)’자가 들어갔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숙청문이라고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숙청문 서북쪽에 홍지문(弘智門)을 지음으로써 인의예지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사문 사이 또는 안팎에 소문(小門)들을 두었는데,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불린 동남(東南)의 광희문(光熙門), 서소문(西小門)이라 불린 소북(小北)의 소덕문(昭德門), 동소문(東小門)이라 불린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서북(西北)의 창의문(彰義門) 등도 모두 유학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것이다. 광화문(光化門)·혜화문(惠化門)·돈화문(敦化門)·흥화문(興化門)·선화문(宣化門) 등 化(화)자 이름은 백성을 가르쳐 풍속을 순화한다는 ‘교민화속(敎民化俗)’의 통치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 숙청문만 유교적 이름과 거리가 있다. 숙청(肅淸)은 평란하여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다. 『세종실록』 ‘오례’조에 “흥인문·숭례문·돈의문·숙청문이 사문이 된다”는 기록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숙청문은 사문의 하나였지만 처음부터 사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문을 내면 안 된다고 주장함에 따라 백악산 동령에 위치한 숙청문은 서령에 해당하는 창의문과 함께 폐쇄되었다. 창의문은 수많은 소문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숙청문은 사대문의 하나라는 점에서 함께 비교할 수는 없다. 숙청문 폐쇄에 큰 반발은 없었다. 위치상으로도 산 중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은 동쪽의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으로 나오는 길을 더 많이 택했다. 그 길이 더 빠르고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지 동소문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숙청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숙청문에 적용되는 음양오행상이 문제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진다는 것이 음양오행의 이론이었다. 숙청문은 음방(陰方), 곧 여자의 방위였고, 반대쪽의 숭례문은 양방(陽方), 곧 남자의 방위였다. 풍수학생 최양선이 숙청문과 창의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한 속내는 경복궁의 양팔이란 것보다는 북문이 여자의 방위이기 때문이다. 숙청문을 닫아야 음기가 성하지 못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가뭄 땐 숭례문 닫고 숙정문 열어 그러나 남성 중심의 조선에서도 숙청문을 열어야 할 때가 있었다. 가뭄이 들 때였다. 팔괘로 따지면 남문인 숭례문은 ‘리(離)’ 괘로서 불을 뜻하고, 북문인 숙청문은 ‘감(坎)’괘로서 물을 뜻한다. 따라서 가뭄이 들면 비를 부르기 위해 불이자 남성의 문인 숭례문을 닫고 물이자 여성의 문인 숙청문을 열어야 했다. 세종 10년(1428) 윤4월 23일에 “날이 가문다고 하여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이나 중종 4년(1509) 6월 3일에 “숭례문을 폐쇄하고 숙청문을 열어 저자를 옮기며 북을 치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한재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농경국가 조선에서 가뭄만큼 큰 문제는 없었기에 남성문인 숭례문을 닫고 여성문인 숙청문을 열어야 했다. 가뭄이 극심하면 석척동자에게 석척기우제를 지내게 했는데, 석척은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석척동자가 청의(靑衣)를 입고 도마뱀을 잡아넣은 항아리를 버들가지로 두드리면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주기를 비는 것이다. 이때 숙정문을 열어야 효과가 배가된다 해서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장마가 극심해도 숙정문은 대접을 받았다. 장마가 계속되면 날이 개기를 바라는 기청제(祈晴祭)인 영제(榮祭)를 지낸다. 『일성록』 정조 11년(1787) 5월 29일조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자 사문 모두에 영제를 설행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숙정문도 당연히 제사 대상이었다. 숙정문의 헌관(獻官) 이혜조(李惠祚)가 비를 그만 내려달라고 숙정문에 영제를 지냈다. 반면 가뭄이라고 항상 숙정문을 여는 것은 아니었다. 봄·여름 가뭄에는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지만 가을·겨울의 가뭄에는 그러지 않았다. 여름에는 양기가 강성하기 때문에 음기를 붙잡아 세우고 양기를 억제해도 되지만 가을·겨울에는 음기가 기세를 부리는 때라며 가뭄에도 섣불리 숙정문을 열거나 숭례문을 닫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숙정문은 물의 문이자 여성의 문이었는데 현재의 숙정문 개방은 거센 여풍을 동반하고 있어 의미심장하다. 한명숙 총리나 강금실 서울시장 예비후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나 김영순 송파구청장 후보, 유선목 양천구청장 후보 등 역대 어느 때보다 여풍이 거세다. 거센 여풍이 그간 남성 위주 사회에서 많은 부작용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여인천하
조선에서 여풍이 가장 거셌던 때는 성종(재위 1457~1494) 초엽이었다. 성종 때는 ‘삼전(三殿)’이란 공식 존칭이 있었는데, 세 대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인수왕후(仁粹王后) 한씨(韓氏)·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를 뜻한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는 대왕대비이고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와 덕종(추존)비 인수왕후 한씨는 왕대비였는데, 이들의 기세는 성종의 왕권을 압도했다. 성종이 친형 월산대군이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비들이 지지했기 때문이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왕후는 자신의 큰아들 월산대군을 과감하게 버리고 둘째 성종을 국왕으로 밀었는데 성종의 장인이 권세가 한명회였기 때문이다. 한명회가 성종을 왕으로 추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인수왕후뿐만 아니라 조정의 최고 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도 이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왕후가 마음먹으면 자신을 폐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삼전을 떠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 초에는 자주 삼전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명종(재위 1534~1567) 때도 여풍이 거셌다. 이 여풍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 윤씨(1501~1565)가 주도하는 바람이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다. 사대부들은 중종의 전부인 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인종을 독살하고 친아들 명종을 즉위시켰다는 설과 명종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뺨을 때리거나 매를 드는 일까지 있었다는 설을 유포시켰다. 이러한 설들의 사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정희왕후 윤씨 또한 문정왕후 윤씨 못지않은 권세를 휘둘렀음에도 문정왕후에게만 비난이 집중된 것은 그녀가 조선의 국시와는 달리 불교진흥책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미성년의 명종을 대리해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앞세워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도첩제와 승과를 다시 실시했는데 유교 국가 조선에서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야심은 사대부들의 심한 반발에 부닥쳤다. 그녀는 심지어 세상을 떠나면서 신하들에게 불교를 계속 중흥해 달라고 유언했으나 그녀가 죽자마자 보우가 제주도에 귀양가 맞아 죽은 것처럼 불교는 다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비록 비참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일개 궁녀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왕비에 올랐던 희빈 장씨도 한때 거센 여풍의 주인공이었다. 장옥정의 아버지 장경과 숙부 장현은 역관 출신이었는데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녀는 야당이던 남인들과 손잡고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왕자를 생산함으로써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정권을 수립시켰다. 일개 중인가 서녀(庶女)로 정국을 좌우했던 장씨는 끝내 서인들에게 쫓겨나 사약을 마셔야 했던 비극적 말로를 걸었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 민씨 또한 조선을 여인천하로 만들었던 여풍의 진원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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