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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사랑에 빠진 일본

로봇과 사랑에 빠진 일본

일본은 어딜 가나 로봇 천지다. 로봇은 기업체 사무실에서 방문객들에게 인사하고, 가판대의 잡지 표지에서 행인들을 응시하며, 주말마다 대학에서 열리는 기업체 설명회에서 유망한 학생들을 유혹한다. 도쿄에서는 팔을 흔드는 로봇이 교통을 안내하며, 운전자들은 그 지시에 즐겁게 따른다. 미국인들은 진공청소기에 마이크로칩을 장착하고 그것을 로봇이라고 부른다. 반면 일본인들은 두 발 달린 로봇에 열광하며 인간처럼 생긴 로봇을 만들려 애쓴다. 도쿄에서 24년간 살아온 첨단기술 업체 중역으로 robots-dreams.com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렘 퍼짓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어린이들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속의 인간형 로봇들을 보며 성장한다. 일본어는 살아 움직이는 물체와 그렇지 않은 물체를 구분해 표현한다. 일본인들은 사람을 대하듯 로봇에 관해 얘기하며 로봇과 관계를 맺는다.” 일본의 로봇 문화를 다룬 이 기사를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일본의 로봇 기술자들은 모두 인간 경험의 일부를 복제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대화를 지속하거나 누군가의 눈을 응시하는 일, 혹은 비좁은 아파트의 실내를 걸어다니는 일 같은 지극히 단순한 인간 동작도 기계장치에는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늘날 믿을 만한 인조 인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아직도 과학자들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는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일본이 그런 시도를 중단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노력의 일단을 소개한다.

사야 도쿄이과대학의 안내원 ‘사야’가 만일 로봇이 아니었다면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학부 학생들은 그녀의 블라우스를 활짝 열어 젖혀 브래지어를 드러내고 그녀의 생명력 없는 머리통 속을 들여다 봤다. 이상한 점은 로봇에게도 브래지어를 착용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왜 로봇에게 속옷이 필요할까? “사실 그녀의 가슴에는 스피커가 들어 있다. 브래지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여성의 모습을 상징하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기계공학과 교수인 고바야시 히로시 박사는 설명했다. 그는 (모두 남학생인) 제자들과 함께 사야를 제작한 사람이다. 사야는 수백 개의 구절을 이용해 대학 방문객들과 대화한다. 또 놀람·공포·분노·불쾌·행복·슬픔 등 여섯 종류의 얼굴 표정을 마음대로 짓는다. 그러나 대다수 표정은 복통이 있는 듯한 느낌을 본의 아니게 전달하기도 한다. 고바야시 박사는 대화를 하는 인간형 로봇을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대화 가능한 영역을 제한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는 로봇을 안내원으로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사야는 쉬운 질문들에 답변해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사무실 직원들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다. 사야는 그런 정보를 곧바로 인터넷에서 읽어내린다. “안내원 역할 정도라면 로봇과의 대화도 가능해진다”고 고바야시는 말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사야를 좀 더 정교하게 만드는 연구를 계속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공지능 수준에는 약간 좌절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는 지금 인간의 힘을 증대시켜 주는 로봇형 ‘근육 옷(muscle suit)’의 개발에 주력한다고 밝혔다. “공장의 인간 노동력을 로봇처럼 강인하게 만들려는 목적이다.”

교통 로봇 일본의 도처에서 보이는 이 기계 마네킹은 좀 더 효과적인 인간형 로봇 중 하나다. 한 가지 일(교통 정리)은 매우 잘한다. 대화 상대나 친구가 돼 주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낮은 급료와 부자유스러운 근무시간에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고타로 저명한 도쿄(東京)대의 교수와 학생들은 지난해 세계 박람회를 위해 신장 약 120cm의 소년 로봇 고타로를 제작했다. 고타로는 자세를 안정시키는 케이블의 도움으로 경사로를 걸어 오르고 공을 걷어차며 자전거를 탄다. 이런 동작은 인간 형태의 골격 구조 속에 내장된 120개의 작동장치 덕분에 가능하다. 지난 7월 열린 예비 대학생들을 위한 대학 공개행사 기간 중 고타로는 의자에 묶인 채 안전하게 앉아 있었다. 고타로의 특기는 방문객들의 눈을 마치 감정이라도 있는 듯 응시하고 힘찬 악수를 하는 일이다. 고타로는 인체의 구조와 움직임을 흉내 내려는 10년에 걸친 노력의 일환일 뿐이라고 이나바 마사유키 교수는 말했다. 그는 특히 로봇이 일본인들의 비좁은 가옥에서 효과적인 도우미가 되려면 “인간처럼 보이고 행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로봇과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하길 원한다면 로봇은 얼굴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의 동작을 정확히 흉내 내게 만드는 일은 아직 요원한 과제다.”

혼다의 아시모(ASIMO) 자동차 제조업체인 혼다는 6년 전 아시모를 세계에 내놓았다. 지난해 12월 이 흰색의 우주비행사 로봇은 기능이 향상됐다. 시속 6km로 활기차게 걷고 쟁반을 나르며 손수레를 밀거나 자율적인 사무실 안내원 역할도 할 수 있게 됐다. 이 모든 동작은 구두 명령이나 손짓에 따라 이뤄진다. 이 차세대 로봇 5대 중 1대는 현재 도쿄 교외 와코에 있는 혼다사의 연구 및 국내 판매 사무실에서 방문객을 안내한다. 아시모는 2층 안내 데스크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그들을 대기실의 테이블로 안내해 걸어가며(뽐내는 듯한 걸음새다), 커피 쟁반을 회수하려고 자리를 뜨기도 한다. 아시모는 하루에 최대 10명의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아시모가 미친 듯 날뛰지 않도록 감시하는 조수들도 필요한 듯했다. 혼다 대변인 하타노 유지는 향후 혼다에서 나올 로봇 제품에 관한 질문은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0~30년 앞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회사는 보다 큰 맥락에서 기동성(mobility)에 관심이 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는 LP 플레이어처럼 어느 날 사라질지도 모른다. 로봇은 기동성 시장에서 다음 단계의 주목받는 제품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과정에서 로봇 연구는 초소형 전동기 개발 같은 보다 단기적인 목표 달성에 기여한다. 다른 일본 기업도 동의하는 듯하다. 소니는 지난해 소비자 로봇의 생산 라인을 폐쇄했지만, 도요타는 최근 로봇 연구팀을 만들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인간형 로봇을 개발했다. 로봇 분야의 군비경쟁이 임박했다는 의미일까?

액트로이드(ACTROID) 녹색 옷을 입고 유리 부스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여성 로봇은 지난해 일본 아이치현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장의 세 군데 출입구에 설치됐다. 애니마트로닉스(영화제작 등에서 동물·인간형 로봇을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전자공학 기술) 회사인 고코로와 언어 기술 회사인 어드밴스트 미디어가 공동으로 개발한 로봇이다. 액트로이드는 일어·영어·한국어·중국어를 말하고, 미리 프로그램된 1000개의 답변 메뉴로 500종류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설계됐다. 한 대는 아직도 아이치현의 박람회 부지에 전시돼 있다. 지금은 일본어만 말하는데, 지난 7월 어느 날 아침에는 컨벤션 홀에 운집한 군중의 소음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모는 매우 뛰어나다. 고코로사의 실리콘 고무 피부는 징그러울 정도로 실물 같다. 그렇다고 액트로이드를 인간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몇 가지 특정한 화제(날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박람회의 괴물 마스코트인 모리조의 위치 등)에는 능숙하게 응수한다. 그러나 그 밖의 질문은 화제를 바꾸는 방식으로 회피한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도 대화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질문자에게 비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액트로이드는 세계 최초의 매력적인 로봇이라는 업적으로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후지쓰의 에논(ENON) 일본 지바현에 있는 이언 쇼핑몰의 손님들은 입구에서 특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팔을 회전하듯 돌리며 말을 하는 로봇 ‘에논’ 때문이다. 컴퓨터 제조업체인 후지쓰의 연구실에서 제작한 로봇이다. 파란색 발광소자(LED)의 눈과 부드러운 여성 목소리를 지닌 에논은 기본적으론 움직이는 지도다. 사무실이나 쇼핑센터에서 방문객들에게 인사하고, 자동판매기·공중전화·화장실 같은 시설의 위치를 터치 스크린 방식으로 찾도록 도와준다. 후지쓰 측은 미래의 에논 모델은 사무실들 사이에서 물건을 운반하고 방문객을 안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정지된 상태로 작동한다. 후지쓰의 자동 시스템 실험실 책임자인 모리타 도시히코는 “현재 제작돼 나온 모든 로봇은 일종의 훈련생이라고 본다. 그 로봇들은 일하면서 배우는 중이다”고 말했다. 일본의 다른 대다수 기술 회사와 마찬가지로 후지쓰는 1980년대 초부터 로봇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후지쓰는 우주에서 사용할 로봇과 산업용 기계 팔을 연구하는 업체에 배정되는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90년대 들어 정부 보조금 지원이 인간형 로봇 개발 쪽으로 돌아서자 후지쓰도 연구 방향을 바꿨다. 모리타는 에논이 조만간 회사와 국가를 위해 생산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일본의 인구 노령화를 감안할 때 우리는 인간이 하는 일의 부담을 덜어줄 로봇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제미노이드(GEMINOID) 로봇 연구가 이시구로 히로시가 미국 TV 영화 ‘스타 트랙’의 골수팬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스타 트랙: 다음 세대’의 내용에 따르면 인공두뇌 학자인 누니엔 숭은 자신의 형상을 본뜬 인조인간 ‘데이터’를 만들었다. 이시구로는 스타 트랙의 DVD를 애지중지한다. 그래서 다음 로봇을 개발할 때가 됐을 때 그는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로봇인 제미노이드를 만들었다. 얼마나 닮았는지는 사진을 보라. 이시구로는 오사카대 교수이자 교토 외곽에 있는 유명한 ATR 지능·커뮤니케이션 로봇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그는 아시모·사야·액트로이드 같은 로봇들에 실망해 제미노이드를 창조했다. “인간과 비슷한 외모의 로봇은 인간 같은 대화 능력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로봇들은 기초적인 시험에서도 실패했다”고 그는 말했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과 대화하는 컴퓨터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몇 분 동안은 사람을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봇은 절대로 인간을 속이지 못한다. 그래서 이시구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배제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제미노이드를 원격 조종한다. 제미노이드를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60개의 얼굴 표정을 흉내 내게 한다. 이시구로는 제미노이드의 물리적 습성이 자신의 습성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연구해 더욱 정교하게 만들 계획이다. “제미노이드를 연구하는 목표는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시구로는 자신의 분신인 제미노이드를 쳐다보면 소름이 끼칠 때도 있음을 시인한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는 언제든지 시선을 돌리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로봇은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의 존재다. 결코 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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