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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게 신뢰부터 회복하라

침착하게 신뢰부터 회복하라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참 답답하다. 미국발 금융 쓰나미에 시장이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왔다 갔다 하는데도 도무지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 이미 ‘국민 재테크 수단’이 된 펀드 가입자들은 주식시장이 폭락과 반등을 거듭하는 사이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간다.

환율이 몇 십원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환 헤지 통화옵션 상품 키코(KIKO) 거래를 한 중소기업과 유학생 자녀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 가정에선 심한 현기증을 느낀다. 실제로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신청 소식이 전해진 9월 15일 오후(한국 시간) 당사국인 미국은 물론 다른 주요 국가들도 바삐 움직였다.

중국은 6년 만에 금리를 인하함으로써 경기 부양에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유럽중앙은행과 영국중앙은행은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일본도 이날 밤 리먼브러더스증권 일본법인에 대해 예탁자산의 반환을 제외한 나머지 업무를 정지시키고 일본 리먼에 대해 자산의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함께 내렸다.

이튿날 단기 금융시장에 1조5000억 엔을 긴급 지원하는 한편 일본은행 총재가 “금융시장 안정 확보에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들 국가와는 달리 한국은 너무 조용했다. 아무리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라지만 15일 오후 늦게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관계자들이 모여 상황을 점검하는 데 그쳤다.

차관급 회의는 추석 연휴를 다 찾아먹은 이튿날 아침, 장관급 회의는 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3시간 뒤인 정오에야 열렸다. 그리고 ‘금융시장안정대책팀’은 쓰나미가 시장을 한바탕 휩쓸고 난 이튿날인 17일에야 구성됐다. 특히 금융위원회는 15일 오후 언론사에 돌린 보도자료에서 “16일 시장이 열리기 전 리먼 서울지점에 금융감독원 검사 인력을 파견해 재산 상태를 실사하고 국내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반 업무를 신속히 수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웃 일본 정부는 미국 본사의 파산신청 소식에 맞춰 ‘신속하게’ 업무 정지와 자산 해외유출 금지 조치를 취한 반면 한국 정부는 연휴 다음날 실태를 점검하겠다는 수준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일본 정부의 조치가 전해지자 16일 아침이 돼서야 서울지점 두 곳의 일부 영업을 정지시켰다. 정부의 외화자금 조달 정책도 문제투성이다.

9월 위기설 속 주식·외환시장이 홍역을 치르자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을 발행하기 위해 해외 IR(투자 설명회)에 나서면서 가산금리를 2%포인트 이내로 생각한다고 떠벌리고 다닌 것부터가 실책이다. 패를 다 보여주니 상대방이 더 높게 베팅하고 나서는 게 당연하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비행기 타고 뉴욕까지 날아가 장이 서지 않자 좌판만 거둬 돌아왔을 뿐 현지 월가에서 벌어진 쓰나미 징조에는 둔감했다.

뉴욕에서 철수한 직후 리먼·메릴린치·AIG 사태가 줄줄이 터지고 가산금리는 더 높아졌는데 그들은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왔을까? 우리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도, 해외시장에 대한 정보력에도 문제가 심각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지경이니 시장에선 정부더러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쳐올 때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문제없다”고 강변하더니만,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에는 대형 악재가 터질 때마다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장담하는 식으로 레퍼토리가 바뀌었다. 하지만 시장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다른 나라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아 금융시장에 이어 실물경제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든다. 경제는 상당 부분 심리다. 그리고 시장은 심리를 먹고 산다. 100년에 한 번 올 수 있는 큰 사건이라는 이번 금융위기, 정부·기업·가계 등 경제주체가 함께 손을 잡고 이겨내야 한다. 예고된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정부가 중심 잡고 믿음 보여라

세계 금융시장은 거미줄과 같다.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데도 흔들린다. 미국발 쓰나미 후폭풍이 몰고 온 시장의 공포 심리를 차단하려면 정부부터 중심을 잡아야 한다. 환율을 더 이상 정책 변수로 쓰지 마라. 환율은 경제운용의 결과다. 수출을 촉진하려고, 물가를 잡으려고 또다시 환율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려 들다간 지난 6개월 동안 학습한 시장이 먼저 이를 악용할 게다. 외환보유액 확보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필수 실탄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미국에 달러가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만약 문제가 터지면 미국과 일본이 그때처럼 도와줄까? 실탄을 함부로 쓰지 마라. MB정부가 출범한 지 8개월째다. 대외환경 탓, 재수 탓 좀 그만 해라. 조급증을 버리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실력으로 믿음을 회복하라.



■실물경제에 미칠 타격 최소화하라

글로벌 금융불안과 그에 따른 세계적인 경기침체는 오래갈 것 같다. 그 여파로 그나마 우리 경제를 지탱해 온 수출 여건마저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과감한 규제 혁파로 기업 투자를 유도해 고용사정 악화를 막고 내수 경기를 살려야 한다. 국내 리스크 관리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부동산 경기 위축에 따른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우려와 가계부채 문제가 큰 걱정거리다.

KIKO 거래로 손실을 본 중소기업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일시적인 신용경색을 막기 위한 신속한 유동성 공급체계 확보는 기본이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아래로 내려갔지만 물가불안 심리는 여전하다. 물가 관리에 계속 신경 써야 한다.



■경제부총리제 도입 필요하다

성장이냐 (물가)안정이냐, 이에 따른 환율정책을 놓고 기획재정부와 청와대 참모, 한국은행 간에 엇박자를 낸다. 업무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그나마 내놓는 대책도 뒷북치기에 급급하다. 9월 위기설로 촉발된 금융시장 불안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발언한 한국은행 총재에게 국무총리가 엇박자 내지 말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한국은행에선 시장 상황을 보라며 불쾌해 한다.

재건축·재개발 활성화와 신도시 건설 등 건설경기 대책을 놓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도 마찬가지다.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가 없어 부처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과 기업이고, 경제는 계속 멍이 든다. 야당 등 여러 군데서 제기되는 경제부총리제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IB 육성 방안 재점검하자

민유성 행장이 주도한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협상은 불발로 끝났지만 국민에게는 상처를, 정책 담당자에게는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취임 직전까지 리먼 서울지점 대표를 지냈고 스톡어워드까지 갖고 있는 이가 정부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협상을 끌고 감으로써 경제팀의 협조 체제와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동시에 한국 국책은행의 신뢰도 하락은 물론 민간은행의 체면까지 구기게 생겼다.

우리 금융회사들은 그동안 경쟁적으로 ‘한국판 메릴린치’를 꿈꿔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제대로 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투자은행 모델 자체를 포기하란 것은 아니다.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하면서도 리스크 관리를 태만히 한 게 문제다. 금융당국은 글로벌 IB 육성 정책에 허점은 없는지 다시 살펴보고 자산의 건전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소모적 정쟁에서 벗어나라

온 국민이 늦더위와 금융 쓰나미 때문에 헉헉대는 판에 정치권은 당리당략 놀음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서로 입으론 민생을 이야기하면서 추경예산안 처리에 석 달이 걸렸다. 이 판에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9월 15일 느닷없이 ‘연말 안보위기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쇠고기 정국 속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경제위기론을 들고 나왔던 장본인이다. 국민의 에너지를 한곳으로 모으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진보와 보수 세력 간, 종교적 갈등도 하루빨리 해소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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