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68운동’ 스무 해 뒤의 한국
서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68운동이 40주년을 맞이한다. 1968년 세계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격동의 한 해를 보냈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미국의 인권운동, 프라하의 봄, 파리의 ‘5월혁명’ 등으로 시위와 점거, 파업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가까운 일본도 ‘전학공투회의’로 1968년의 열병을 맛보았고, 베트남 전쟁은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독재체제가 무너졌다. 하지만 여전히 독재와 냉전의 그늘에 놓였던 한국에서는 변혁운동은커녕 이렇다 할 시위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서구의 68운동처럼 격렬한 나날은 1987년에야 찾아왔다. 1960년 4·19를 경험한 소위 6·3세대가 짧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이내 군화의 위세에 눌려 사라졌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다시 시작된 저항문화는 대학을 오랫동안 화염병과 최루탄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1987년, 드디어 시위와 농성, 바리케이드가 시내의 거리 곳곳으로 번지면서 저항은 ‘6월항쟁’으로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친 한국에서와 달리 서양의 68운동은 당시 사회 곳곳에 존재하던 모든 권위를 일거에 날려 보낸 문화혁명이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학교에선 교사의, 회사에서는 상사의 모든 권위를 1960년대 서구의 젊은 세대는 거부했다. 기성세대가 그어 놓은 모든 ‘금기사항’을 이들은 파괴했다. 그래서 그들은 “금지를 금하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부모 몰래 이성을 자유롭게 만나고, 부모가 싫어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음악을 듣고, 교수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수업을 거부하고, 과거 파시즘에 물들었던 기성정치인들을 비웃었다. 성 해방과 히피운동을 주도했고, 심지어 기존 문화를 거부하는 몸짓으로 마약에도 손을 댔다. 1960년대 말에 서구의 젊은이들이 저항의 대오를 갖춘 이유는 무엇보다 대학이 팽창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비붐 세대인 1945년 이후 출생자들이 대학에 진학하던 1960년대의 대학 진학률은 그 전 시대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고, 농부나 광부보다 대학생의 수가 더 많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늘어나는 대학생 때문에 1960년대에만 대학이 100개쯤 지어졌다. 영국에서는 같은 시기에 대학생 수가 15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노동자 계층의 자식이 처음으로 대학 문턱을 밟게 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이 되면서 서구의 60년대가 그랬듯이 베이비붐 세대가 대학에 진학했다. 급격하게 팽창한 대학은 저항운동을 마음껏 발산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1980년 초 신군부가 활짝 열어젖힌 대학의 문이 이후 군부의 숨통을 죄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들 베이비붐 세대는 대학 입학 전부터 기성세대와는 다른 경험을 쌓았다. 서구의 베이비붐 세대는 1945년 이후 경제발전의 지속과 사회보장의 확대 속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자라난 ‘풍요의 세대’였다. 전쟁과 파시즘을 겪으면서 질서와 안정을 바라던 이전의 세대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게다가 1950년대 소비시대가 등장하면서 ‘틴에이저’라는 용어의 탄생과 함께, 장기적 호황기에 간단히 돈을 벌었던 십대 청소년들이 소비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또한 이들은 미디어의 발전과 핵가족화 때문에 이전 세대와 ‘급격한 단절’을 경험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도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독재의 그늘에서 성장했다. 반면에 경제발전의 열매를 처음으로 맛보기 시작했고, 중·고등학교의 입시지옥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 이른바 ‘뺑뺑이’ 세대였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때 서열화에 내몰려 ‘일류’의 딱지를 붙이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어설픈 평등의 이념을 배웠다. 게다가 80년대 초 대학생 수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자신을 사회의 엘리트로서 의식하기보다는 대중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항의 대상은 달랐다. 이미 산업사회를 거쳐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확립했던 미국과 유럽에서 저항의 대상은 민주주의 제도 그 자체가 아니었다. 간혹 더 나은 민주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는 주로 사회나 일상 속에 만연한 권위, 불평등, 부도덕이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68운동은 정치적으로 눈에 띄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껏해야 선거연령을 다소 낮추었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베이비붐 세대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자각하게 된 사실은 정치적 현실이 그동안 배웠던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한 유신체제가 실제로는 억압적인 군사독재 체제였고, 80년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억누른 체제였다.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집단의 정치적 성격도 유럽과는 거리가 있다. 68운동에서 운동의 이념을 전파하고 행동의 전위를 형성한 세력은 소위 말하는 ‘신좌파’였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서양 사회에서 변혁운동의 중심을 노동계급에 놓는 전통적인 구좌파가 아니라 후기산업사회에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던 사람들이었다. 훗날 여성운동이나 흑인인권운동, 그리고 환경운동을 주도할 이들은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련의 구좌파에 항거하고 체 게바라와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 ‘제3세계’ 변혁운동가를 지도자로 내세웠다.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억압 속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대학에 입학한 후 사상적 갈증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채웠다.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유입된 이러한 사상은 이념적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했지만, 사상의 폭을 예전보다 훨씬 더 넓혀 놓았다. 이들보다 한 세대 앞선 4·19세대가 시민혁명의 틀에 사로잡혀 있었던 반면 이들의 이념은 놀라울 정도로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그런 사상적 내용을 담은 책자가 ‘금지된’ 불온서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진리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회주의 열망을 담은 정치혁명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서구나 한국에서나 정치적 행동주의의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곧바로 탈정치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불타오르던 변혁의 열기도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이후에 입학한 대학생들은 대학 울타리 밖의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채 공부에 열을 올리거나 졸업 후에 닥칠 취업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항정신이 몸에 밴 당사자들은 그 열기를 쉽게 잊기 힘들었다. 1968년에 바리케이드 현장을 누볐던 저항가들은 주로 문화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87년의 투사들은 노동현장으로 가거나 아예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베이비붐 세대’는 이제 ‘68세대’와 ‘386세대’로 각각 변모했다. 그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세대’의 꼬리표는 같은 미래를 꿈꾸었던, 아니 어쩌면 여전히 그것을 꿈꾸는 소명의 세대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은 세대는 젊은 시절에 잠시 경험했던 직접행동의 의미를 전 생애에 걸쳐 찾았고 이것을 장기적인 문화혁명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러므로 68운동의 진정한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반짝였던 운동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이후에 나타난 일상의 ‘문화혁명’에 있었다.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전운동, 인권운동 등 시민운동이 사회 일상에 깊게 스며들었다. 다수의 자유 대신에 소수의 자유를 확장시키고자 했던 이 움직임은 역사의 희생자, 인종적 소수자, 성적 약자, 하위문화 담당자에게 대항의 담론을 제공하면서, 그들이 주류와 투쟁하도록 만들었다.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퇴장하는 ‘68세대’에 비하면 한국의 ‘386세대’는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정치에서 이들의 경험은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경험한 독재의 경험을 정치판에서는 쉽게 부정하고 뒤집었지만 일상에서는 항상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때로 발견되는 권위적인 ‘슬픈 자화상’은 이후의 세대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남았다.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90년대 대학생들은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386세대가 남긴 유산을 문화의 전 영역에서 털어내고 있다. [필자는 공주대 사학과 교수다. 1986년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석·박사 과정을 거쳐 2001년 7월 독일 보쿰대(Ruhr-Universitat Bochum)에서 서양사(독일현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공저) ‘세계의 과거사 청산’(푸른역사, 2005년), 논문 ‘68운동과 그 역사화’ (역사비평, 2007년 봄호)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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