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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여, 사진을 거부하라

사진이여, 사진을 거부하라

지난해 초 도서출판 민음사의 박상희(45·비룡소 대표)씨는 깜짝 놀랐다. 사진작가 황규태씨로부터 뜻하지 않던 계약금을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에서 재판 받기 전인 2005년 말 어린이용 사진 찍기 놀이 책을 펴내기로 하고 계약을 마쳤는데, 황씨의 상명여대 제자라고 밝힌 사람이 전화를 해왔다. “당분간 책 집필이 어렵게 됐으니 계약금 100만원을 돌려줘야 도리라고 생각한다”는 황씨의 메시지와 함께 그 돈을 송금해 왔다. “미국에서 재판 받는다는 말도 그때 듣고 깜짝 놀랐다. 책 계약금을 되돌려 받기는 정말 드문 일이다. 3∼4년씩 원고가 늦어지는 수도 있고, 아예 원고도 계약금도 돌아오지 않아도 그게 그러려니 하는 게 출판계의 관행이다. 그때 ‘아, 이 분이 정말 매너 좋은 신사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했다.” 황씨가 2006년 말, 2007년 초 미국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미교포 사회에서 정상참작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올렸다. 황씨가 LA를 중심으로 기업을 경영했던 때는 20여 년 전이었다. 지금도 교포사회는 그를 성공한 교포 사업가이자 매너 좋은 호인으로 본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렇다 치고 사진작가 황규태는 누구인가. 강운구·주명덕과 함께 한국사진을 이끄는 중진이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내 첫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을 실험해 온 간판 스타다. 한국에 귀국한 1992년 이전 작품부터 컬러사진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흑백사진=고상한 예술사진’으로 통해온 국내 사진계에 처음으로 ‘색을 입힌’ 주인공이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진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까지 황규태는 컬러사진 도입을 넘어 현대미술의 맹장(猛將)들을 모아놓은 유쾌한 실험 내지 무한질주를 거듭해 왔다. ‘황규태=마르셀 뒤샹+르네 마그리트+만 레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 깔끔한 전시장에 갖다 놓고 작품 ‘샘’이라고 마구 우기고, 그게 인정받기 시작한 1917년 이후 현대미술은 고정관념의 틀에서 성큼 벗어났다. 하지만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붕 떠있게 만든 르네 마그리트, 여인의 육감적인 입술을 하늘에 띄워놓은 만 레이 등 현대미술 맹장들의 유쾌한 장난은 황규태 사진 속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돼 왔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카메라나 확대기는 물론이고 피사체-소재 등 사진과 결부된 모든 것은 다루고 조작하는 재료가 아니라, 떠받들어야 할 대상이었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사진가들 근처에 가면 ‘사진은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라는 근엄한 근본주의 냄새가 풍겼다. 근본주의는 사진이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았다. 전통적인 스트레이트 사진만을 사진이라고 우기던, 촌스러운 근엄성이었다.” 사진평론가 이영준 교수(계원예술대)의 말은 ‘황규태 등장 이전’, 즉 근대적 사진어법에 충실하던 시절에 대한 증언이다. 그 점에서 92년 영구 귀국 이전에도 간간이 작품을 선보여 왔던 황규태의 사진들은 가히 충격이었다. 전통적인 찍는(take) 사진의 문법에서 벗어나 만드는(make) 사진의 진수를 속속 선보였다. 디스커버리, 네이처 등 과학잡지에 발표된 남의 사진이나 대중스타들의 사진을 다시 찍어 자기 작품에 활용하는 앤디 워홀 식의 차용은 기본이다. 이걸 제3의 이미지와 합성하는 몽타주 기법은 그의 전매특허다. 그런 행위가 ‘슬쩍하는’ 행위가 아니고 포스트모던 사진의 핵심 기법임은 나중에 추인 받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그의 2002년 작품인 ‘컬러풀 이영애’의 경우 탤런트 이영애 사진에 짜깁기 기법으로 ‘성형수술’을 감행한 실험이다. 차용한 이영애 사진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엄청나게 큰 눈을 이식하고, 총천연색 머리칼에, 푸짐한 입술을 만들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충격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 무려 37년 전인 1971년 작품 ‘앤셀 애덤스 부부’도 마찬가지다. 미국 현대사진의 한 축을 이루는 애덤스를 만나 교유했던 황규태는 부부 사진을 따로 찍은 뒤 합성해 버렸다. 왼쪽은 턱수염이 허연 앤셀 애덤스고, 오른쪽은 안경 낀 부인 이미지인데, 역시 유쾌한 ‘장난’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뿐인가? 피사체 이미지를 담은 필름을 라이터로 지글지글 태워 절묘한 제3의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경우도 그만의 작업방식이다. 1993년 작품 ‘태양’, 95년 작품 ‘두 개의 태양’이 그렇다. 얼핏 보면 녹아 떨어지는 거대한 태양 이미지가 생태 파괴의 디스토피아를 고발하는 듯 다가온다. “태양이 녹아 떨어지고 있다. 내 필름 태우기 장난 이전에 누군가의 작업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도 내가 처음이기를 바란다. 버노그래피(burnograph), 근사한 신조어를 만들어 보면서 만 레이의 레이오그래피(rayography)를 떠올린다.”(사진집 ‘황규태’ 30쪽의 사진설명, 열화당 간행)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유쾌한 장난과 눈속임 그러면서도 묵직한 메시지 전달은 황규태 사진의 기초이자, 현대사진의 한 정점이다. 이를테면 가로 14m에 이르는 초대형 사진은 까마득한 천체의 장관을 보여준다. 그는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당시 이 작품을 40m로 확대해 전시벽면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 장려한 이미지에 압도된 관람객들은 이내 숙연해진다. 하지만 속지 마시라. 이 작품은 동네의 작은 웅덩이의 손바닥만 한 물을 접사 촬영해 마냥 확대했을 뿐이다. “내 사진은 허구에서 최대의 사실성을, 극한의 실체에서 어이없는 허상을 보여주는 작업이 많다.” 사진집 ‘황규태’에서 그가 천연덕스럽게 털어놓는 말은 우리를 다시금 놀라게 만든다. 미국 재판 전에 가졌던 마지막 전시인 2006년 6월 경기도 양평의 ‘갤러리 와’ 개인전 제목이 ‘가짜가 더 아름답다’인 것도 그의 이런 사진 철학 때문이다. 그가 일문일답에서 털어놓은 대로 현실(리얼리티)과 파생실재(시물라시옹) 사이의 통념상 경계 허물어뜨리기에도 이런 역발상이 숨어 있다. 현대미술의 상상력의 신천지는 이제 무한질주를 서슴지 않는 해방구다. 그 ‘생각의 신천지’에서 눈앞의 사물을 그대로 베끼거나 모사하는 행위는 촌스럽고 진부해졌다. 근대적 엄숙주의를 반영할 뿐이다. 그 점에서 황규태는 사진-현대미술을 통틀어 한국의 으뜸가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평가된다. 사진가 구본창씨는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또 다른 느낌의 초현실주의 실험을 했던 작가 만 레이의 유쾌한 장난을 한걸음 더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해체파 작가로 분류해야 옳다. 황규태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아직도 한국에서 근대사진의 완성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만을 최고이자 전부로 치는 낡은 풍토에서 벗어날 성장동력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일 60대 후반에 예술 외적인 사안인 경제사범으로 외국에서 복역생활을 한다는 사실이 한국 미술 전체에 큰 손실이라는 판단은 그 때문이다. 2년 전 사건이 벌어졌을 때 미국 사법당국 측에 한국 내 주요 작가로서의 활약에 걸맞은 선처를 정부 당국이나 미술계-사진계가 요청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나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평론가 이영준씨는 70세 고령이라는 자연연령과 상관없이 황규태라는 작가의 활약을 기대한다. 그에 따르면 황규태는 같은 연배의 작가 중 유일하게 컴퓨터로 ‘즐거운 놀이’를 하는 사람이다. 포토샵 작업만이 아니라 작업 자체가 유쾌한 상상력과 엽기발랄하기 때문에, 다음 달 귀국한다면, 향후 10년은 의욕적인 작품활동이 가능하다. 황규태는 조우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서울에 돌아갈 경우 추락한 그 알량한 명예가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 작업 자체가 즐겁고 항상 신나는 키치한 핏톨(DNA)들이 내 혈관에 건강하게 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몇 사람의 사랑과 나에 대한 기대가 힘이 될 것이고, 그럴 경우 바쁜 사진 활동 때문에 시간이 없어 쩔쩔맬 각오로 서울에 가겠습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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