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삼국의 역사를 품고 흐르는 장강(長江) | |
성도 무후사는 삼국지가 축약돼 있는 곳이다. 촉한(蜀漢)을 창건한 유비와 그의 충실한 승상 제갈공명의 사당이 같이 모셔져 있다. 무후사에 서면 공명이 촉나라의 장래를 걱정해 한시도 편치 못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경영학’을 쓰면서 두 차례에 걸쳐 삼국지 유적 답사를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여러 역사적인 장소들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첫 번째는 장강을 따라 위 · 촉 · 오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인 전쟁터와 유적들을 둘러봤다. 중경(重慶 · 옛 강주)에서 유람선을 타고 장강을 내려가다 언덕 위에 있는 백제성(白帝城)을 멀리서 바라봤다. 유비가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참패한 후 회한과 울분 속에 운명한 곳이다. 마침 탄 배가 가장 좋은 5성급이라 서양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삼국지나 유비에 관심이 없는지 백제성을 그냥 지나친다. 아쉬웠다. 장강의 양쪽엔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이고 중간 중간엔 강폭이 좁아져 아슬아슬한 협곡을 이룬다. 이른바 삼협(三峽)이다. 배를 타고 사흘쯤 내려오다 세기의 프로젝트인 삼협댐을 지나면 의창(宜昌)에 이른다. 거기서 상륙해 가까이에 있는 당양(當陽)의 관우 묘와 장판파(長坂坡), 형주성(荊州城) · 양번(襄樊) ·신야(新野) ·남양(南陽) · 고융중(古隆中) 등을 둘러봤다. 삼국지의 유적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 일대가 그대로 삼국지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이틀 동안 서둘러 둘러보고 무한(武漢)으로 갔다. 근처엔 유명한 적벽대전 터와 오림(烏林), 화용도(華容道)가 있다.
 | ▶ 성도(成都)의 무후사 입구 | |
삼국지의 진짜 유물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삼국지 시대로부터 1,800여 년이나 지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황하 같이 큰 강도 흐름과 크기가 달라졌다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이나 사당 같은 것은 대부분 명 · 청나라 때 중건한 것인데 그나마도 1960년대 문화혁명 때 많이 파괴됐다. 근년에 들어 외국 관광객들이 많아지고 중국에서도 TV 연속극의 영향으로 관심이 높아지자 부지런히 기념관 등을 만들고 있으나 아직은 조잡한 수준이다. 장강 남쪽 언덕엔 적벽대전 기념관과 여러 복원물이 있어 그때의 모습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무한에서 밤기차를 타면 그 다음날 아침 남경(옛 건업)에 도착한다. 남경엔 손권이 쌓았다는 석두성(石頭城)과 손권의 묘가 있다. 남경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가면 진강(鎭江)에 닿는데 바로 오나라의 옛 도읍지인 경구(京口)다. 진강 북고산(北固山) 공원엔 유비가 손권의 누이동생과 혼례식을 올렸다는 감로사(甘露寺)가 있다. 그 결혼은 나이 차가 30년이나 나는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다. 손권은 날로 커가는 유비를 잡아두기 위해 누이동생을 줬고 유비는 힘이 없어 손권에게 많이 기대야 했다. 유비는 장가든 후 처남이 된 손권을 찾아가 담판 끝에 형주 땅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유비 부부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는데 유비가 익주 땅에 쳐들어갔을 때 손권이 군사를 보내 누이를 데려와 버린다. 감로사 경내엔 제강정(祭江亭)이란 조그만 정자가 있다. 친정에서 지내던 손권의 누이가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통곡하며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을 추모해 지었다고 한다. 후세사람들이 정략결혼의 뒤끝을 애틋하고 아름답게 만든 것이다. 남경엔 여러 박물관이 아주 잘 돼 있어 하루쯤 둘러 볼 만하다. 두 번째 삼국지 기행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 시작해 제갈공명의 북벌 루트를 따라갔다가 중원의 조조 근거지까지 둘러보았다. 성도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길이 험하다. 강유(江油) · 검각(劍閣) · 광원(廣元)을 거쳐 좁고 가파른 고촉잔도를 지나면 정군산과 한중(漢中)이 나온다. 한중에서 더 북쪽으로 가면 3,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줄을 잇는데, 당시 군사들이 군장비와 보급품을 이끌고 넘으려면 무척 고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준령들을 넘어야 옛 위나라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사이에 진창(陳倉)과 오장원(五丈原) 등 옛 격전 터가 있다. 제갈공명이 마지막까지 애를 쓰다 피를 쏟고 쓰러진 곳이다. 오장원을 지나 서쪽을 향해 자동차로 3시간쯤 가면 옛날 위나라의 전선 사령부가 있던 서안(西安 · 옛 장안)이 나온다. 한참 뒤에 쌓은 것이지만 도시를 둘러싼 성벽들이 무척 웅장하다. 장안에서 기차로 8시간쯤 가면 옛 도읍지 낙양(洛陽)이 있고 거기서 자동차로 다시 5시간쯤 가야 조조가 나라를 일으킨 허창(許昌)이 나온다. 조조와 명의(名醫) 화타의 고향인 박주(州)는 허창의 동남쪽에 있다. 조조와 원소가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격전을 벌였던 관도(官渡)는 박주에서 북쪽으로 3시간 거리다. 근처에 정주국제공항이 있어 편리하다. 삼국지 여행을 해보면 중국 땅이 정말 광대하고 기기묘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동차나 기차는 탔다 하면 5 ·6 시간은 예사고 유적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다. 항공로는 아직 정비돼 있지 않아 이용하기가 어렵다. 최근 들어 길이 많이 좋아지고 교통망도 정비되고 있으나 기차와 자동차에 주로 의존해야 하는 삼국지 여행은 여전히 불편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 넓은 땅과 하늘을 찌를 듯한 태산준령, 바다 같은 강들, 각기 다른 기후와 풍토를 보면 시간과 공간개념이 유장(悠長)해진다. 이 광대무변한 중국 땅을 무대로 그 많은 영웅호걸이 용호상박(龍虎相搏)하며 명멸(明滅)을 거듭했을 것이다. 실제 삼국지 기행을 해보면 느끼는 것이 많다. 현장감이 와 닿는 것은 물론이고 그 큰 스케일에 새삼 놀라게 된다. 또 소설 <삼국지> 의 오묘한 깊이에 다시 한 번 빠져들고 삼국지가 사실 7할, 허구 3할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백발 삼천척(白髮 三千尺) 같은 특유의 과장 표현도, 또 재미있게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사실을 밉지 않게 바꿔치기한 것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삼국지> 는 한 사람에 의해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고 쌓인 세상의 지혜와 민심의 결정품(結晶品)임을 알 수 있다. 시대의 요구와 만백성의 바람이 삼국지에 농축돼 있는 것이다. 눈 밝고 겸손한 사람만이 그 지혜의 샘물을 마실 수 있다. 삼국지 기행은 사천성 성도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다. 성도 무후사(武候祠)에서 삼국지의 줄거리를 익힌 다음 동쪽 방향으로 장강을 따라가면서 남경까지 가도 좋고 북쪽으로 제갈공명의 북벌코스를 타고 서안까지 가도 좋다. 둘 다 1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빠듯한 일정이다. 그런 여행상품이 아직 없기 때문에 단체를 이뤄 특별주문을 해야 한다. 인천에서 성도까지 비행기로 3시간이 걸린다. 직항편이 있어 편리하다. 맨 처음 찾는 곳이 성도 중심가에 있는 무후사다. 촉한(蜀漢)을 창건한 유비와 그의 충실한 승상 제갈공명의 사당이 같이 모셔져 있다. 유비의 묘인 혜능(惠陵)도 있다. 정문 입구엔 유비의 정식 칭호인 한소열제(漢昭烈帝)의 묘란 간판이 걸려 있지만 보통 무후사라 불린다. 제갈공명이 살았을 땐 무향후(武鄕候), 죽은 뒤엔 충무후(忠武侯)란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 ▶ 무후사에 있는 공명 상 | |
중국에서 제갈공명의 인기는 매우 높다. 어찌 보면 주인인 유비보다도 더 하다. 공명이 한 번 거쳐 간 자리엔 사당 등을 지어 그 인연을 자랑한다. 공명의 인기에 비견되는 인물은 관우밖에 없다. 전국 곳곳에 사당이 있고 황제보다 높은 신(神)으로 대접받는다. 소설 <삼국지> 엔 3할의 허구가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공명과 관우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무후사는 넓이가 약 1만2,000평으로 앞쪽에 유비의 사당이 있고 바로 뒤 한 계단 낮은 곳에 조금 작은 공명의 사당이 붙어 있다. 황제와 승상의 신분 차이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영명한 군주와 좋은 신하가 힘을 합쳐 역사에 남을 큰일을 이룩했다’는 내용의 편액이 걸려 있다.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훌륭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힘을 모아 길이 남을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촉한은 유비와 공명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동 경영을 한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깝다. 유비의 넓은 도량과 관대함, 공명의 지혜와 지극정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공명은 27세 때 유비를 만나 유비가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같이 일했고 뒤이어 그 아들 유선(劉禪)을 10년간 모시다가 전장에서 병사했다. 그 애절한 충정과 장렬한 죽음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그토록 울리나 보다. 무후사란 이름부터 그렇지만 중국에선 공명을 서로 모시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다. 우선 공명이 유비를 만나기 전 10여 년간 살았던 은거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치열하다. 호북성의 고융중과 호남성의 남양이 대표적이다.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를 보면 ‘남양 땅에서 밭 갈고 사는데 선주(先主)가 세 번이나 찾아오셔서…’하는 대목이 있다. 남양 측은 그 남양이 지금의 남양이라고 주장하고 고융중 측은 그때는 융중도 남양군에 속했다며 여러 정황으로 보아 고융중이 틀림없다고 맞서고 있다. 두 군데 다 옛날 공명이 기거할 때 있었다는 건물들을 고색창연하게 복원해 놓았다. 또 공명을 칭송하고 기린 후대 시인 묵객들의 시비(詩碑)도 총총히 서 있다. 삼국지 기행 때 두 곳 다 둘러봤는데 규모는 남양 쪽이 더 웅장하고 그윽한 느낌은 고융중 쪽이었다. 경쟁이 워낙 결사적이어서 학계나 정부나 개입을 꺼리고 있다. 체면과 관광 수입 때문에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인데 역시 중국답게 유장한 해결책을 찾았다. 즉 결론을 내지 않고 둘 다 맞는 방향으로 같이 살게 만든 것이다. 강릉(江陵 · 옛 형주성)에서 자동차로 3시간쯤 북쪽으로 가면 양번(襄樊)시가 나온다. 삼국시대의 격전지 번성(樊城)과 양양(襄陽) 사이에 있는 한수(漢水)에 다리를 놓아 두 도시를 합친 것이다. 양양에서 고융중은 서쪽으로 한 시간(자동차) 거리에 있고 남양은 북쪽으로 3시간 거리에 있으므로 같이 둘러보고 스스로 결론을 내는 게 좋겠다. 무후사 입구엔 돌에 새겨 놓은 출사표가 눈길을 끈다. 송나라의 비극적 장군 악비(岳飛)가 공명의 출사표를 보고 베껴 쓴 것인데 글씨가 힘차고 웅장하다. 악비는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다. 주전파인 악비는 북쪽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마침 승기를 잡았는데 화친파의 공작 때문에 중도에 돌아온 바가 있어 같은 일을 당한 공명을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 ▶ 무후사의 유비 상. | |
사당에 모셔진 금빛의 유비 상은 인자하고 관대한 모습 그대로다.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시작해 출발해 평생 고생하다 나이 47세에 공명을 만나 겨우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마침내 촉한을 창업해 황제가 되기까지 간난의 역정이 배어 있다. 유비의 좌상 오른쪽엔 손자 유심(劉諶)이 있고 왼쪽은 비어 있다. 처음엔 아들인 후주(後主) 유선 상이 있었으나 나라를 망친 임금이라 해 치워버렸다 한다. 옛 촉한 땅인 사천성에서 유선의 평판은 좋지 않다. 유선의 아들인 유심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안 받아들여지자 할아버지인 유비의 묘 앞에서 자결했다 하여 이토록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무후사엔 많은 촉신(蜀臣)의 좌상(坐像)이 있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더하고 빼기를 거듭한 끝에 남은 것이 오늘의 인물들이다. 역사 재평가가 계속 이뤄졌던 것이다. 유비의 사당 바로 앞 오른쪽엔 문신(文臣) 코너, 왼쪽엔 무신(武臣) 코너가 있어 각각 14명씩 모셔져 있다. 문신의 앞머리엔 방통(龐統), 무신은 조자룡(趙子龍)이 앉아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친숙한 인물들과는 많이 다르다. 뛰어난 참모 법정(法正)과 용장 위연(魏延)이 빠져 있는 대신 이름 없는 신하들이 많이 끼어 있다. 유비와 촉한에 한결같이 충성을 했는가 여부가 기준이 됐다 한다. 법정과 위연은 한번 주인을 바꿨다고 빠졌고 이릉대전에서 용감하게 전사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다. 관우와 장비는 무신으로 분류하지 않고 유비의 좌우에 별도 방을 만들어 모셨다. 당시 촉나라에 있어서 두 사람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 다 유비의 신하이기도 했지만 젊을 때부터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한 형제 같은 사이였다. 관우가 오나라 손권의 기습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유비가 이성을 잃고 펄펄 뛰며 전쟁까지 일으킨 정황이 짐작된다. 여러 사람이 대의명분을 들어 말렸지만 평소 유비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그때 공명의 입장은 매우 곤란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칙적으론 말려야 하지만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너무 잘 아는 공명으로선 강하게 나서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속으로 끙끙 앓다가 유비가 참패한 다음 “법정이 살아 있었으면 전쟁을 말렸든지 혹은 그토록 참패하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하며 새삼 아쉬워 했다.
 | ▶ 무후사 부근 남하(南河)에 있는 만리교. | |
무후사에서 공명은 관우나 장비보다는 더 높게 모셔져 있다. 아예 따로 사당을 차려 촉한의 공동경영자로서 대우를 깍듯이 한 것이다. ‘명성이 우주에 걸쳐 있다’는 뜻의 편액이 걸렸고 금빛 옷을 입고 윤건을 쓴 공명이 깃털 부채를 들고 단아하게 앉아 있다. 공명의 좌우엔 아들 첨(瞻)과 손자 상(尙)이 시립하고 있는데 둘 다 촉나라가 망할 때 항복을 거부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무후사에 있는 인물 조각들은 대개 청나라 때 만든 것이다. 가장 안쪽에 있는 유비의 묘는 그냥 조그만 동산에 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다. 주위엔 붉은 색의 돌담이 둘러져 있다. 황제의 능치고는 규모가 작은 편으로 부장품도 적을 것이라 해 도굴을 면했다 한다. 무후사 한쪽에 삼국문화 진열관이 있다. 삼국시대의 여러 문물과 무기들을 진열해 놨다. 그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삼국의 국세 비교표다. 위나라는 443만 인구에 병력이 20만~50만 명, 오나라는 230만~240만 인구에 병력 15만~20만 명인데 비해 촉나라는 90만~94만 인구에 병력이 8만~12만 명밖에 안 된다. 당시 촉한의 어려운 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공명이 촉나라의 장래를 걱정해 한시도 편치 못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촉한의 선택은 오나라와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면서 강적 위나라에 대항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공명은 오나라와의 우호관계에 특히 신경을 썼다. 무후사 부근 남하(南河)에 걸려 있는 만리교(萬里橋)가 촉 · 오 외교 관계의 상징이다. 두 나라를 오가는 외교사절을 바로 이 만리교에서 배웅했다 하는데 오나라까지의 만리 길도 바로 여기서 시작이구나 하는 뜻으로 그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 있는 만리교는 최근에 옮겨 만든 것으로 노남문대교(老南門大橋)로도 불린다. 성도엔 옛날 궁궐 터도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찾기가 어렵다. 성도 무후사엔 삼국지가 축약돼 있고 그 중에서도 공명의 노심초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삼국지> 삼국지>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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