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마도 춘추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 두 라이벌의 대립이 아닌가 싶다. 오죽하면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탔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성어까지 생겨났겠나. 이 말은 원래 『손자(孫子)』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것으로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만 그들이 한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나면 좌우의 손이 함께 협력하듯 서로 돕는다”는 손자의 말에서 비롯됐다. 오나라는 오늘날 위치로 볼 때 중국 남동부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를 도읍으로 일어선 나라며, 월나라는 보다 남쪽인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남쪽 소흥 부근을 근거지로 삼았던 나라였다. 중심에서는 밀려나 있는 변방 국가였으며 당시 중원의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야만국이라 멸시를 받던 나라들이다. 그럼에도 춘추 5패 중에서 가장 후세의 관심을 끈다. 『사기』 등 기록에 따르면 오 왕은 주 왕조의 후예고, 월 왕은 하 왕조의 후예다. 즉 오나라의 지배계층은 중원에서 흘러 들어온 왕족이며, 월나라의 지배계층은 지방 토호 출신인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사이가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시작은 오 왕 합려로 시작한다. 합려는 역시 5패 중 한 나라로 오월보다 훨씬 강대국이었던 초나라에서 온 망명객, 오자서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오자서는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를 합려에게 추천, 중용케 해 오나라의 힘을 착실히 키운다. 어느 정도 힘을 쌓은 뒤 오자서는 합려를 부추겨 초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형의 목숨을 빼앗은 초나라 평왕에 대한 복수였다.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기원전 506년 합려는 드디어 초나라를 정벌한다. 당시 초나라는 평왕의 아들 소왕이 왕위에 있었는데 소왕은 놀라 도망쳐 버리고 오나라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수도 영을 점령한다.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는 이때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낸 뒤 채찍질을 했다고 전한다. 아무튼 당시 강대국 초나라를 점령함으로써 오나라는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힘을 길러온(사실 이 말은 한참 뒤에 쓰인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말로 유비가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꾸준히 힘을 길렀던 것을 말한다) 월나라가 오나라의 대군이 초나라 전선으로 이동한 틈을 타 오나라를 공격했다. 게다가 진나라가 초나라를 도와 원군을 파견하니 합려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합려는 기원전 496년 다시 월을 공격했다. 하지만 패퇴하고 말았고, 이때 입은 부상이 악화돼 합려는 목숨을 잃고 만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왕위에 오른 뒤 절치부심, 복수의 칼날을 간다. 월 왕 구천은 여세를 몰아 오나라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이려 했다. 합려에게 오자서라는 명신이 있었다면 구천에게는 범려라는 현신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범려를 꺼내놓기 위함이었다. 범려는 역부족이라고 구천을 말린다. 그러나 구천은 듣지 않고 기어이 오나라를 공격하다 패해 회계산으로 달아나야 했다. 부차는 승기를 잡아 구천을 포위했다. 사지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위기상황일 때 오히려 빛을 발하는 것이 뛰어난 인재 아닌가. 범려는 구천에게 사지에서 살아날 방법을 제시한다. “가득 차 있는 것을 유지하려면 하늘의 이치를 본받아야 하고 넘어지려는 것을 일으키려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또 사물의 이치를 통제하려면 땅의 이치를 거울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겸손한 말과 후한 예물을 갖추어 부차에게 보내십시오.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께서 스스로 인질이 돼 그를 섬기십시오.” 구천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범려의 말을 좇아 부차에게 강화를 청했다. 이때 오자서는 화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하지만 충신이 있으면 간신도 있는 법. 중국 역사상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간신 백비는 목청 높여 강화를 주장한다. 구천에게 미녀와 황금을 뇌물로 받은 것이다. 결국 부차는 강화를 받아들이고 구천은 부차에게 투항했다. 구천은 범려와 함께 오나라 서울에 인질로 남아 말을 사육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고 겨우 부차를 안심시킨 구천은 풀려나 자기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라는 반쪽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구천은 부차의 신하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치욕을 되갚기 위해 구천은 매일 쓰디쓴 쓸개를 혀로 핥고 딱딱한 장작 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다. 천신만고 끝에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온 구천은 재기의 칼날을 갈았다. 여기서도 빛나는 것이 범려의 능력이다. 범려는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제관료였다. 반 토막 된 나라에서 우선 세금을 줄여 민심을 수습하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해 경제를 튼튼히 했다. 인구 증가책도 세웠다. 나이가 차서 결혼을 안 하면 부모를 벌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결혼은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아이를 낳으면 축하 선물을 보내 치하하고 보조금도 지급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제후국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으로 대단히 선진적인 발상이었다.
충신을 죽인 오나라의 멸망 월이 이처럼 차근차근 기운을 회복해가는 사이 오 왕 부차는 중원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서진을 계속한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오자서가 월나라를 정복해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계속 간언했지만 백비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오자서는 백비의 모함으로 부차로부터 자살을 강요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복수의 화신이었던 오자서는 목숨을 끊으며 이렇게 외쳤다. “내 눈알을 뽑아 동문 위에 걸어 놓으라. 월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없애는 것을 내 눈으로 보리라.” 오자서의 저주는 결국 현실이 됐고 오나라는 월나라에 망하게 된다. 이때 구천은 과거 자신을 살려준 부차를 생각하고 부차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범려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회계산에서의 일은 하늘이 오나라에 우리 월나라를 주신 것인데 오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우리에게 오나라를 주시려 하는데 그 뜻을 거스르겠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강화는 거절되고 부차는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훌륭한 신하의 조언을 들은 현명한 임금과 그렇지 못한 임금의 운명이 대비되는 상황이다. 오늘날 기업의 오너나 CEO들이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늦었지만 이 글의 주제를 얘기할 때가 됐다. 범려의 위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범려는 왕 구천과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편안함은 함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 물러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런 뜻을 비쳤다가는 자칫 반역으로 몰려 목을 내놓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에 나오는 범려의 사직서를 보자. “신은 이렇게 들었습니다. 군주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수고롭고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는 죽는다고 말합니다. 지난날 군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는데도 죽지 못한 것은 군왕을 도와 대업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지난날의 치욕은 이미 씻었으니 회계의 치욕에 따라 신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대단하지 않은가. 범려는 성공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현명함의 결과였다. 간혹 기업의 오너와 CEO 간에 얼굴을 붉히고 헤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떠날 때를 볼 줄 아는 눈이 없는 탓이다. 그 결과는 서로의 불행이다. 범려의 예는 언제 나아갔다가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 고민하는 오늘날 리더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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