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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선 공화당 후보 줄리아니의 도덕관

미 대선 공화당 후보 줄리아니의 도덕관

1992년 9월 16일, 뉴욕시 경찰의 집회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경관들은 새로운 단체협약을 원했으며 데이비드 딘킨스 시장이 (경찰관들을 감독하는) 시민감독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고 순찰자들에게 9㎜ 권총을 지급하지 않는 데 분노했다. 상당수 경관이 술기운에 또는 거나하게 취해 시청 근처의 차 위에 올라가 발을 구르고 브루클린 다리 인근의 교통을 차단했다. 몇몇 증인에 따르면 이들은 최초의 흑인 뉴욕시장인 딘킨스를 인종적인 이유로 조롱하는 현수막을 마구 휘두르는 한편 루디 줄리아니를 환영한다는 뜻으로 ‘루디! 루디! 루디!’를 연호했다. 미국 연방검사 시절 범죄소탕으로 이름을 날린 줄리아니는 자신의 정치 기반을 지원하려고 이들을 찾았다. 줄리아니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는지는 분명치 않다(훗날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녹화 화면을 보면 딘킨스를 향해 상스러운 몸짓과 욕설을 외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다음 날 뉴욕의 신문들은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딘킨스는 몇 년 후 그가 “백인 경관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고 비난했다. 당시 줄리아니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경관으로 일하는 삼촌이 넷이나 돼서 아마 내가 평소보다 더 감정이 격했나 보다”고만 말했다. 이날 행동으로 흑인 유권자들이 줄리아니에게 (일부는 영원히) 등을 돌렸지만 대신 경찰관공제조합의 비공식 후원은 확보했다. 그리고 그 덕택에 1993년 시장에 당선됐다. 줄리아니는 오래전부터 경찰관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질 나쁜 경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관이라도 불법을 자행하면 용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폭력배, 외설물 제작자, 마약 거래상, 사기꾼 사업가와 정치인 그리고 목숨을 놓고 흥정하는 성전 전사들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해왔다. 이제 그는 자신이야말로 악 그리고 국외의 테러리즘, 국내의 부패로부터 우리를 구할 대통령 후보라고 내세운다. 하지만 버나드 케릭을 뉴욕시 휘하 경찰청장으로 임명하고 훗날 국토안보부 장관에 오르도록 민 장본인이기도 했다. 케릭은 탈세를 포함해 각종 연방 범죄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조폭 관련 사업가들과의 연줄로 비난이 끊이지 않았던 케릭은 계속 어떤 범법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줄리아니 밑에서 교도국장을 맡을 때 비윤리적 행위를 한 죄가 있음을 지난해 브롱크스에서 시인했다). 줄리아니는 극적인 성향의, 그리고 극적인 연기를 보이는 윤리주의자다. 하지만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으며 지성적이고 민감하기 때문에 성인과 악인은 때로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점을 잘 안다. 신조의 엄격함과 인간 본래의 변덕스러움을 조정할 줄 알았다. 오래전부터 속죄의 힘을 믿었으며 충성의 미덕을 크게 신뢰했다. 대결을 겁내지 않고 오히려 마찰을 환영할 뿐 아니라 조장하는 듯하다. 특히 카메라가 옆에 있을 때는 그런 성향이 심해진다. 연기가 종종 도를 넘는 경향이 있는데 단지 그가 장난삼아 여장을 하기로 유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줄리아니는 케릭을 측근으로 받아들일 때 구성원이 모두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는 의식을 연출했다. 당시 케릭은 자신이 마치 “마피아 단원”처럼 느껴졌다고 썼다. 케릭의 마피아 비유는 그렇다 쳐도 줄리아니에게는 왠지 남을 불안하게 만드는 강렬함과 친밀함이 있다. 권위주의적일 뿐 아니라 폐쇄적이고 충성파에 의존하는 성향을 가져 유권자들은 부시 대통령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줄리아니의 본모습은 아마 경찰관 집회에서 보인 연극적인 모습처럼 복잡하면서도 분명 열정적일 듯하다. 마음만 먹으면 영웅이나 위선자 어느 쪽도 되고 동시에 둘 다도 가능하다. 자신과 국가의 영광과 운명을 보는 성숙된 감각은 윈스턴 처칠과 거의 맞먹는다. 줄리아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베르디의 오페라와 함께 처칠의 저술들을 급우들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처칠은 말버러 공작이 살았으며 조상의 고향인 블렌하임 궁에서 선조들의 신화를 들으며 인격을 형성했다. 마찬가지로 줄리아니의 인품도 태생의 도덕적 모호성과, 과거를 존중하거나 적어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영원한 미국적 통속 드라마의 영향을 받았다. 줄리아니는 브루클린에 있는 이스트 플랫부시의 이민자 동네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 주를 이뤘으며 유대인이 약간 섞여 있었다. 어두운 색의 교회들이 우뚝 솟아 있고 평범한 벽돌과 적갈색 벽돌집들이 늘어선 동네로 고층건물들이 하늘을 수놓은 맨해튼에서 한참 떨어졌다. 실제로 줄리아니의 삼촌 네 명뿐 아니라 사촌 네 명도 경찰관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삼촌 레오 다반조는 고리대금업자에다 마피아 연줄을 가진 사설 마권업자였다. 그의 영업장 역할을 하는 바의 이름은 또 다른 경찰관 삼촌 빈센트 다반조의 이름을 빌렸다. 그 경찰관 삼촌은 그 바의 간판 사장 역할을 했다. 레오의 아들이자 루디의 사촌인 루이스(일명 ‘금발머리 스티브’)는 무자비한 폭력배였는데 훗날 무장 납치와 장물 자동차 판매 죄로 징역을 살았다. 줄리아니의 집안에서도 이처럼 선과 악이 밀접하게 공존했기 때문에 공적으로는 엄격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여유로운 윤리관을 갖게 된 듯하다. 이런 이중적 특성은 앞으로 10여 주 동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대체로 보수적인 공화당 예비선거 유권자들이 이 튀는 인물을 믿고 후보 지명을 해야 할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이 기사와 관련해 줄리아니의 마리아 코멜라 부대변인에게 질문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루디의 아버지 해럴드도 빈센트의 바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줄리아니를 소개할 때 필수 참고서인 웨인 배럿의 전기 ‘루디(Rudy!)’에 따르면 해럴드는 리볼버 권총과 야구방망이를 항상 휴대했다. 술 취한 고객이 난동을 부릴 때에 대비해서다. 배럿의 기록에 따르면 해럴드 줄리아니는 매형의 ‘행동대장’으로 부업을 하며 방망이와 권총을 휘둘러 빚을 받아냈다. 권투선수 지망자였지만 근시로 뜻을 이루지 못한 해럴드는 우유 배달부를 강탈한 죄로 싱 형무소에서 1년 이상 복역했다. 줄리아니는 2000년 배럿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과거에 관해 별로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독자(獨子)였던 줄리아니는 어린 시절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았다. 친척들은 ‘작은 왕자’라고 불렀다. 루디가 일곱 살 때 브루클린에서 가든 시티로 가족이 모두 이사했다. 롱아일랜드 교외의 거의 백인들만 사는 중산층 주택지구였다. 해럴드는 훗날 루디의 선생님 한 명에게 “아이를 몇몇 바람직하지 않은 친척과 떼어놓고 싶다”고 말했다. “루디가 비행의 유혹을 받지 않고 충실한 교육을 받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1951년의 이스트 플랫부시는 남북전쟁 후 남부 흑인들의 북부 도시 대이동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았지만 브루클린에서는 백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상태였다. 줄리아니의 대학 시절 같은 과 친구였던 토니 마우로는 인근 크라운 하이츠에서 살다가 1950년 가족이 모두 가든 시티로 이사했다. 그는 집값이 떨어지고 범죄가 발생한다며 부동산 업자들이 주민들에게 겁을 주더라는 아버지의 설명을 기억했다. 능력이 되는 중산층 가톨릭 가정은 자녀를 교구 학교에 보냈다. 공립학교에서는 1955년의 인기 영화 ‘폭력교실(The Blackboard Jungle)’에서 묘사됐듯이 학생들이 점심값을 도둑맞는 일은 예사였다. 가톨릭 학교의 학생들은 교복을 착용했고 교사가 교실에 들어서면 기립자세를 취했다. 매일 종교적 훈시도 받았다. 루디는 비숍 러플린 메모리얼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그리스도 수사회가 엄격한 통제 아래 운영하는 성채 같은 고등학교였다. 교내 무도회에서 몇몇 학생이 에벌리 브러더스의 ‘Wake Up Little Susie’를 틀자 수사 중 한 명이 음반을 양손으로 내려쳐 깨뜨리며 선언했다. “이곳에서는 저런 천박한 음악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2학년 때 줄리아니의 담임 교사는 잭 오리어리라는 이름의 기독교 수사였다. 줄리아니는 말은 많았지만 학구파는 아니었다. “한 번 때린 적이 있다”고 오리어리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수업 중에 떠들었는데 안 됐지만 당시에는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면 때리는 게 관행이었다.” 줄리아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약 1년 후 학교 강당에 있을 때 줄리아니의 부모가 오리어리 교사를 찾아와 신분을 밝히며 말했다. “ ‘아이를 때렸던 일 기억하세요’라고 묻기에 ‘예, 기억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오리어리는 당시를 돌이켰다. “그랬더니 ‘정말 감사해요.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어요’라며 고마워했다.” 비숍 러플린에서는 운동부가 대접을 받았다. 땅딸막하고 특별히 운동을 잘하지도 못하는 줄리아니는 다른 취미를 찾아야 했다. 오리어리의 도움으로 오페라 서클을 만들었다. 다른 10대들은 에벌리 브러더스의 음악에 맞춰 지르박과 슬로 댄스를 추거나 배우는데 줄리아니는 베르디의 ‘오셀로’를 감상하며 이탈리아의 고급문화를 이루는 비극과 로망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치인 수업도 이때 받았다. 1960년 가을 줄리아니가 졸업반일 때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했다. 줄리아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존의 편견을 뛰어넘어 가톨릭 교도로서는 처음으로 백악관 주인 자리에 오르려는 준수한 외모에 유창한 언변의 젊은 후보에 매료됐다. 몇몇 친구를 설득해 수업을 빼먹고 맨해튼에서 열리는 케네디 후원 집회에 참석했다. 학교에 돌아와서는 오리어리 교사에게 “그를 봤어요! 그를 봤어요!”라며 기뻐했다. 그해 친구의 선거본부장을 맡은 줄리아니는 유개 트럭을 빌려 스피커를 달고 학교 외곽을 돌았다. 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직책은 기껏 선도부장이었다. 그는 완장을 차고 소방훈련 중 잡담하는 등의 사소한 위반을 적발하기를 즐기는 듯했다. “얼굴 표정이 단호했다”고 러플린에 같이 다녔던 잭 J 렝스틀은 말했다. 학교 연감의 ‘가장 가능성 높은’ 항목에서 그는 ‘교내 정치인’으로 뽑혔다. 줄리아니는 쾌활하고 얼굴이 두꺼웠다고 조지 슈나이더는 말했다. 줄리아니가 선거본부장으로 일했던 친구다(“그 친구가 자원했다”고 슈나이더는 말했다). “줄리아니는 의자에 몸을 구부린 채 통로에 발을 내놓고 앉았다”고 그는 돌이켰다. “선생님이 ‘어이, 거기, 안으로 발 집어넣어’라고 말하자 루디를 포함해 모두가 웃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면 선생님이 다가가서 머리를 한 대 때렸다.” 줄리아니는 “자신이 뭐를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슈나이더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숍 러플린에서는 체벌이 예삿일이었다. 사춘기의 무질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무서운 행동이었다. 수사들은 매질로 학생들을 다스렸다. 몇몇 학생은 겁을 먹었다. “누군가 멱살을 잡힌 채 들어올려져 얼굴을 맞거나 선생님이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분필을 던질 때는 아주 무서웠다”고 줄리아니의 반 친구였던 조셉 시신스키는 말했다. 비숍 러플린에서 줄리아니는 하급생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는 교리문답 교사로 일했다. 믿음이 깊지는 않았지만 당시 그와 같은 배경을 가진 많은 성실한 학생처럼 사제직을 진지하게 꿈꾸었다. 훗날 친구들에게 “내게는 독신생활이 맞지 않아” 사제가 되려는 꿈을 접었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결국에는 그 대신 “법학이나 의학을 공부하려고” 대학 장학금을 신청했다. 이민 가정 자녀가 출세하는 고전적인 길이었다. 오리어리 교사는 줄리아니 가족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종종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줄리아니가 신학교를 포기한 데는 더 개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오리어리는 회상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줄리아니의 아버지가 신경쇠약에 빠졌다. 롱아일랜드에 있는 한 주립공원의 남자화장실에서 바지를 발목까지 내린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해럴드를 경찰관이 적발했다. 해럴드는 배회죄로 체포됐다. 오해였지만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변비가 있어 대장운동을 촉진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해럴드는 학교 인부 일도 그만뒀다. 줄리아니는 신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 때문에 가족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오리어리는 전했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항상 휘황하게 빛을 발했다. 줄리아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롱아일랜드에서 뉴욕 펜스테이션으로 향하는 통근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펜스테이션에서 또다시 지하철 상행선으로 갈아타고 먼 브롱스의 맨해튼 칼리지로 통학했다. 이번에도 기독교 수사회가 운영하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다. 744명의 급우 중 흑인은 3명, 히스패닉은 4명이었다. 운동선수와 학내 ‘거물들’이 꽉 잡고 있는 남학생 사교모임에 들어가지 못하자 소규모 모임에 들어가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회원 수는 곧 30명이 됐다. 선거운동 배지를 만드는 등 정치수완을 발휘해 학과 대표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기독교 수사회의 지도 아래, 줄리아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접하게 됐다. 최근 작가 존 주디스는 더 뉴 퍼블릭지의 기고문에서 “가톨릭 사상가들에게 자유는 궁극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천주적 자질’로서 공동선을 획득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학업을 마치고 여러 해가 흘러, 줄리아니는 범죄와 관련된 한 포럼에서 “자유는 권위의 문제다. 자신의 행동과 관련된 상당 부분의 재량권을 법적 권위에 기꺼이 양도하는 인간의 자발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권위는 자유를 보호한다. 자유는 아나키가 될 소지가 있다.” 당시 뉴욕시민자유연합의 운영책임자였던 놈 시걸이 줄리아니의 자유와 권위에 대한 정의를 듣고 “크게 당황했다”고 주디스는 전했다. “하지만 가톨릭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줄리아니의 말에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주디스는 덧붙였다. 1960년대 줄리아니의 정치기조는 순전히 자유주의적이었다. 로버트 케네디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의 인권 의식보다는 법·질서 측면과 힘의 논리에 더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옳다. 60년대 소란스러운 학생운동 시기에 대학과 로스쿨을 다녔지만 줄리아니는 히피와 접촉하지 않았고 반전운동도 기피했다. 체포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검사가 되고 싶은 장차의 꿈을 그르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젊은 줄리아니는 내가 곧 법이라는 식으로 강직하게 범법자를 단죄하는 자베르 경감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빅토르 위고를 읽는 정도의 교양은 있었다. 동료들은 젊은 변호사 줄리아니가 야망이 크고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편견은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줄리아니가 ‘국민’을 대표해 법정에 서고, 소송 적요서에 ‘미합중국’을 대신해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전율을 맛보고 싶어 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미국 연방 검사보조 자리를 두고 아이비리그 출신들과 경쟁을 벌이려면 우선 연방판사의 1등 사무관이 돼야 가장 유리했다. 줄리아니는 로이드 맥마혼 밑으로 들어갔다. 까탈스러운 노인네라고 알려진 맥마혼은 2류와 3류 로스쿨을 나온 노동자계급 출신의 수완가들을 좋아했다. 맥마혼은 자신이 재판을 맡은 법정에서 변호사들을 ‘멍청이’ ‘속물’이라고 불러대며 전혀 거침이 없었다. 피고 측 변호인에게 ‘자, 다음번 거짓말쟁이를 대령하라”고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오만과 독선 탓에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미국의 한 법조계 잡지는 미국에서 “가장 형편 없는 판사” 중 한 명으로 그를 선정하기도 했다. 시위대와 공산주의자를 거침 없이 감금시키던 맥마혼은 줄리아니에게는 훌륭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줄리아니의 징병 연기가 1969년으로 만료되자 맥마혼은 또 한 번 연기되도록 개인적으로 힘을 써줬다. (줄리아니는 청력 장애를 이유로 미 공군 ROTC를 중도에 그만뒀는데 동료들에게는 베트남 전쟁이 가톨릭에서 정의하는 ‘정당한 전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맥마혼은 줄리아니가 ‘연방검사(AUSA)’라는 꿈의 자리를 꿰차는 데 도움을 줬다. 그래서 줄리아니는 미국 검사사회에서 최고 요직으로 꼽히는 뉴욕 남부지원, 즉 맨해튼에서 검사가 됐다. 1970년대 초반 뉴욕시는 수십 년래 최악의 경찰 추문에 휩싸였다. 존 린제이 시장이 임명한 냅 위원회는 뇌물을 받고 마약을 팔고 심지어 죽은 사람의 주머니에서 현금을 도둑질하는 경찰 수십 명의 비리를 낱낱이 공개했다. 1972년에는 프렌치 커넥션 사건이 터졌는데 경찰 물품관리실에서 400파운드에 달하는 헤로인이 사라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줄리아니는 성장환경에서 비롯된 개인적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줄리아니는 밀고자로 돌아선 부패 경찰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경찰 집안에서 성장한 줄리아니는 뉴욕의 경찰관들을 잘 알았다. 신중하고 관료적인 편인 FBI 요원들과 다르게 뉴욕시 경찰관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고 들었다. 달리 말하면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과감히 법을 위반했다는 뜻도 된다. 그 다음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밥 루치는 단순한 법 위반 이상의 행동을 했다. 특별수사팀(SIU)이라는 정예 형사 60명의 일원이었던 루치는 마약판매상에게 돈을 받고 불법도청을 일삼고 정보원들에게 압수한 마약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냅 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는 중에 루치는 ‘베이비페이스’라는 이름으로 연방수사관과 공조 하에 도청기를 몸에 부착한 채 부패한 경찰관과 변호사들을 만나기 위해 위장 잠입을 했다. 프렌치 커넥션 사건이 알려지자 검사들은 루치가 원래 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을 했다. 루치의 자백을 받아내는 업무가 줄리아니에게 떨어졌다. 줄리아니는 루치의 친구가 돼서 신임을 얻고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루치는 프렌치 커넥션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범죄 용의자들’을 다수 지목했다. 후일 톰 푸키오 브루클린 연방 검사는 자신과 줄리아니가 루치를 데리고 “나쁜 경찰, 좋은 경찰” 놀이를 한 셈이라며, 줄리아니는 자신의 역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 판사가 SIU 수사관들을 일컬어 “뉴욕의 황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줄리아니에게도 루치는 황태자였지만 부패한 황태자였다. 루치는 줄리아니가 속죄를 믿었다고 말했다. 줄리아니는 이런 행동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고행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내가 나쁜 일을 했으니까 이제는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고 루치는 뉴스위크 기자에게 말했다. “루디는 가톨릭의 원죄 문제를 훤하게 알았다. 자신이 그런 논리를 내세워도 괜찮겠다고 판단할 만큼 똑똑했다고 생각한다.” 루치는 당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줄리아니가 너무 심하게 밀어붙였으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훗날 말했다. 하지만 줄리아니는 루치와 친구가 됐고 가족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이야기했다. 줄리아니가 아버지와 가족들의 어두운 과거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줄리아니는 그에게 동정심을 표하고 도덕적 모호성을 이해했다. 한편 루치는 “나는 루디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 그건 확실하게 하자.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충성심은 줄리아니에게 최고의 미덕이었고 때때로 다른 모든 미덕을 능가했다. 줄리아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충성심이 사실은 “루디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충성스럽지 않은 하급자들은 이 사실을 매우 힘들게 배웠다. 비록 그들이 진실과 정의라는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열심히 봉사한다고 자부한다 해도 말이다. 80년대 초반 줄리아니는 레이건 행정부의 법무부 차관에 올랐다. 당시 법무부는 외국에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항공기 제조사인 맥도널 더글러스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리아니는 수개월 동안 그 사건을 맡아온 담당검사에게 말 한마디 없이 맥도널 더글러스의 변호인단을 만났다. 담당검사들은 최고위직 관리가 절차를 무시한 사실에 화를 내며 줄리아니에게 “충격”과 “당황”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편지를 보내서 변호인단과 가진 비밀회합은 검찰수사를 훼손시킨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편지가 밖으로 유출됐다. 그러자 줄리아니는 해당 검사인 마이클 루빈과 조지 멘델슨을 사무실로 불러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보기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 같았다”고 루빈은 짐 스튜어트의 저서 ‘검사들(The Prosecutors)’에서 말했다. “나는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을 듣거나 보지 못했다. 그는 꼬박 20분 동안 호통과 고함을 쳤다.” 나중에 줄리아니는 맥도널 더글러스의 간부 네 명에 대해서는 벌금 120만 달러를 부과하는 사법거래 형식으로 형사기소를 철회했다. 그리고는 루빈과 멘델슨을 “물정 모르는 바보들”이라며 해고했다. 그리고는 그들 두 검사에게 수여된 법무부 특별상을 취소하는 아주 좀스러운 보복을 감행했다. (나중에 법무부의 내부감찰 보고에 따르면 줄리아니에게 실책사유는 없었다.) 줄리아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줄리아니가 예스맨들, 그들 표현대로 “예스 루디즈”에 둘러싸여 있다고 오랫동안 비판해 왔다. 충성심은 줄리아니에게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주고받는 상호 관계가 아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알폰스 다마토 전 뉴욕상원의원과의 관계가 그 사실을 잘 대변한다. 1982년, 미 연방법무부 차관 시절 줄리아니는 마이애미로 날아갔다. 아이티 보트 난민들의 법적 처리를 의논하려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도나 하노버라는 TV 앵커우먼을 만났다. 당시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거의 끝장난 상태였다. 줄리아니는 1968년 육촌 관계인 레지나 페루기와 결혼했었지만 이미 이혼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쾌활한 하노버에게 반했고, 새 방송 일을 찾아 뉴욕으로 떠난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법무부 일 때문에 워싱턴 DC에 묶여 있어야 했다. 다마토는 줄리아니가 당시 뉴욕주 상원의원이었던 자신에게 청탁을 했다고 뉴스위크에 밝혔다. 자신을 뉴욕주 연방검사로 지명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마토는 곤란한 처지였다. 워낙 요직이었던 데다 이미 권위 있는 변호사 위원회가 다른 후보를 내세웠던 차였다. 그래도 다마토는 줄리아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인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줄리아니를 지명했다.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손님인 척 위장하고 마약 밀매 현장을 급습한다며 함께 선글라스를 끼고 할렘가에 나타나서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동시에 웃음거리가)되기도 했다. 원래 목적은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에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고자 했지만, 적어도 새롭게 피어나는 정치적 우정만은 확실히 인식시켰다. 하지만 그 유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줄리아니는 연방검사직에서 물러나 현직 상원의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에 맞서 출마할 채비를 했다. 그 즈음 다마토는 도덕적 논란에 휩싸였다. 상원 금융위원회의 일원이었던 그는 증권업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줄리아니는 월스트리트의 비리를 척결한다며 한바탕 소란을 떨면서 분석가와 브로커들을 주가조작 혐의로 체포하고 수갑을 찬 채 카메라 세례를 받게 했다. 다마토와 인연이 깊은 증권가를 둘러싼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자신의 후임 선정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겠다고 줄리아니는 말했다. 줄리아니는 자신의 보좌관 중 한 명을 그 자리에 앉히려는 공작을 펼치는 한편, 다마토의 윤리성 문제에 관해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마토는 “실성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고 익명을 요구한 전 측근이 말했다. 측근들에게 줄리아니를 모욕하는 발언을 쏟아냈다(“그 재수없는 자식을 죽여버리겠어!”라고 외쳤다고 이 측근은 뉴스위크에 전했다). 줄리아니의 지지자들은 그가 다마토를 배신한 게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내부거래자들과 내통한 공직자와 거리를 뒀을 뿐이며 오히려 그의 청렴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1989년 시장직 예비선거 때 다마토는 줄리아니를 지명한 일이 “인생 최대의 실수”라며, 한때 자신의 수제자였던 줄리아니를 “도덕 관념이 결여된” 정치적 기회주의자로 묘사했다. 둘의 반목은 계속됐다. 1994년 다마토와 가까운 조지 파타키가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줄리아니는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 마리오 쿠오모의 편을 들었다. 그는 “다마토와 파타키 측이 권력을 잡으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지난 주 뉴스위크가 연락을 취하자, 다마토는 더 이상 옛 갈등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요즘도 공화당의 다른 대선 후보인 프레드 톰슨을 위한 모금 파티를 열고 줄리아니와 토론으로 맞서는 법을 가르친다. 줄리아니에게 충성이란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을 뺏어가지 않는 것이다. 1996년 1월 당시 뉴욕의 경찰청장 윌리엄 브래튼은 이 점을 간과한 죄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는 뉴욕의 뛰어난 범죄 소탕 성과를 뽐내며 트렌치 코트를 입고 타임지 표지를 촬영했다. 기분이 상한 줄리아니는 시청 소속 변호사들에게 브래튼의 지출 내역을 조사하게 했고, 두 달 만에 브래튼은 물러났다(줄리아니는 자신이나 직원들이 브래튼을 해코지한 적은 없지만, “나와 브래튼 둘 다 매우 개성이 강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둘 다 뉴욕의 치안 개선에 일조했다. 브래튼은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 범죄이론의 전도사였다. 아주 사소한 반사회적 행동들이라도 무법천지 같은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 대형 범죄의 씨앗이 된다는 이론이었다. 한편, 16년 간 가톨릭 학교에서 청결과 질서가 도덕성의 척도라고 배웠던 줄리아니는 경범죄가 대형 범죄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1994년 1월 뉴욕시장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신호등 앞에 멈춰선 멋모르는 관광객이나 교외 거주민들의 차 앞 유리창을 닦고 돈을 뜯어내는 ‘걸레도둑(squeegee men)’이라는 조무래기 사기꾼들을 척결하겠다는 정책을 선포했다. 줄리아니는 브래튼만 한 후임자를 찾지 못했다. 후임 경찰청장 하워드 사피르는 줄리아니의 비위를 맞추느라 바쁜 전형적인 “예스맨”이었다. (“나는 루디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사피르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하지만 그와 의견이 다를 때… 사적으로 내 입장을 꼭 밝힌다.”) 경찰은 대부분 소수민족의 거주지였던 빈민가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경찰의 폭력 남용 사례가 계속 제기되면서 줄리아니의 범죄 소탕 업적의 빛이 바랬고 흑인과 라틴계들의 반발을 샀다. 2000년 위장 잠입한 마약단속반 형사가 무장하지 않은 패트릭 도리스먼드라는 흑인 경비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 줄리아니는 도리스먼드도 “천사 같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사실 도리스먼드는 줄리아니와 같은 비숍 러플린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반면 줄리아니가 그의 임기 중 마지막 경찰청장이었던 버나드 케릭에게 보여준 의리는 거의 맹목적인 수준이었다. 둘은 1989년 줄리아니가 시장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딘킨스에게 패했다), 당시 휴직 경찰이었던 케릭이 줄리아니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줄리아니는 진흙 속 진주였던 케릭의 자질을 알아봤다. 그는 뒷골목에서 단련된 노련한 경찰로 맡은 바 임무를 척척 해냈다. 줄리아니는 나중에 마피아와 연결됐다고 알려진 두 명의 사업가와 케릭의 수상쩍은 관계가 드러나자 미처 몰랐다고 주장했다. 뉴스위크는 시청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줄리아니 시장이 케릭이 경찰청장에 임명되기 직전 이 문제와 관련된 보고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자료를 찾아냈다. 하지만 줄리아니는 기억이 없다고 밝혔으며, 충직한 케릭은 꽉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줄리아니는 이달 초 “버나드 케릭과 관련해 실수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케릭의 과오가 그가 거둔 범죄 척결 성과보다 중시되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줄리아니의 도덕관은 두 번째 시장 임기를 맞이하며 더욱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센세이션(Sensation)’이라는 전시회가 열리자 격노했다. 전시작 중에는 성모 마리아를 음란한 그림들과 코끼리 대변 덩어리에 둘러싸인 흑인 여성으로 묘사한 그림이 있었다. 그는 미술관 측에 전시회를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시 보조금을 철회하겠다고 지시했다. 결국 법원이 개입해 미술관의 손을 들어줬고 전시회는 계속됐다. 하지만 어린 시절 친구인 앨런 플라카 신부가 아동 성추행 혐의로 기소되자 친구 곁을 지켰다(플라카는 혐의를 부인한다). 경찰과 폭력배를 모두 친척으로 둔 집안에서 자란 소년 줄리아니는 선과 악에 관해 다소 선별적인 의식을 지니게 됐다. 자기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말이다. 줄리아니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강변할 때 그의 사생활은 난장판이었다. 시장 임기 마지막 해, 도나 하노버는 줄리아니의 기자회견에서 남편이 자신과 이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 번째 부인 주디스 네이선은 자선 무도회에 왕관을 쓰고 가는 등 줄리아니의 권력과 특권을 너무 즐기는 인상으로 가십 잡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하지만 줄리아니가 드디어 자신의 권력과 명예욕을 나눌 만한 제 짝을 만났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9·11 당시 ‘미국의 시장’으로 얻은 명성을 이용해 재물 축적에 혈안이 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줄리아니는 2006년 1월부터 올해 5월까지 강연으로 114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자신의 법률사무소 브레이스웰 & 줄리아니에서 같은 기간 120만 달러의 추가 수익을 냈다. 또 해외나 국내의 고객들을 비밀리에 자문하는 여러 컨설팅 회사를 자회사로 둔 줄리아니 & Co.에서 410만 달러를 챙겼다. 줄리아니의 법률사무소는 워싱턴 DC의 여러 로비단체를 고객으로 뒀다. 에너지, 석유화학, 군수 업체들이다. 줄리아니 자신은 로비업자로 등록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법률사무소 고객들이 정치적 약점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지난 7월 줄리아니 법률 사무소 고객 중에 강경한 반미론자인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권 소유의 석유기업이 있음을 기자들이 질문하자, “법률사무소는 정치집단이 아니고, 그런 질문은 멍청한 정치적 공세”라고 그는 대답했다(그 후 사무소는 고객 명단에서 그 기업을 제외했다). 줄리아니의 집안은 부유하지도 권력가 집안도 아니었다. 때문에 부시 대통령이나 공화당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미트 롬니처럼 부와 권력을 당연시하지 못한다. 정상을 향해 투쟁하다 보니 ‘싸움닭’ 같은 성격을 갖게 됐다. 그는 싸워서 원하는 바를 쟁취했고, 지금의 위치를 누릴 만하다. 어린 시절 성장 배경 때문에 줄리아니는 인간의 어두운 면모를 이해하면서도 경계할 의지력을 갖췄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충성을 다하는 자기 사람의 실책에는 매우 관대하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 그를 배신하지는 마라, 그게 루디의 세계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유일한 죄니까.



With MICHAEL ISIKOFF, ARIAN CAMPO-FLORES, LISA MILLER and MARK HOSEN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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