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 노는 물가에 내 아이만 못 가게 해서야”
“모든 아이 노는 물가에 내 아이만 못 가게 해서야”
서울 여의도 증권가 야경. |
지난 10월 24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 한국증권업협회 23층 회장실 옆 회의실에는 협회 임원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날은 코스피 지수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여겼던 1000선이 속절없이 무너졌던 날이다. 이날 코스피 지수는 전날보다 110.96포인트 폭락한 938.75로 장을 마감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 쓰나미가 한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시장의 공포감이 극에 달했던 순간이다. 유일한 위안거리를 찾으라면 증시가 문을 닫는 토·일요일로 이어져 폭락 장세가 잠시 멈춰 선다는 사실뿐이었다. 임원회의를 소집한 황건호 한국증권업협회 회장은 굳은 얼굴로 회의장에 들어가면서 “국민에게 사과의 말씀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지…”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증시가 다음주 들어 한·미 통화스와프(상호 교환) 계약에 따라 외환위기 불안심리가 해소됨으로써 1000선을 다시 회복했기 때문이다. 국내 투자자들은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경험을 한 셈이다. 실제로 24일엔 공포가 공포를 낳았다. 시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증시가 주저앉으면 내년 2월 시행 예정인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통법)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자통법은 한국 금융기관의 대형화·선진화와 경쟁력 강화를 꾀한다는 취지에서 지난해 8월 3일 제정·공포됐다. 은행과 보험을 제외한 증권사(증권거래법), 선물회사(선물거래법·증권선물거래소법), 자산운용사(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신탁회사(신탁업법), 종금사(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를 하나의 업종으로 묶어 대형 투자은행(IB·Investment Bank)을 만들자는 법이다.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의 진앙지로 손꼽히는 미국의 골드먼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같은 투자은행을 모델로 삼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지만 않았더라도 이 법은 국내 자본시장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목표 아래 시행절차를 밟았을 듯하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려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 9월 29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자통법의 시행을 1년간 연기하자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의원은 “자통법이 시행되면 신종 파생상품의 출현이 예상되는바 최근 미국발 신용위기는 각종 파생상품의 구조적 위험에서 야기됐다”고 이유를 댔다. 법 시행 이후 쏟아져 나올 신종 파생상품 현황파악 방안, 감독 방안, 규제 방안에 대한 신중한 논의를 거쳐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일반인 입장에서도 미국의 투자은행 상위 5개사 가운데 3개사가 공중 분해되고, 2개사(골드먼삭스, 모건스탠리)는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한 마당에 자통법의 모델이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법한 상황이다. 일부 경제학자도 정부와 정치권이 해외시장 변화를 너무 가벼이 보아 넘긴다고 비판한다.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IB 기능은 필요하며, 자본시장은 잘 돌아가야 한다”면서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전의 인식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법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리·감독의 부재와 IB 모델의 실패를 동전의 양면으로 설명했다.
즉, 증권회사에 대한 총 부채 규정 면제를 허용해 미국 투자은행의 몰락을 불러온 CSE(통합감독대상·Consolidated Supervised Entities) 시스템은 IB들의 끈질긴 로비의 결과였고, IB를 원활하게 가동하자면 ‘감독의 부재’가 불가피했다는 해석이다. 이 연구위원은 한국의 자통법도 이런 시스템에 따라 설계됐기 때문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로서는 글로벌 스탠더드 자체가 파탄 났고, 변화 국면에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요즘 자통법을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선다. 시행 쪽에서는 ‘교차로에서 사고가 난다고 차량운행을 금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반대 쪽에서는 ‘교통질서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와 한나라당은 예정대로 법 시행을 강행한다는 방침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10월 16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 답변에서 “자통법 도입 취지는 은행 중심의 편중된 금융산업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고 비은행, 특히 낙후된 금융투자업을 활성화하자는 것으로 연기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최경환 수석정조위원장도 뉴스위크 한국판과 전화통화에서 “법은 예정대로 시행되며, 법안을 수정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의 자본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뿐 미국 투자은행과는 환경이 달라 법안을 수정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야당에서도 예정대로 시행하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민주당 정무위원회 간사인 신학용 의원은 “당론을 수렴해 봐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론 한국도 투자은행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제가 되는 파생상품 감독 기능 등도 자통법을 손대는 것보다는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 자체 규정 등을 강화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신 의원은 덧붙였다.
양당의 기류로 봐서는 자통법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내년 2월 원안 시행으로 갈 공산이 더 큰 게 사실이다. “법안의 보완이 필요한데 민노당의 원내 세력만으로는 약해 보인다”고 홍익대 전성인 교수(경제학)가 말했다. 증권업계의 시행 불가피론은 더욱 크게 들린다. 김형태 한국증권연구원장은 지난 9월 투자은행(IB) 비즈니스 모델이 실패했다는 주장에 대해 “IB 자체가 실패한 게 아니라 헤지펀드형 모델이 실패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 원장은 특히 “IB 기능은 영원히 존속될 것”이라고 법 시행의 당위성에 힘을 실었다. 한국증권업협회 박중민 법무지원실장도 “관리·감독의 부재일 뿐 IB 모델의 문제는 아니다”고 이에 가세했다. “한국의 자통법은 후발주자로서 여러 가지 선진모델을 참고했으며, 그만큼 파생상품 관련 규제도 상당수준 완비했다”고 ‘후발주자로서의 이익’을 부각시켰다.
자통법 시행에 대한 증권업계의 목소리에는 절박함도 담겨 있다. 전광우 위원장 말대로 은행 중심의 금융산업을 균형 발전시키는 게 자통법의 본래 취지며, 법안의 성격도 대형 투자은행이 증권사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 시행으로 국내 증권사들은 해외로 진출하는 동력까지 얻게 된다는 기대감도 있다.
증권업협회는 국내 증권사들의 신흥시장 진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지난 10월 이들의 시장 진출에 필요한 조사·연구를 전담하는 ‘이머징마켓 지원센터’를 설립했다. 지원센터를 이끄는 강석훈 부장은 “자통법은 증권사들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국내 시장을 벗어나 해외 신흥시장으로 진출하는 디딤돌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협회 측은 이미 2006년부터 매년 아시아 신흥시장 증권사 임직원들을 국내로 초청해 한국 자본시장을 소개하는 연수 프로그램을 운용해 왔다. 자통법 시행과 함께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증권사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한신정평가 김영섭 책임연구원은 ‘최근의 미국 금융위기가 국내 증권사에 미치는 영향 및 시사점’ 보고서(10월 6일자)에서 주요 공기업 민영화와 공기업 지분 매각 추진과정에서 국내 증권사의 개입을 유도하는 정책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동안 정부가 수익성 규모가 큰 대형 거래에서 경쟁력 우위에 있던 글로벌 투자은행을 선정해 왔지만 최근 외국계 투자은행의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국내외 상황에서 대형 거래에 국내 증권사를 우선적으로 선정하거나 필수적으로 포함시킬 명분이 커졌다. 국내 증권사도 투자은행 역량을 강화할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트랙 레코드(실적, Track Record)를 쌓을 기회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론적으로, 내년 2월 시행될 자통법은 예정된 수순을 밟아갈 것이란 예측이 유력하다. 자통법 관련 실무작업을 담당했던 금융위 자본시장과 변제호 사무관은 “9월 들어 처음으로 자통법 시행 연기 주장이 제기됐지만 지금은 수그러든 상태다”고 말했다. 그는 법안 시행 유보는커녕 법 개정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논란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고 보기엔 이르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부이긴 하지만 여당에서조차 신중론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2002년 한나라당 공적자금 국정조사특위위원장을 지냈던 박종근 의원은 “자본시장 자유화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미국판 금융 불안과 같은 위험요소가 없는지 자통법을 신중히 뜯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25일 창립 55주년을 맞는 증권업협회는 내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자통법 시행에 따라 자산운용협회, 선물협회와 함께 ‘한국금융투자협회’에 합병된다. 황건호 증권업협회장은 자통법을 빗대 “모든 아이가 노는 물에 내 아이만 못 가게 해서야 되겠느냐”고 말한다.
그래서는 영영 수영을 못 배울 거라는 얘기다. “지금은 물가에 보내되 깊은 데는 못 들어가게끔 감시·감독하는 게 필요할 뿐이다.” 문제는 그 시기가 미국발 금융 쓰나미가 불어 닥친 시점이라는 것이다. 국내 증권업계의 미래가 걸린 법안치고는 참 기구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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