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 M&A‘당할 자가 없다’
금융기관 M&A‘당할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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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다간 한국 금융시장은 일산 호수공원처럼 변할 수도 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연약한 토종 물고기라면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배스다. 배스의 대항마가 없는 호수공원의 생태계가 어떻게 변했는가. 계획개발(자본시장통합법 등 금융제도 개선)로 호수공원(국내 금융시장)은 만인이 찾는 국내 대표 공원(동북아 금융허브)이 됐지만 호수 생태계는 배스 천국이 돼 버렸다.” 올해 초 퇴임한 한 증권사 CEO는 최근 외국자본의 공격적인 국내 금융기관 M&A에 대해 이렇게 위기감을 표현했다. 그는 “여물지도 않은 곡식을 수출하려 한다”며 국내 금융기관들의 해외 진출과 이를 독려하는 정부 당국의 행태도 꼬집었다. 힘을 키워도 ‘수성’이 힘든 판국에 ‘공격’부터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들어 국내 금융기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해외 진출에 나서고 있다. 은행·증권·보험은 물론 저축은행 등 소형 서민금융기관들마저 해외 진출에 목을 매고 있는 형국이다. 심지어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시름에 빠진 농심을 달래야 할 농협마저 해외 진출을 서두를 정도다. 정부 당국도 금융기관들의 해외 진출을 ‘강추’하고 있다. 김용덕 금융감독위원장은 최근 금융기관장들과의 만남에서 외형 확대보다는 해외 진출을 통한 글로벌 플레이어가 될 것을 수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국내 금융기관들과 정부 당국이 ‘해외 찬가’를 부르는 사이 외국자본들은 M&A를 통해 국내 금융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가고 있다. 올 들어 성사된 주요 금융기관 M&A는 총 5건. 교보자동차보험, 대한투신운용, 맥쿼리IMM자산운용, 랜드마크자산운용, KGI증권 등이다. 이 중 KGI증권을 제외한 4곳은 모두 외국자본에 넘어갔다.
커지는 외국자본의 시장지배력 외국자본들의 M&A를 통한 시장 진출이 늘어나면서 은행·증권·보험·자산운용 등 금융권역별 시장판도는 급변하고 있다. 한국 금융시장에서 외국자본의 시장지배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한정태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과거와 달리 최근 시장에 진출하는 외국자본들은 현지화로 영토 확장을 노리는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대부분”이라며 “M&A로 영업시너지를 극대화하면서 토종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산운용업계는 이미 UBS, 골드먼삭스, JP모건 등 글로벌 금융기관들의 각축장이 돼 버렸다. 국내에 등록된 50개 자산운용사 중 15개사가 외국계(지분 50% 이상 보유)다. 8월 말 현재 이들 외국계 자산운용사의 시장점유율은 25%가 넘는 상태. 2001년 시장점유율이 4%대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6년여 동안 매년 100% 이상의 신장률을 보인 셈이다. 박현철 메리츠증권 펀드매니저는 “국내 펀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국내 진출을 고려하는 글로벌 자산운용사가 늘고 있다”며 “외국계로서는 가장 손쉽고 안정적인 시장진출 방법이 현지 자산운용사를 인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M&A는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보험시장도 마찬가지다. 현재 국내에서 영업 중인 외국계 생보사는 AIG, 메트라이프, PCA 등 9개.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이들 9개사의 시장점유율은 처음으로 20%를 돌파했다. 수입보험료는 보험가입자가 낸 총 보험료의 합계로 제조업으로 따지면 매출액에 해당된다. 수입보험료 액수도 2000회계연도 3조원에서 2006회계연도 12조7000억원으로 4배 이상 늘었다. 앞으로도 외국계 생보사의 시장점유율은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회사마다 영토 확장을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데다 국내 중소형 생보사를 대상으로 한 추가 M&A도 적극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해보험 시장에서도 외국계의 활약이 눈에 띈다. 지난 5월 프랑스 최대 보험사인 악사가 교보자동차보험을 인수해 새롭게 출범시킨 교보악사자동차보험이 그 주인공. 이 회사는 최근 1000억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키로 한 데 이어 광고, 홍보 등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교보악사자동차보험은 공격적인 영업을 통해 3년 내 시장점유율을 8%대까지 끌어올려 손보업계 빅5에 진입한다는 포부다. 심규섭 연구원은 “매년 10~15%가량 성장하고 있는 국내 보험시장은 외국계에 매력적인 시장”이라며 “중소형 보험사들을 중심으로 M&A설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나마 토종들의 텃밭이었던 은행권도 세계 2위 금융그룹인 HSBC의 외환은행 인수 합의를 계기로 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시중은행들은 벌써부터 HSBC와의 정면승부를 걱정하고 있다. 과거 씨티은행의 한미은행 인수, 스탠터드차터드의 제일은행 인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외환은행은 자산 규모 면에서 국내 5위 은행으로 HSBC와 합병하면 단숨에 4위까지도 올라설 수 있다.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HSBC와 외환은행이 합병하면 자산규모는 100조원을 넘어 4위인 하나은행과 20조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20조원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경우 1년 안에도 역전시킬 수 있는 미미한 차이”라고 말했다. 금융전문가 사이에서는 HSBC와 외환은행의 합병시너지 여하에 따라 빅3 진입도 가능하다는 성급한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85개국에 1만여 개의 점포를 둔 HSBC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자금 조달력, 영업 노하우 등이 외환은행의 잠재력과 결합할 경우 강력한 시너지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외환은행은 자산 규모 면에서 선두그룹과 차이가 크지만 인력수준이나 생산성, 수익성 등에서는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지난 2분기 실적에서 외환은행은 국민은행, 하나은행을 제치고 4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한정태 연구원은 “HSBC가 외환은행 인수에 성공한다면 국내 시중은행들은 수성을 위해 대형화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토종 은행과 외국계 은행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새로운 M&A도 가능해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심규선 연구원도 “민영화를 앞둔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도 매물로 나올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은행권이 토종들의 텃밭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금산분리는 폐지나 완화해야” 외국자본의 국내 금융기관 인수가 잇따르고, 한국 내 시장지배력도 커지면서 금융권에서는 금산분리를 폐지 또는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즉 산업자본을 대항마로 금융시장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다. 금융권 관계자는 “외환은행 매각을 법원 판결 전에는 승인할 수 없다는 금융 당국의 입장이 사실상 국내 은행의 외환은행 인수 기회를 막았다”며 “금산분리 정책은 앞으로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의 민영화 과정에서 또다시 외국자본이 주인이 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 내에서도 금산분리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감독당국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국민은행을 비롯한 주요 은행들의 외국인 지분 비중이 점점 늘고 있는 상태에서 국내자본만 금산분리로 막는 것은 사실상 역차별이고, 외국자본에만 득이 될 수 있다”며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했던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금산분리를 폐지 또는 완화하면 금융기관이 산업자본의 사금고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국내 기업과 금융회사들은 외환위기 이후 투명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도 많이 선진화됐다”며 “과거의 폐해에 집착해 기업과 금융회사가 공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용어설명 윔블던 효과 윔블던 효과란 ‘윔블던 테니스 선수권대회’에서 외국 선수들이 우승해 상금과 명예 등 실속을 챙기는 반면 주최국인 영국은 대회만 개최하고 박수치는 역할에 머물고 있음을 빗대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 용어가 경제와 연관을 맺은 것은 1986년 영국이 국제 금융거래의 중심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은행 구조조정과 함께 대규모 규제 완화 조치를 취하면서부터다. 이 과정에서 자생력이 부족한 영국 금융기관들은 외국 금융기관에 합병됐고, 그에 따라 외국의 대형 금융사들이 영국에 본격 진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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