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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화교도 이젠 구정을 만끽할 수 있다. |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웅장한 국가수영장 ‘워터큐브(물방울 입방체)’는 건축미로 격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수영장은 색다른 특징이 또 있다. 건축비 1억5000만 달러 전부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화교 4000만~5000만 명이 갹출한 성금으로 조달했다는 사실이다. 기부자 중엔 자카르타에 사는 인도네시아인 리초휘도 있다. 그는 100달러를 내고 중국 정부로부터 성금 납부 확인증을 받았다. 리는 “나는 100퍼센트 인도네시아 사람이지만 올림픽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내 몸에는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문화도 같다.” 10년 전 같으면 리가 그런 감정을 드러냈을 리 없다. 동남아에 사는 3000만 화교의 역사는 차별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동남아에서 화교 세력이 가장 큰 인도네시아가 특히 더 심했다. 그곳의 마지막 화교 배척운동은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일어났다. 폭도의 손에 목숨을 잃은 화교가 1000명으로 추산된다. 이제는 그것도 옛 이야기로 느껴진다.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그리고 중국의 국력 신장과 국위 덕분에(사업 파트너로서의 매력도 커졌다) 화교 사회가 전례 없는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하고,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민족 자부심을 과시한다. 인도네시아의 변화가 특히 두드러진다. 현 통상장관 마리 판게스투, 서칼리만탄 부지사, 상당수의 시장, 10여 명의 국회의원(이들이 인도네시아 이름을 쓰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등 많은 화교가 인도네시아 정계에 진출했다. 그 수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진행되면서 정당들이 화교 문화단체들에 접근해 후보를 물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5월 폭동 이후 화교의 정체성 인식이 고조되면서 그들이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가입하기 시작했다”고 나탈리아 소에바교가 말했다. 그는 자바 출신으로 인도네시아 대학이 2000년 설립한 중국연구센터의 부소장이다. “화교가 전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개혁 전엔 입을 여는 화교 출신 정치인이 거의 없었다. 이제는 상당수가 참여한다.” 8년 전만 해도 중국 표준어로 방송·출판을 하거나 홍등을 내걸었다가는 당장 감옥행이었다. 요즘엔 사방에 중국 상징물이 눈에 띈다. 쇼핑몰 개관을 기념하는 즉흥 용춤놀이(화교 아닌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이나 중국 드라마 DVD를 파는 가게 등 중국식 멋이 유행한다. 광고판엔 서양 모델 대신 화교 모델이 등장했다. 미스월드 대회의 인도네시아 대표에도 최초로 화교가 선발됐다. 이런 변화 덕분에 쓰라린 역사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간다. 수하르토 장군은 1965년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면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50만~300만 명이 학살됐다(정확한 피해자 집계가 없다). 화교가 원주민보다 월등히 많은 비율로 희생됐다. 가뜩이나 재계 영향력으로 미움 받던 그들이 좌익단체에 가입했고 중국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다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1968년 대통령에 취임한 수하르토는 그 뒤로 중국 문화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했다. 화교는 심지어 창씨개명의 압력까지 받았다. 그러다가 2000년 압두라만 와히드가 민주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뒤부터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는 한자 사용과 중국 문화상품의 수입 금지를 해제했다. 그의 후임자는 구정을 공휴일로 정했다. 2006년 국회는 모든 화교가 법적 절차를 거칠 때 별도 허가증을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한 ‘시민권 증명법’을 철폐했다. 곧이어 중국어 사용 금지가 해제되고 TV와 라디오 방송에 중국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에 한자 신문이 단 하나였고 그마저도 군부의 통제를 받았다. 이제는 한자 신문이 3개로 늘었다. 그 가운데 최대 신문인 궈지르바오(國際日報)는 발행부수가 6만 부이며 중국 신화통신의 기사를 게재한다. 중국에서 온 책과 CD가 불티나게 팔린다. “요즘은 금기가 사라졌다”고 베니 세티오노가 말했다. 그는 2003년 인도네시아 화교의 역사에 관한 책을 냈으며 1960년대 대학살도 사실 그대로 다뤘다. 화교 어린이는 전에는 인도네시아어 학교에 의무적으로 다녀야 했다. 이제는 중국어가 국가 교과과정에 편입됐고, 중국 정부가 교사 훈련을 지원한다. “우리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젊은 세대의 책무다. 그러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고 자카르타의 비나누산타라 대학에서 설립 8년을 맞은 중국어 클럽의 회장 아디(20)가 말했다. 이 클럽은 정회원이 473명이며, 그중 약 10%는 화교가 아니다. “모든 게 개방됐다”고 회원 펜디가 말했다. “뭐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물론 인도네시아인들은 경제 사정상 중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아디는 “중국에서 배울 게 많다. 30년 전엔 그들도 우리처럼 가난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이제 인도네시아의 셋째로 큰 교역 상대다. 지난해에는 중국이 지원하는 121개 건설 프로젝트가 승인됐다(2002년 대비 거의 20배 증가했다). 총 9억 달러 규모로, 이로써 중국은 인도네시아에서 제5위의 투자대국이 됐다. 두 나라는 2005년 관계개선을 목표로 전략적 동반자관계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새로운 중국의 자부심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다. 윌라 찬드라윌라 수프리아디는 2006년 화교 여성으론 최초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65세인 그녀는 민주화 개혁을 대부분 지지하지만 수십 년 동안 강제 동화정책의 고통을 겪은 탓에 중국 문화의 과시가 불안하기만 하다. 젊은이들이 “중국을 동경하는데 그건 잘못”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려면 모든 문화적 차이를 벗어나 진정한 인도네시아 국민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역풍을 두려워하는 화교도 적지 않다. 리초휘가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에서 운영하던 전자상품 가게는 1998년 폭도의 난동으로 전소됐다. 리는 “언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올림픽을 기준으로 보자면 인도네시아 화교의 애국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드러난다. 인도네시아는 배드민턴에서 금메달 단 한 개를 땄다. 중국 팀을 물리치고 딴 것이다. 리초휘는 너무 신난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 몸에는 중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난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자랐으니 당연히 인도네시아가 이기기를 바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베이징 올림픽에 보낸 대표단 중 최고위직이 체육부 차관보였다. 이웃 대국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여전한 이중심리를 반영하는 듯하다. 또 TV 채널 하나만이 올림픽 경기를 중계했다. “우리 선수단이 입장할 때 손을 흔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라고 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 번 옳은 얘기다. 하지만 그가 이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도네시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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