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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회장 뿔났다

신격호 회장 뿔났다

▎사진:KAZUTOSHI SUMITOMO(日 주간 다이아몬드 2004년 9월 11일자 게재)

▎사진:KAZUTOSHI SUMITOMO(日 주간 다이아몬드 2004년 9월 11일자 게재)

창업자 1세대로는 유일하게 현장을 지키고 있는 신격호 회장에게 2009년은 특별한 해였다. 3월 25일 평생의 숙원이었던 제2롯데월드 사업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앞서 2월 27일에는 사재 950억원을 상황이 안 좋은 계열사에 무상 증여하면서 민심도 얻었다. 지난해 롯데칠성 서초동 물류센터 부지의 상업용 지구 용도변경, 인천 계양구 골프장 건립 심의통과 등과 함께 올해 제2롯데월드 사업이 결정되면서 오랜 숙원사업을 모두 해결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해운대의 명물 롯데백화점은 올 4월 문을 연 신세계 센텀시티점에 크게 밀렸다. 롯데 자이언츠에 애정을 보여왔던 부산 시민들은 올 3월 출시된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에는 냉담했다.

엄청난 판촉활동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매출이 오르지 않고 있는 것.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신 회장의 유별난 고향 사랑은 유명하다. 오랜 기간 부산의 저력을 믿으면서 투자도 많이 했다. 하지만 믿었던 경남의 맹주 부산이 따라와주지 않으니 답답할 만도 하다.

지난 9월 7일 오전 11시 30분 소공동 롯데호텔 37층의 한 식당. 한국을 방문한 일본 정계 실력자 가토 고이치 자민당 의원은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점심을 함께했다. 자민당 간사장 출신인 가토 의원은 두 시간가량의 긴 오찬을 마치고 나서면서 롯데 측 인사에게 신 회장의 나이를 물었다.

87세라는 대답을 들은 가토 의원은 “정말 여든일곱이냐? 무척 정정해 보이는데 대단하다”며 놀라워했다. 가토 의원을 보좌한 한 인사는 “가토 의원이 신격호 회장이 무척 건강해 보인다며 계속해서 대단하다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신격호 회장 여전히 경영 전반 챙겨

신 회장은 이 자리에서 주로 한국과 일본의 기업 운영 차이를 설명하고 본인의 해석도 덧붙였다고 한다. 신 회장은 “일본과 한국에서 호텔을 운영하다 보면 한국인 종업원들과 일본인 종업원들의 특징이 한눈에 보이는데 무척 흥미롭다”며 세부적인 사항도 설명했다.

두 사람의 점심 식사자리에 동석한 모 인사는 “3~4년 전에 신격호 회장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다”며 “가토 의원도 무엇보다 신 회장이 여전히 그룹 경영 전반에 걸쳐 정열적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9월 8일 오전 11시.

롯데그룹의 한 핵심 경영간부는 결국 외부인사와의 점심 약속을 못 지켰다. 그룹 내 요직을 맡고 있는 그는 “회장님이 한국에 계시는 홀수 달 잡은 점심 약속은 못 지키기 일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계열사 사장들이 정규 브리핑을 하지만 회장님께서 수시로 사장단을 부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면서 대기상태에 들어간다”며 “그래서 이제는 홀수 달에 어지간한 약속은 잘 안 잡는 편”이라고 언급했다.

9월 11일 현재 신격호 회장은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의 스위트룸에서 지내고 있다. 홀수 달에는 한국, 짝수 달에는 일본을 오가는 셔틀경영을 아흔을 앞둔 지금까지도 계속 중이다. 그런 만큼 신 회장으로선 최근 롯데그룹의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오랜만에 만난 가토 고이치 의원과 환담에서도 그랬듯 그는 지금 롯데의 경영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문제는 부산, 거기서 부는 ‘롯데 바람’이 그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부산은 신격호 회장이 서울에 버금가는 시장으로 일찍이 평가한 곳이다.

신 회장은 일찍이 2001년 “부산은 경남과 전남 등 남해안 지방, 그리고 일본의 규슈 지방과 중국을 배후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광객이 많이 몰려들 것”이라며 “우리가 시뮬레이션 해 본 결과 2020년에 가면 한국을 찾을 외국 관광객이 20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 대다수를 부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부산 시민들이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에 보인 특별한 애착도 그의 입장에서는 ‘부산에서라면 된다’는 자신감을 줬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근 2년간 롯데 자이언츠가 선전하면서 연간 관람객이 130만 명을 넘어서자 신동빈 그룹 부회장이 야구장을 직접 찾는 일도 늘었다.

그랬던 부산이다. 재계 한 인사는 신 회장이 롯데의 상징인 롯데백화점과 가장 최근 새로 시작한 사업인 소주가 부산 시민들로부터 시큰둥한 반응을 얻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부산을 대표하던 것 중 하나가 롯데백화점이다. 부산 시내 4개의 백화점 가운데 3곳이 롯데백화점이었다. 하지만 롯데는 신세계의 메가톤급 공격 한 방에 자존심을 좀 구긴 듯하다. 올 4월 신세계가 해운대에 5980억원을 들여 연면적 12만5620㎡의 세계 최대 백화점 센텀시티점을 개장하면서부터다.



믿었던 부산, 왜 롯데소주에 무관심했나?기존 롯데백화점과 불과 10m도 채 안 떨어져 있는 신세계 센텀시티점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었던 뉴욕 맨해튼의 메이시스를 규모 면에서 제치면서 큰 화제가 됐다. 롯데가 믿고 있던 일본 관광객들도 명품 매장이 즐비하고 온갖 편의시설이 갖춰진 옆집 신세계 센텀시티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올 5월 2일 신격호 회장이 바로 이 경쟁상대인 신세계 센텀시티점을 찾아 살펴보는 사진이 공개됐다. 당시 롯데그룹 측은 “롯데백화점 현장방문을 했다가 건물 밖에서 둘러본 것뿐”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신 회장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언론도 이를 ‘롯데가 신세계에 위기감을 느낀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에게 이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평이 설득력을 갖는다. 신 회장은 평소 신세계백화점 창업자인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높게 평가해 왔다. 신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신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병철 회장이 롯데호텔을 방문해 직접 둘러보고서 신라호텔 사람들에게 ‘롯데호텔에서 배울 것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그 뒤 신라호텔이 종업원 교육을 강화해 더 좋은 호텔이 되었으니 서로가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롯데그룹 핵심 경영진은 신 회장의 ‘센텀시티점 외곽 둘러보기’를 어떤 맥락에서 파악하고 대응했을까? 신 회장으로서는 이 점이 더 답답했을 수도 있다.

롯데그룹은 “광복동 초고층 빌딩에 백화점이 들어서는 12월에는 판도가 다를 것”이라며 설욕을 다짐했다. 야심차게 시작한 소주사업이 부산에서 맥을 못 췄다는 사실도 롯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올해 1월 전국구 소주 ‘처음처럼’을 5030억원에 인수한 롯데는 처음부터 부산시장 석권을 목표로 정했다.

수도권 시장과 부산시장을 장악하면 업계 부동의 1위 진로도 조만간 잡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롯데는 2005년 진로 인수를 추진했다가 실패한 아픈 기억이 있다. 3월 롯데주류BG 마크를 단 ‘처음처럼’이 생산됐다. 롯데마크를 단 이 소주는 4개월 이상 서울 시장에서 24.5%의 높은 점유율을 유지했고 전국적으로도 선전했다.

그런데 정작 믿었던 부산시장은 꿈쩍도 안 했다. 최근 들어 ‘처음처럼’의 부산시장 점유율이 미세하나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나마 계속되는 판촉활동과 재고증가로 인한 것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고 보면 그리 반가워할 일도 아닌 듯하다.

부산 소주시장의 터줏대감인 ‘C1’과 국내 최저도주 소주인 ‘봄봄’을 최근 출시한 대선주조의 주양일 사장은 “롯데가 여전히 활발한 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반복되는 이벤트에 관심을 잃어가니 효과도 덜하다”고 말했다. 주 사장은 “처음처럼은 부산시장의 2.2%밖에 안 된다.

돈으로 따지면 한 달에 1억원도 안 되는 거다. 그마저도 술집에서 판촉요원이 돈을 주고 산 ‘처음처럼’을 손님들에게 공짜로 주는 한마디로 돈으로 산 매출”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영화 ‘해운대’가 롯데소주를 외면한 이유롯데그룹은 “지방 소주시장의 특성상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차츰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롯데주류는 영화 ‘해운대’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더욱 힘들어졌다. 영화에 대선주조의 소주가 자주 등장하면서 처음처럼이 롯데 자이언츠를 동원한 애향심 마케팅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주양일 대선주조 사장은 “영화에 우리가 PPL로 참여한 게 아니라 제작진이 부산의 대표성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넣은 장면들이라고 들었다”며 “감독을 만났는데 부산 하면 ‘자이언츠’와 ‘C1 소주’인데 ‘참이슬’이 나오면 현실성이 떨어져 진로의 PPL 제안도 거절한 거라고 했다”고 말했다.

‘해운대’ 관객 중에 부산 관람객은 전체의 12.5%를 차지한다. 일반 영화의 평균 부산 관람객은 8.5%. 어림잡아도 부산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 영화를 봤다. 결국 롯데는 지난달 ‘처음처럼 쿨’이라는 저도주 소주를 시장에 내놨다. 아직 부산에서는 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지역에서 대선주조의 ‘봄봄’, 무학의 ‘좋은데이’ 등 저도주 소주가 인기를 끌어왔던 점을 보면 ‘처음처럼 쿨’은 부산을 정조준한 제품이다. 롯데그룹의 한 핵심임원은 9월 9일 “회장님이 롯데주류 사장에게 2시간 정도 브리핑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한테 주류는 아주 작은 부분이다. 회장님은 전반적으로 보고를 받는 것이지 어느 사업분야 한 곳에 치중하는 편이 아니다”며 확대해석에 금을 그었다. 하지만 주류업계의 한 임원은 “신 회장이 ‘지금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우리가 부산이 연고인데 지금 목표로 잡은 숫자도 너무 적다’고 진노하며 롯데주류 경영진을 크게 질타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평소 “적어도 하나의 제품이 80% 정도의 매출목표를 달성하지 않으면 신제품에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 왔고 또 실천해 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백화점과 주류시장의 최근 흐름은 롯데의 향후 경영전략에 큰 변수가 될 조짐이다.

지금 신격호 회장은 얼마나 뿔이 나 있을까? 이런 조바심들이 롯데그룹의 경영진을 자극해 변신의 계기로 작동한다면 ‘뿔’은 ‘경영 명약’으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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