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와 리더의 공적은 그가 이룬 일로 평가된다. 그가 이끄는 집단이나 공동체를 미래로 이끄는 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발전을 이끌어내는 개혁 프로젝트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집단과 조직은 기존 체제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리더십은 바로 이 순간에, 이런 과정에 필요하다. 구성원의 안주 성향과 고정관념, 그리고 때로는 기득권층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종> 전대미문의 전 국민 여론조사 세종> 세종이 보위에 오른 지 12년 되는 해인 1430년, 조선 방방곡곡은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시끌벅적했다. 근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나 볼 수 있던 전 국민 대상 여론조사가 실시됐던 까닭이다. 시늉만 내는 요식행사가 아니었다. 조선 팔도에 퍼져 있는 17만여 명의 농민을 대상으로 반 년에 걸쳐 이뤄진,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국이 떠들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론조사의 목적은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세금정책을 대신할 새로운 정책을 당사자인 백성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세종의 지시로 전국 향리들은 평야는 물론이고 산골 오지까지 찾아다니며 17만여 명이나 되는 백성의 의견을 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금정책은 국가운영의 근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세금제도는 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했다. 세금제도가 붕괴되면 국가도 쓰러졌다. 이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혁 군주들은 세법 개혁 및 정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세종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법을 바꾸지 않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백성들이 짓눌리면 이는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전세 세액은 1결에 30두, 전체 수확량의 약 10분의 1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풍년과 흉년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관리나 지주가 논밭을 돌아보고 그해의 세액을 정했다. 변동세제인 손실답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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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대목에서 숱한 비리가 생겨났다. 지주들은 언제나 수확량을 낮게 보고한 뒤 실제 거둔 세금의 상당량을 착복했다. 관리들도 뇌물과 향응의 대가로 장부를 조작했고, 심지어 수확량 조사를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추가 비용을 강요했다. 이러다 보니 너무나 많은 세금이 사라져 농민은 농민대로 살기 힘들고, 나라 살림도 어려워졌다. 세종은 중국 고전을 샅샅이 뒤져 하(夏)나라가 시행했었다는 ‘공법(貢法)’이라는 제도를 찾아냈다. 그것은 풍년과 흉년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액을 내도록 하는 세법이었다. 어찌 보면 농민에게는 더욱 가혹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일정액이란 매우 적게 정해져, 실제 세액은 종전의 3분의 1에 불과한 1결당 10두에 그쳤다. 그렇게 세액을 줄이더라도 중간에서 갈취하는 일만 막으면 재정은 더 늘어난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문제는 많은 땅을 소유한 대신들의 저항이었다. 세종 9년(1427년) 처음 공법 개혁안을 꺼냈지만 “선대의 법은 되도록 고치지 않는다”는 불문율 등을 들어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화를 중시하고 반대 의견에도 일일이 귀를 기울이는 세종으로서는 자기 뜻만 고집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이후 해마다(10, 11, 12년) 공법을 거론했지만, 가장 신임하던 좌의정 황희와 주무장관인 호조판서 안순마저 완강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답보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돌연 강행을 선언했다. “좋다. 그렇다면 과연 공법이 이로운지 해로운지, 직접 물어보겠다. 농사를 짓는 당사자들에게!” 그리하여 “손실답험법을 공법으로 바꾸려 한다. 너희의 의견은 어떠냐?”는 왕의 생각을 전 백성에게 물어보는 여론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정조> 수백 년 특권을 혁파하다 정조> 개혁군주를 자처했던 정조 또한 세금 관련 문제를 비켜가지 않았고 비켜갈 수도 없었다. 정조 15년(1791년) 1월 25일, 좌의정 채제공은 옥좌 앞에 엎드려 자못 비장한 어조로 건의하고 있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같으랴.’ 하였습니다. 간교한 무리들이 일부 작당하여 저주하는 말을 피하고자 도성의 수많은 사람의 곤궁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원망을 책임지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고소고발을 벌하는 반좌법(反坐法)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오로지 감당하겠습니다.” 정조는 채제공이 건의하는 형식을 빌려 새로운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조선 개국 후 시전(市廛: 관청의 정식 허가를 받은 점포) 상인들에게 수백 년간 주어져 온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폐지했다. 금난전권이란 허가 받지 않은 점포를 허가 받은 점포 주인들이 직접 단속할 수 있는 권리. 조선 초에는 한양 성내에서 육의전에만 판매권이 주어졌고, 아울러 무허가 상점을 단속할 금난전권이 주어졌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육의전 외에도 시전이 많이 생겼고, 이들에게도 금난전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전들끼리 담합하여 새로 시장에 들어오려는 상인들을 난전이라 하여 차단하고, 금난전권을 빌미로 상납금을 강요하거나 물건을 빼앗는 일이 늘어만 갔다. 개중에는 자기 물건을 하나도 직접 구입하지 않으며 오직 난전에서 빼앗아 온 물건으로만 장사하는 상인까지 있었다. 그런데 시전과 난전을 가리지 않고 장사할 수 있게 한다는 개혁조치를 선언한 것이다. 신해년에 이루어진 일이라 하여 이를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고 한다. 이는 엄청난 결단이었다. 세종의 공법처럼 전대미문의 시도는 아니었지만 숙종 때부터 할아버지인 영조 때까지 계속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수백 년이나 이어진 특권을 갑자기 폐지하기란 쉽지 않은데다, 조정의 주류를 차지하는 노론들과 시전 상인들이 남몰래 결탁하고 있다는 점이 큰 걸림돌이었다. 이런 이유로 개혁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그날 정사를 마친 후 규장각에서 초계문신들을 불러 놓고 강론을 하던 정조는 꽃무늬 연적을 들어 옆에 있던 수반에서 물을 가득 퍼 올렸다. 그리고 초계문신들을 죽 둘러보며, 천천히 연적을 기울여 물이 바닥에 흘러 떨어지게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이 이익을 따라가는 것은 이처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이익 추구를 막는 것은 흐르는 물을 억지로 가둬 두는 것이다.”
<세종> 17년 노력 그러나 절반의 성공 세종>  | ▶세종은 재위 중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야심차게 추진했던 세법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현실이 아니라 책엥서 찾아낸 너무나 이상적인 제도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KBS1TV ‘대왕세종’의 한 장면. | |
사상 초유의 전 국민 여론조사가 시행됐지만 공법은 당장 시행되지 못했다. 여론조사 결과 찬성과 반대는 약 60대 40으로 나뉘었다. 또한 지역마다 입장이 달라 한강을 기준으로 북쪽 지방에서는 반대표가 많이 나오고, 남쪽 지방에서는 찬성표가 많이 나왔다. 토지의 생산량 차이 때문이었다. 매년 일정액을 내게 될 경우 수확량이 많지 않은 북쪽에서는 자칫 먹고 살 양식까지 없어질까 걱정했고, 반대로 풍요로운 남쪽에서는 일정액만 내면서 많은 소득을 누릴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굳이 여론조사를 실시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반대하는 관료들에게 공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명분을 보다 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여론조사 과정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있었다.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60대 40이라는 수치는 아무래도 미묘했다. 찬성이 반대보다 많다지만, ‘압도적 지지’라고 내세우기에는 부족했다. 흉년에도 일정액을 내게 된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앞섰던 걸까? 내용을 전하는 관리들의 성의가 부족했을까? 반대론을 제압하지 못한 세종은 일단 시행을 유보했다. 몇 년 뒤(1436년) 다시 제기했다. 공법 실시를 널리 지지했던 충청·전라·경상 지방에만 일단 실시한다는 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이 무심했다.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흉년이 2년간 계속되는 바람에, 공법을 실시할 여유가 없었다. 흉년이 지나가자 신하들은 이 대흉년을 근거로 정액세제 시행을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결국 타협했다. “풍년과 흉년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의견은 수용하되, 이제까지와 같이 작황에 따라 세액이 바뀌는 게 아니라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아홉 등급으로 나눈 세액을 미리 정하고 그해의 작황에 맞는 액수를 징수하도록 했다(연분구등법). 논밭의 품질도 일정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수용해,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을 달리하도록 했다(전분육등법). 세종 26년(1444년) 개혁안을 처음 꺼낸 지 17년 만이었다. 정액세제가 되면서 국가의 세수는 약 2배로 증대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 문제도 해결됐다. 그러나 당초의 개혁안에서 후퇴하는 바람에 조세 형평성과 백성들의 살림살이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미리 정한 등급대로 한다지만 지주들이 그해의 작황을 줄여 보고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낮은 등급의 땅으로 등록하고 세금을 줄이는 일도 피하지 못했다. 절반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야심적인 개혁 프로젝트가 실패(적어도 절반 이상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세종은 처음부터 너무 이상적이고 완성된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현실에 적용해 나가는 동안 불거진 문제점을 빌미로 개혁을 후퇴시키려는 움직임에 쉽게 대응할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조화로운 의사결정을 지향했던 세종의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개혁에는 때로 독불장군식 뚝심이 필요한데, 반대 의견에 일일이 귀를 기울여서는 필요한 추진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조> 허점으로 시작해 성공으로 끝내 정조>  | ▶세종은 역할모델로 삼았던 정조는 정쟁의 틈바구니를 헤쳐온 왕답게 현실적인 과정을 통해 개혁을 추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사진은 MBC TV ‘이산’. | |
반면 정조의 신해통공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 까닭은 세종의 실패 원인을 하나씩 뒤집어 보면 나온다. 우선 정조가 처음 신해통공을 결정한 자리는 보통의 조회가 아니라 특별한 인사들만 불러서 보고를 받고 의견을 듣는 차대(次對) 자리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은 노론, 소론, 남인이 두루 섞여 있었지만 그 면면을 보면 정조 지지파이거나 적어도 온건한 입장의 사람들이었다. 신해통공을 발의한 채제공은 정조가 누구보다 신임하는 남인 재상이었다. 그리하여 초기에 별로 반대가 나오지 않았다. 또 세종의 공법과 달리 정조의 신해통공 초안은 허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시전 상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게 문제였다. 당초 시전 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을 허용했던 이유는 그들이 왕궁의 생활용품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무는 계속 부과하면서 특권을 없애니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형평성 문제도 있었다. 얼마 후 이런 비판이 제기되자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 채제공을 탓하는 척하며 비판을 제기한 노론의 입장을 세워 주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보완한 후 정조 18년(1794년) 이른바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갑인통공을 통해 정책을 완결지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눈여겨볼 것은 사상도고(私商都庫)라 불리는 신흥상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들은 조선 전기부터 내려오는, 특권은 없지만 재력은 만만치 않던 신흥 상인들이었는데 정조 때 와서 상당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자신의 개혁을 힘껏 지지해 줄 세력을 찾아냈던 것이다. 나중에는 이들 또한 횡포와 독과점 같은 폐해의 장본인이 되었지만 정조는 개혁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이익을 좇는 인간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또한 기존 세력의 힘을 빼고 자신의 왕권을 확실히 하는 문제를 무엇보다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백성에 모두 이익이 되는 완벽한 제도를 찾아내고자 골몰했던 세종의 진정성을 더 높이 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한 이상보다는 성공한 현실이 더 값지다. 정조는 하나의 개혁공식을 만들었다. 개혁의 첫발은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힘차게 내디딘다, 처음에는 일부러 허술한 개혁안을 내놓고 절충과 보완을 통해 과정을 주도한다, 개혁으로 이익을 보게 될 세력을 끌어들여 지지기반을 확보한다. 정조는 채제공을 앞세운 후 그의 등 뒤에 숨어 개혁의 승부수를 던졌으나, 홀로 전선에 나섰던 세종은 오른팔과도 같았던 황희의 공개적 지지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항상 책을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얻고, 폭넓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세종.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를 헤치며 익힌 지혜·천부적 재능을 무기로 신하들을 앞질러 가려 했던 정조, 민생정책을 개혁하는 추진력으로만 본다면 아무래도 정조의 판정승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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