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가톨릭 보루 스페인의 ‘종교 개혁’
유럽 가톨릭 보루 스페인의 ‘종교 개혁’
30년 전 스페인에서 프랑코 시대가 끝나고 새 헌법이 발효된 지 며칠 뒤 새 정부는 교황청에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정교분리 원칙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가톨릭이 자립하는 날까지 예전처럼 재정 지원을 계속한다는 약속이었다. 재정 지원은 지금도 계속된다. 국고보조, 면세, 세제특혜의 형태로 정부가 교회에 지원하는 돈은 연간 약 50억 유로로 추산된다. 그 돈은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지원, 교회재산 관리, 교도소와 병원의 가톨릭 시설 관리에 쓰인다. 정부는 이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멀찍이 떼어 놓으려 한다. 국민의 신앙심이 시들해지는 분위기를 이용해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는 2006년 교회의 부가세 납부 면제 조치를 철회했다. 또 납세자들이 교회에 기부한 돈과 그해 교회예산 1억4400만 유로 사이의 차액을 보전해 준다는 다분히 상징적인 정부 보장도 철회했다. 총리는 세속적 색채가 뚜렷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학교에 성교육을 도입하고, 정부예산으로 사후피임약을 무료 제공하려는 계획 등이다. 어떤 점에서 사파테로의 조치는 서유럽의 방향 전환을 상징한다. 유럽의 종교세계에서 차지하는 이슬람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데 반해 기독교인들은 점점 세속화한다. 각국 정부는 그 두 가지 추세에 대응하려고 애쓴다. 교회의 국고 지원을 삭감하는 한편 다른 주요 종교의 지원을 확대한다. 모든 종교를 고루 지원하면 특정 종교가 공식 인가된 종교라는 지위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독일은 오래전부터 공립학교의 기독교 교육을 지원해 왔으며 이제는 이슬람을 포함한 다른 종교의 교육으로도 그런 지원을 확대했다. 영국 정부 역시 이슬람 신자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국고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성공회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도 있다. 성공회는 여전히 강력한 상징적 지위를 누리며 국고로 지원하는 전체 초등학교의 4분의 1을 후원하지만 권위에 도전을 받고 있다. 예컨대 정부는 다른 종교단체는 배제하고 성공회 주교와 대주교에게 상원의원 26석을 할당하는 현 제도의 개혁을 논의했다. 아일랜드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교회 출석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섹스와 결혼에 관한 가톨릭의 전통적 견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정부는 공립학교 운영을 좌지우지하는 교회의 결정권을 제어할 방안을 연구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오래전부터 루터 교회와 국가의 정식 분리를 논의해 온 끝에 조만간 주교 임명권을 교회에 넘길 참이다. 전에는 내각이 주교를 임명했다. 주교는 노르웨이의 다른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신분이다. 그리스에서는 동방정교회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마약, 섹스, 사법제도 개입 등의 교회 스캔들이 이어지자 종교의 정부 내 지위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5년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근 65%가 정교분리를 지지했다. 이민자 증가가 이 같은 추세의 일부 원인이다. 현재 유럽연합에 사는 이슬람 신자가 1600만 명이고 전체적으로 교회 출석률이 떨어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정부로선 특정 종교의 특혜조치를 정당화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사파테로는 스페인의 4대 종교(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가 좀 더 동등하게 경쟁할 마당을 만들려고 한다. “역사적으로 유럽의 기독교 왕국이라 불렸던 시대가 끝나간다”고 종교·사회 정책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영국의 두뇌집단 에클레시아의 조너선 바틀리가 말했다. “대규모 이민, 민주주의 성장, 사회의 세속화, 종교단체의 복수화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만인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단일 대형 교회는 이제 없다.” 많은 나라가 거북이 걸음으로 이런 과정을 밟아왔다. 헌법을 고치고 관료주의의 벽과 오랜 역사를 극복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파테로는 비교적 단시일에 교회의 영향력을 단계적으로 축소했다. 엄밀히 말해 스페인에는 국교가 없기 때문이다. 인구의 약 80%가 가톨릭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대다수 국민이 교회에는 어쩌다 한 번씩 세례 등의 기회가 있을 때나 간다. 가톨릭 신자인 사파테로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으며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신앙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2004년 시작된 총리직 첫 임기 때는 평등사상을 구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스페인 주교단의 분노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하고 동성애자의 양자 입양권을 인정했으며 이혼절차를 간소화하고 공립학교 교과과정에서 종교교육을 뺐다. 2006년 말에는 심한 논쟁 끝에 마침내 교회의 부가세 면세조치를 없애기로 교회 측의 동의를 얻어냈다. 대신 납세자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기부하는 소득세의 비율을 인상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기로(현재 발효 중) 했다. 사회당의 기독교 정무담당인 카를로스 가르시아 데 안도인은 사파테로가 정치생활과 종교의 분리를 신봉하는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런 정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그의 조치는 일관성 있고 인기 높은 정치목표를 중심으로 좌파를 결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파테로가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배반했다는 주교들의 비난은 그의 지지자들을 오히려 더욱 결속시킨 듯하다. 최근 마리아 테레사 페르난데스 데라 베가 부총리는 이제 집권 2기를 시작하는 정부는 천주교의 독점적 지위를 끝내는 문제를 계속 연구하겠다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페인은 교회에서 더욱더 멀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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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TRACY MCNICOLL in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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