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에나의 색, 세상을 물들이다
어린 시절, 크레욜라 크레용은 경탄의 대상이었다. 초등학생 때 특히 매료됐던 색은 바로 ‘번트 시에나(burnt sienna, 시에나의 흙을 구운 색)’였다. 갈색도 아니고 붉은색도 아니지만 흙으로 만들어낸 듯했고,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번트 시에나에 가졌던 호기심과 애정은 이탈리아 시에나의 두오모 미술관 꼭대기에서 두오모 광장과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면서 다시 살아났다. 처음에는 단조로운 갈색으로만 보였지만 모양과 무게감을 갖추더니 따뜻한 느낌으로 변하며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고, 곧 수십 개의 색조로 나뉘었다.
번트 시에나 색을 떠올린 순간 도시의 이름을 따서 크레용 색깔 이름을 지은 일이 그렇게 우습거나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도 그 역사적인 도시 중심부의 좁은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곳곳에서 번트 시에나 색이 느껴졌다. V자 모양으로 경사진 중세의 웅장한 캄포 광장은 붉은 벽돌색이었고, 푸블리코 궁전은 오후 햇살 속에 반짝거렸다.
아파트 건물벽은 오징어 먹물색, 물결 모양으로 늘어선 지붕은 오렌지 빛을 띤 붉은색으로 넘실거렸다. 그처럼 강렬하지만 제한적인 색깔의 한복판에 흑백 줄무늬의 장엄한 시에나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다른 도시의 단조로움 속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돋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갈색 말 떼 속에 섞인 얼룩말 한 마리, 인간이 사는 건물들 속에 들어선 신에게 바쳐진 제단 같았다.
번트 시에나는 흙에서 채취한 안료를 구워 만든 색이다. (물론 이는 특별한 방법이 아니다. 잔디밭에 앉았다가 옷에 얼룩이 묻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색은 꽃잎·흙·광석 등에서 채취해 만들어지지, 크레욜라가 창조해 내지는 않는다.) 번트 시에나 색은 특정 산화철 안료(시에나에서 발견되는 흙)에 열을 가해 만든다.
관광객을 매료시키는 구운 진흙벽의 색, 시에나만의 일관된 적갈색이 바로 번트 시에나다. 14세기 시에나에선 벽돌이 편리하고 값싸고 색깔이 아름답다는 점 때문에 주요 건축재로 활용됐다.
법으로 벽돌 사용을 의무화하기도 했는데,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9인 심의회(Council of Nine)’는 매년 벽돌을 할당하는 식으로 교회를 지원했고, 1309년에는 도시 내 모든 건물을 벽돌로 짓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했으며, 캄포 광장을 비롯한 주요 도로를 구운 진흙 벽돌로 포장했다. 번트 시에나가 로맨틱한 이미지를 갖게 된 때는 19세기 이탈리아에 일종의 환상을 품은 관광객이 몰려들면서였다.
찰스 디킨스는 ‘이탈리아 여행기(Pictures from Italy)’에서 영미인들이 이국적인 ‘타자’에게 가졌던 강박관념을 풍자하듯 “셔츠와 바지를 입고 신발은 신지 않은 채 다리를 드러낸 ‘번트 시에나’ 색의 토박이 두 명이 붉은 허리띠를 차고 십이야 축제 케이크 위의 봉봉 과자처럼 보이는 성스러운 부적 혹은 기념품을 목에 걸고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디킨스를 비롯한 방문객들은 갈색을 띤 붉은 벽돌색에 지명을 딴 이름을 붙이고 ‘불타버린’이라는 신비로운 의미의 과거분사 ‘번트’를 더해 뭔가 사연이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줬다. 이들은 유구한 역사의 도시를 시에나 특유의 색과 연결시켜 예술과 신, 투쟁의 뉘앙스를 번트 시에나에 덧씌웠다.
2003년 크레욜라는 창사 100주년을 맞아 번트 시에나, 블리자드 블루, 틸 블루(암록색을 띤 청색), 매직 민트(녹색의 일종), 멀베리(진한 자주색) 등 곧 사라질 5개의 색상 중 계속 유지했으면 하는 색 1개를 선택하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총 6만여 명이 설문에 참여한 결과 번트 시에나가 1위를 차지했다. 시에나 땅을 차지하려는 역사 속의 수많은 싸움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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