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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의 문’ 행시<행정고시>부터 없애야

‘특권의 문’ 행시<행정고시>부터 없애야

“2010년부터 행정고시를 전면 폐지합니다. 국가공무원법상 신분 보장(정년 보장)도 철폐합니다. 보수기준표를 없애고 성과별 보수체계로 전면 개편합니다.” 만약, 이런 정부 발표가 난다면? 관료사회는 발칵 뒤집힐 것이다. 관료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지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행정고시 폐지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파기되지 않았다면 현 정부 내에서도 실현될 수 있었다.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정 후보의 공약이었던 ‘행정고시 폐지’에 합의했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는 문국현 후보가 이 공약을 들고 나왔다. 대선과 관계없이 참여정부에서도 ‘폐지’가 검토됐다. 중앙인사위원회 관계자는 “총리실 지시에 따라 행정고시 폐지를 검토했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당선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 대선 기간 에 이명박 캠프에 참여했던 한 교수가 “단계적으로 민간의 경쟁원리를 도입해 능력보다는 고시 기수 순으로 승진하는 관행을 뜯어고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현재 대통령직인수위는 정부부처 통폐합 발표 후 하부조직 개편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공무원 감원 폭도 조정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 통폐합과 하위 공무원 수 감축으로 ‘정부 혁신, 관료 개혁’은 힘들다는 게 역대 정부가 준 교훈이다. 정부 혁신은 곧 관료주의 타파다. 관료의 벽을 허물려면 그들의 조직과 규모, 권한에 모두 손을 대야 한다. 역대 정부처럼 반발을 예상해 주춤했다가는 ‘기민하고 똑똑한’ 관료들에게 다시 휘둘리고, 정부 혁신은 물 건너간다. 물론 현재 내놓은 정부조직 개편안도 대통령 거부권 시사 발언이 나오고, 국회 통과에 진통이 예상되는 마당에 ‘행시 폐지’ 카드까지 인수위가 내놓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관료제도의 개혁 없이 정부·공공 혁신은 없다’는 전제가 옳다면, 행시 폐지는 시간을 두고라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행시가 폐지돼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일단 합격만 하면 바로 고위 관료의 길로 들어서고, 온갖 특혜와 정년이 보장되는 제도는 민간부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정년도 모자라 퇴임 후 고위직 관료 출신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산하 공기업이나 관리하던 민간기업에서 다시 한번 권세를 누리기도 한다. 최운열 서강대 부총장의 말처럼 “고시 관문을 통과한 관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우수한 집단이라는 자부심이 팽배하고, 민간부문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부족하다고 믿기 때문에 민간에 업무를 이양하지 못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심지어 스스로 엘리트 관료라고 믿는 고시 출신 관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행정능력을 갖춘 비고시 출신 공무원들의 승진을 막는 벽이 되기도 한다. 그런 예가 있다. 2005년 4월 산업자원부는 해괴한 인사방침을 내렸다. 산업자원부 비고시 출신 사무관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내용은 이렇다. ‘만 50세 이상 특승(비고시 출신) 사무관(5급)은 서기관(4급) 승진에서 제외한다. 단 승진 후 3개월 이내에 퇴직하겠다는 사직서를 미리 제출하면 서기관 승진을 선별 허용한다’. 소위 퇴직 조건부 승진이다. 인사적체가 심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방침이었다. 한마디로 서기관 자리에는 고시 출신 사무관만 승진시킨다는 내용이다. 2006년에 출간된 『과천블루스』라는 책을 통해 이 내용을 폭로한 이경호 전 산자부 사무관은 “비고시 출신은 5급으로 공직을 마감하라는 소리였다”며 “고시 출신들의 행태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이에 대해 중앙인사위 관계자는 “공무원법상 퇴직조건부 승진이라는 인사제도는 없다”고 밝혔다. 산자부 인사팀 관계자는 “지금은 그런 지침이 없고, 과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산자부 사무관들은 “그런 방침이 내려온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고시 출신 위주의 관료화는 현 정부가 인사제도 혁신이라며 내놓은 개방형 직위제, 고위공무원단제, 팀제도 무력화시킨다. 2006년 ‘신분적 계급적 구조를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목적으로 출범한 고위공무원단. 출범 당시 고위공무원단(1~3급)에 소속된 1035명 중 9급이나 7급에서 출발한 비고시 출신은 불과 14.1%에 불과했다. 관료사회의 폐쇄성을 완화하고, 민간인과 공무원의 공개경쟁을 통해 공직사회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며 도입한 ‘개방형 직위제’ 역시 관료들의 잔치다. 중앙인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4년간 개방형 직위 충원자(233명) 중 해당 부처 출신 인사가 74%에 달했다. 5급 사무관을 팀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앙부처들이 속속 도입한 팀제 역시 뿌리 깊은 연공제 문화 속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국장으로 퇴임한 한 전직 공무원은 “기수로 서열이 매겨진 공직사회에서 5급 사무관 팀장과 부이사관급 팀장이 회의를 하면 제대로 토론이 되겠느냐”며 “팀제가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라고 말했다.
자율임용제도 개방해야
행시 폐지는 아직까지 공론화가 됐다고는 볼 수 없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돼 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선진화국민회의 정책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인수위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제시했던 박 교수는 발표문을 통해 행시제도의 폐지를 강하게 주장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고위 공무원 선발 방식의 주류였던 고시제로는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기본 역량을 갖춘 인재를 선발할 수 없다”며 “이미 수명이 오래전에 다한 제도”라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도 지난해 말 ‘미래한국비전’ 보고서를 통해 같은 제안을 했다. “행시를 부처별 공무원 자율임용제도로 전환하고 3급 이상 고위공무원직은 모두 개방형으로 임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선 때 정동영 통합신당 후보 대변인을 했던 최재천 의원도 “특권을 누리는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고시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여정부는 공직사회가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는 ‘공직사회 개혁주체론’을 펴왔다. 하지만 ‘전봇대’ 하나 뽑지 못하는 관료들이 스스로 행시를 폐지할 리 만무하다. 정치인들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5년간 국회의원 중 그 누구도 국가공무원법, 공무원임용시험령 등 행시 폐지와 관련된 법안을 발의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관료 왕국’ 일본의 혁신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명박 당선인이 찬사를 보낸 ‘대장성 개혁’을 이뤄낸 일본은 지난해 관료조직의 보루였던 국가공무원 1종 시험(우리나라 행정고시에 해당)을 폐지했다. 1종 시험에 합격하면 연공서열에 따라 정년까지 자동승진하는 제도를 없애겠다는 것이 골자다. ‘채용-승진-정년 보장’ 시스템을 없애고, 민간기업처럼 10~15년 실적을 평가해 고위 간부를 발탁한다는 발상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왕 칼을 뽑았다면…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는 없애는 것이 옳다. 인수위 핵심 관계자는 “아직 때가 아니다”고 했지만, “사견으로는 폐지 쪽이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장 행시를 없애는 것은 어렵다. 법도 고쳐야 하고, 각 부처들이 자율적으로 양질의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사법시험을 폐지하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를 도입한 것처럼 고위 공무원을 양성하는 ‘전문대학원’제도를 신설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부에서는 국가공무원법(64조)으로 보장하는 정년에도 손을 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정년 보장 폐지보다는 ‘직권 면직’을 확대해 자유로운 퇴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가 대세다. 이와 함께 A4용지 1장이면 100만 명의 공무원 임금표를 짤 수 있다는 ‘연공제 보수체계’ 역시, 성과중심 체계로 바꿀 필요가 있다. 숱한 관료 혁신 작업이 있었지만 관료사회는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낙원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올 1월 중순 있었던 ‘2008년 행시·외시’ 경쟁률은 46대 1이었다. 수만 명의 고시 낭인이 ‘허물어야 할 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인수위의 정부 혁신은 역대 정부에 비해 가장 강도가 높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없다. 이왕 칼을 뽑았다면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타는 각오가 새 정부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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