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풍요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풍요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서


중년 이후 방황했지만 순리 따르는 창조적인 집필 활동으로 정체성 되찾았다 “요즘 무슨 일 하세요?” 사람들이 물으면 “색다른 일들을…”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진실을 얘기하자면 “아무 일도 안 해요”라고 말했어야 했다. 대학 졸업 이후 처음으로 할 일이 없어졌다. 지금까지는 늘 과도한 일정에 쫓겨왔다. 주로 소년 야구 리그 경기장의 외야석에 앉아 TV 대본을 집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57세인 지금 할 일은 없고 아이들도 없이 혼자 집에서 지낸다. 24년간 일하면서 몇 차례 수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TV 대본 작가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다. 할리우드 속어로 말하자면 (세간의 이목에) 붙잡히지 못하는 처지다. 게다가 7년간 함께 지냈던 반려자는 의논도 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그리고 밤에 잠잘 때는 제일 마지막까지 생각을 독차지했던 아이들은 멀리 대학에 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동안 오전 7시에 일어나 팬케이크를 만들고, 아이들을 학교·축구장·음악 교습소로 태워다 주었으며, 과제물 작성을 도와주고 핼러윈데이에는 호박 등불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조차 없다. 아이들과 애인, 그리고 호구지책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렸고, 어찌해 볼 도리도 전혀 없다. 사진작가 친구인 피터 사이먼에게 이런 형편을 얘기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런, 당신은 돈 문제가 생긴 데다 성생활마저 사라졌구먼. 좋지 않은데.” 정말로 좋지 않다.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잠이 들긴 하지만 오전 2시에 깨고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앞으로 30년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아이들을 길러냈고, 베스트셀러 책들도 써냈으며, 깊이 있는 사랑도 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 지경인가? 나중에 내가 ‘협소 지대(the narrows)’라고 부르게 된 바로 그 과정의 시작이었다.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사람들은 어둠 속을 헤매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이런 질문들에 시달려야 한다. 여생 동안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얼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장 강렬하게 주는 일은 무엇인가? 그동안의 삶이 보람있었다고 느끼게 해줄 만한 일은? 몇 년간의 탐색 끝에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산과 업적을 일궈냈든, 혹은 일궈내지 못했든 그 협소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일을 40대 말에 겪기도 하고, 70대까지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그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세상이, 혹은 자신의 신체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엉덩이가 처지거나 무릎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또는 예전처럼 술을 많이 마시거나 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을 경우 다음날 숙취와 피로감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생활·사고 방식을 바꿔야 하며 변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특성에 따라 협소 지대를 거쳐간다. 우울한 정서에 중독된 사람은 (협소 지대에서) 희망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만사를 장밋빛 시각에서 보는 사람은 그것을 ‘기회’로 인식한다. 내 방식은 태아처럼 웅크린 채 우는 일이었다. 그러곤 일과 사랑에서, 자식과의 관계에서, 모든 일에서 실패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비유적으로 얘기한 두 번째 화살이다. 첫 번째 화살은 어떤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를 의미한다. 두 번째 화살은 이미 발생한 나쁜 일 때문에 자신을 탓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처럼 일종의 박탈감에 시달리는 동시대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엔 돌파구를 찾아 살아남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한 곤경을 집필의 소재로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온 책이 ‘도약! 여생에서 할 일(LEAP! What Will We Do With the Rest of Our Lives)’이다. 톰 헤이든 전 상원의원, 자연의학자 앤드루 웨일 박사, 영성(靈性) 부활운동가 램 대스, 소설가 베이브 무어 캠벨 등 온갖 직종의 유명인사 150여 명을 인터뷰했다.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칼리 사이먼도 접촉했다. 그녀에게 여러 가지 불행한 사건이 겹쳐 일어났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유방암 진단이 내려져 유방절제술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남편과 헤어졌고, 자녀들은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또 음반 회사는 그녀를 포기했다. 사이먼은 이렇게 말했다. “마치 개처럼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서 거부당해 더 이상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집세가 3배로 올라 맨해튼의 아파트도 포기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혼자 보스턴 근처의 마서스 비니어드로 돌아가 딸아이가 어린 시절 오래 사용했던 침실에서 노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녹음한 곡들을 혼자 힘으로 다듬으며 밤 늦도록 작업했다. 단지 스스로를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다. 사이먼은 이렇게 말했다. “19세 때 하던 일을 다시 하며 지냈다. 좋아하는 곡들을 만들면서 말이다. 그 작업만이 내가 쳐다볼 만한 유일한 별이었다.” 사이먼과 대화를 한 지 6개월 뒤, 그녀는 저명한 프로듀서인 리처드 페리의 전화를 받았다. 과거에 그녀는 페리와 함께 “You’re So Vain” 같은 히트곡들을 만든 적이 있었다. 페리는 그녀에게 낭만적인 발라드곡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녹음 작업의 비용은 함께 댔다. 만족할 만한 곡이 완성되자 그것을 컬럼비아 음반사에 팔았다. ‘Moonlight Serenade’라는 제목의 그 곡은 음반 발매 첫 주에 빌보드 차트 7위에 올랐다. 얼마나 감미롭고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인가. 다시 연락했을 때 칼리는 이렇게 말했다. “성공의 사다리를 품위있게 걸어 내려가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이런 이미지가 좋아요. 내 사회적 크기를 점차 줄여가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이미지 말이에요.” 정말 눈부신 이미지였다. 늘씬하고 나긋나긋하며 매력적인 여성이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모습. 그러나 나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이미지다. 내 눈은 습관적으로 위쪽을 바라본다. 어깨는 앞으로 달려나갈 듯한 기세이고, 내 성향은 하강보다는 상승을 추구하는 쪽이다. 그런 성향을 거꾸로 뒤바꾸는 일은 마치 기차를 돌려놓는 일처럼 느껴진다. 존경하던 사람들은 순응하는 법을 배우라고 충고해 주었다. 나 같은 연령의 인생 단계에서는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기보다는 남의 말을 들어주고 만사를 순리에 맡기는 태도가 더 낫다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순응이라는 개념이 무척 싫었다. 마치 싸움에서 패해 포기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협소 지대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온 수십 명의 사람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제각각 모종의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칼리 사이먼의 경우는 계단을 우아하게 걸어 내려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톰 헤이든의 경우는 “경력 쌓기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렸다.” 캘리포니아주 의회에서 18년간 의정활동을 해온 헤이든은 선거에서 아들뻘 되는 경쟁자에게 패한 뒤 심장마비까지 일으켜 5중의 심장 우회수술을 받았다. 그는 공직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생활의 초점을 독서와 집필, 강연과 강의 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런 변화에 마음의 갈등을 느끼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시카고에 사는 친구 한 명은 30년 동안 종사해온 세금 전문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비영리 음악 회사를 설립했다. 내 기분이 밑바닥을 쳤을 때, 이사를 가야겠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곳에는 나를 묶어둘 아무런 밧줄(일,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도 없었다. 직관을 믿고 콜로라도주 볼더로 이사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다. 콜로라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말기 환자용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간병하기도 했으며, 인도에 가서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고교 교사인 배리 마이어스 루이스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던진 질문 때문에 생각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이틀 뒤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주저 없이 “글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두 달에 걸쳐 한 작품을 완성한 뒤 어느 유명 잡지사에 보냈다. 매우 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잡지사 측 편집자는 전화를 걸어 그 원고를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확한 이유는 설명해 주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우리 잡지사에 다른 글을 보내봤자 소용이 없을 겁니다.” 인적이 끊긴 오솔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다. 지독한 모멸감을 느꼈다. 잡지사 측은 내 작품을 폐기처분했을 뿐만 아니라 내 면전에서 현관문의 빗장을 걸어잠근 꼴이었다. 이제 끝장났다는 얘길까?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 작품의 재료를 취재하고 집필하면서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그 작품이 훌륭하다는 사실은 내가 안다. 지금 글쓰기를 계속하는 진정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요즘은 머리가 잘 돌아가고 이야기도 술술 풀린다. 영국의 원로작가 존 파울스가 ‘신성한 숲’이라고 묘사한 경지에 들어서면 시간 감각마저 실종된다. 내 작품 속 인물들이 예상치도 못한 얘기들을 하기 시작하고, 놀랄 정도로 적확한 표현의 문장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경지다. 창조적인 작업은 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어왔다. 가장 강력한 재능을 활용해 세상에 공헌한다는 느낌이다. 중요한 점은 어떤 목적 때문에 창조하기보다는 즐거움을 위해 도전의식을 느끼며 창조하는 자세다. 인정하기 시작했다(그것은 매일 벌이는 투쟁이었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든, 어떤 전국적인 잡지에 기고하는 글이든, 혹은 지역사회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원봉사를 하든, 어느 방송사에서 유급 작가로 일하든, 공기처럼 필요한 일은 창조적인 작업 그 자체라는 사실을. 순응이라는 개념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게 됐다. 순응이란 포기하거나 희생물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과도기에 들어섰으며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친구 한 명이 연인을 맞이하거나 어린 아기를 포옹하듯 두 팔을 벌린 채 설명했듯이, 순응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스스로를 열어젖히는 행위”다. 협소 지대를 뚫고 가는 길이 하나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햇빛과 공기가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말해주겠다. 물론 내게는 명확했던 부분이 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화를 나눈 사람들 중에는 우간다에 병원을 신축 중인 남자, 50세에 수녀가 된 여성, 61세에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있었다. 자기 가족들 부근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점에서 나는 지금 협소 지대에 막 발을 들여놓던 시절과 동일한 상황에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혹은 어떤 사람들이 내 동반자가 되어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순리에 어긋나게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앞날에 거는 기대감은 있다. 그동안의 탐색 결과, 앞길에 펼쳐질 대지는 결코 메마른 땅이 아니라 풍요로우면서도 예측 불능한 곳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불확실성과 절반의 사랑에 빠져 있다. [필자의 저서 ‘도약! 여생에서 할 일(LEAP! What Will We Do With the Rest of Our Lives?)’에서 발췌했다. 랜덤 하우스 출간 예정]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정비사업 고삐 죄는 삼성물산…그 이유는?

2‘저가’에 올라탄 LCC 승객들...“불안감 안고 떠난다”

3‘면발로 그린 32년’ 면사랑, 이제 음식 넘어 문화 만든다

4정세장 면사랑 대표, ‘한 그릇의 완성’을 위한 길

5시공능력 평가 11년째 1위 자리 고수 중인 삼성물산

6견고한 ‘악순환 고리’... ‘LCC 치킨 게임’의 부작용

7KB증권 'IPO 수장' 유승창 본부장,…"올해도 1위 목표"

8사고에도 ‘흔들림’ 없는 LCC...계속되는 ‘불안한’ 이륙

9배우 김새론, 서울 성동구 자택서 사망…향년 25세

실시간 뉴스

1정비사업 고삐 죄는 삼성물산…그 이유는?

2‘저가’에 올라탄 LCC 승객들...“불안감 안고 떠난다”

3‘면발로 그린 32년’ 면사랑, 이제 음식 넘어 문화 만든다

4정세장 면사랑 대표, ‘한 그릇의 완성’을 위한 길

5시공능력 평가 11년째 1위 자리 고수 중인 삼성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