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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에 취해 고독을 즐긴다

묵향에 취해 고독을 즐긴다

김천식 반디앤루니스 사장은 67세에 서예를 배워 2년 만에 서예 그룹전을 가졌다. 그는 묵향을 맡으며 붓글씨를 쓰다 보면 잡념이 사라져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앞으로 계획은 희수(77세)에 개인전을 여는 것이다.

"밭이 있어도 갈지 않으면 창고가 비고,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어진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지은 ‘권학문(權學文)’의 주요 내용이죠. 학문을 평생 갈고 닦아야 한다며 배움의 중요성을 노래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예요. 2월 18일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서예 전시회 ‘묵인회전’에 출품했던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김천식(69) 반디앤루니스 사장. 작품은 이미 한 개인 사업가에게 팔려 전시회 책자로만 볼 수 있다.

김천식 사장이 서예를 처음 접한 것은 2년 전인 67세 때다. 그는 이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종로구 인사동 부근의 서예실 ‘오거서루’에서 서예를 배웠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중국 고전에 밝아 한자 서예를 익히는 속도가 남보다 빨랐다고 한다.

요즘에는 한 번 붓을 잡으면 고전시 한 편을 막힘 없이 써내려 간다. 김 사장은 서울대 상대를 나와 1976년 현대그룹에 입사해 현대건설 전무, 현대증권 전무 등을 거친 후 92년 서울문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서울문고는 88년 그가 현대증권 전무 시절에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 세운 서점이다.

샐러리맨에서 CEO로 제2의 인생을 준비했던 것. 그는 2000년에 서점 이름을 반디앤루니스로 바꾸고 매장 규모를 넓혀 대형 서점으로 키웠다. 현재 반디앤루니스는 영풍문고, 교보문고와 더불어 대형 오프라인 서점 중 하나로 성장했다. 매장은 삼성동, 종로, 건대 스타시티, 사당, 신림, 목동, 창원 등 7곳에 있다.

김 사장이 취미 생활로 서예를 택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문에 관심이 많다. 95년부터 문화 후원사업으로 반디서당 ‘구경서숙(久敬書塾)’을 운영한다. 구경서숙은 <논어> 에 나온 얘기로 오랫동안 공부하고, 서로 공경하는 모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삼성동 무역센터 전시장에서 약 70여 명이 수업을 듣는다.

수업료는 없다. 한문에 조예가 깊은 김병애 선생이 <명심보감> <맹자> <논어> 등 중국 고전을 가르친다. 김 사장 역시 이곳에서 수업을 듣는다. 그는 “중국 고전은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어 배우면 배울수록 삶이나 경영에 도움이 되는 얘기가 많다”고 말한다. 서예를 택한 데는 건강상의 이유도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적록색맹이다. 붉은색이나 녹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봄이면 시골집 마당에 상추 새싹이 돋아나죠. 연두 새싹이 그렇게 예쁘다고 하던데 제 눈엔 싹이 안 보이죠. 새싹이나 흙이나 같아 보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검은 먹물 하나로 표현이 가능한 서예가 좋을 수 밖에 없죠.”

그는 서예가 CEO의 취미 생활로 유익하다고 추천한다. 가장 좋은 점은 경영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것. 샐러리맨에서 CEO로 변신한 그는 “CEO가 갖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한다. “월급쟁이는 남의 샅바 가지고 씨름하는 거죠. 돈과 기회를 주고 너의 실력대로 해보라고 하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사장은 뛰어난 사업 계획이 있어도 도전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투자 위험을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쌓입니다.”

서예를 배우면서 김 사장은 스트레스가 줄었다. 요즘엔 묵향만 맡아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신기하게도 하얀 전지 위에 한자를 공들여 쓰다 보면 머리가 맑아집니다. 서예가 두통약보다 낫더군요.” 사무실에는 붓과 벼루 등 서예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갖추고 있다. 일을 하다가 머리가 아프면 짬을 내 붓글씨를 쓴다.


그룹전에 출품한 백낙천 시인의 ‘권학문’.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후에 일을 하면 집중력이 높아져 일 처리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키울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붓글씨를 제대로 익히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붓글씨란 획이 정확하고 글자에 힘이 있어야 한다.

“붓이 가는 길을 중봉(中鋒)이라고 하는데요. 붓끝이 항상 점과 획의 중앙에 있는 거죠. 중봉이 정확해야 글이 물 흐르듯 써지고, 글자에 힘이 느껴지죠.” 무엇보다 기초가 튼튼해야 중봉이 가능하다.

수백 번 한자 획 하나를 정확히 긋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김 사장은 강조했다. 꾸준한 연습이 쌓일수록 글이 반듯해진다. 그가 서점을 차린 이유 역시 삶의 근본이 되는 게 독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세상이 빠르게 바뀔 때는 가치관이 흔들리기 쉽죠. 깊이 있는 독서로 삶의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CEO도 마찬가지죠.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경영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책과 관련된 문화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6월에는 시와 사진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지난해 9월에 연 ‘사진에 기대어 시를 읽다’ 전시회 반응이 좋아 두 번째 전시회를 기획했다. 사진작가의 작품에 시인들이 글을 짓는 방식이다. 구경서숙 외에도 어린이 한자 교실을 운영한다.

매주 일요일 종로타워 지하 1층 반디앤루니스 북 카페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천자문 수업이 열린다. 앞으로 김 사장의 개인적인 바람은 서예 개인전을 여는 것. “배움에 있어 나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취미 생활이 하나씩 필요하죠. 서예를 시작하면서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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