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가슴을 울린다 - 1
세계인의 가슴을 울린다 - 1
문재원(미국) | 조각가
장난감 레고 가방에 뉴욕을 담다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의 미로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과연 그 길을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도나도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리려고 뉴욕엘 온다. 뉴욕은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주지만 문 뒤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올해 뉴욕예술 재단 펠로십을 수상한 조각가 문재원(46)의 작품은 삶의 공간을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개념이 아니라 가방처럼 어디든지 들고 다니는 휴대형 공간으로 형상화시켰다. 하얀 형광 아크릴 판 밖으로 빛을 발하는 작품은 우리를 유혹하는 뉴욕처럼 화려하지만 몇 개만 열려있는 작은 창문이 예술가의 힘든 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문씨 작품의 기본 형태는 다양한 크기의 런치 박스, 여행 가방 그리고 서랍 등이다. 그리고 장난감 레고를 이용해 표면과 내면에 생활 공간을 구성하는데 실제로 가방을 열면 창문과 계단 등이 보인다. 마치 어릴 적 형상화할 수 없어 막연히 꿈꾸었던 나만의 공간을 현실에 만들어 낸 듯하다.
1989년 상명대 조각과를 졸업한 다음해 문씨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4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조각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작품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외부와 단절한 채 7년간 작업에만 몰두했다. 2001년, 뉴욕의 화랑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는 큐레이터 하나없이 어떻게 작품을 알릴까 고민하다가 슬라이드만으로 작품을 평가해 전시 작가를 선정하는 덤보 아트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룹전에 참여하라는 연락이 바로 왔다. 이 첫 그룹전에서 문씨의 작품은 휘트니 미술관 위원에게 팔리는 행운을 잡았다.
2003년 문씨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당시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였던 래리 린더(현재는 버클리 아트 박물관 관장이다)가 그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그때 문씨는 레고 문 392개를 이용한 144개의 ‘단순히 연결된(Simply Connected)’이라는 조립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스튜디오가 좁아 설치하지 못했던 미로찾기 형태의 이 작품에 린더가 관심을 보이자 완성품을 린더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문씨는 프랫 인스티튜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술계에서 워낙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 학교에서도 린더가 온다면 학교 학생전용 화랑을 빌려주겠다고 선뜻 승낙했다.
래리 린더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기발함과 오싹함이 이상하게 균형을 이루었고, 밝은 색깔의 레고 블록이 멋지고 편집증적 실내의 미로와 결합되어 마치 출구 없는 월마트가 끝없이 계속되는 듯했다. 후기 자본주의 비참한 광경을 디즈니스럽게 축약해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그 작품에 대한 소감을 전해왔다 .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월간지 아트포럼의 웹사이트에 그녀의 전시 소식이 알려지면서 뉴욕 딜러들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 문씨는 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아팠다. 너무 많은 접착제 사용 때문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몸이 아파 작품 근처에조차 못갔다.
유명한 드로잉 화가인 남편 제프 게이블과 조수가 도와줘 작품들을 완성했다. 몸이 아프다는 얘기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혹시 큐레이터들 사이에 더 이상 작품을 못한다는 소문이 돌아 힘들게 잡은 기회를 놓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2005년 문씨의 첫 개인전이 뉴욕 첼시에 있는 뉴먼 포피아시빌리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 소식은 예술전문 월간지 아트 인 아메리카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작 총 14점이 전량 팔리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2007년에는 스페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뉴욕 메이시 백화점 쇼윈도에도 그녀의 작품이 전시됐다. 문씨는 현재 뉴욕 첼시에 있는 뉴먼 포피아시빌리 갤러리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맥시 에스트렐라 갤러리 소속 아티스트다. 올 가을 문씨는 모교인 상명대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려고 20여 년 만에 귀국했다. ■
조셉 칸(미국) | 뮤직비디오 감독
‘마이너’의 시선으로 팝음악을 재해석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조셉 칸(36)은 언뜻 한국과 인연이 없는 이름이다.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A’로 시작하는 ‘안(Ahn)’씨 성 때문에 늘 첫 번째로 호명당하는 게 지겨워 성을 ‘칸(Kahn)’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 만화책과 TV, 영화에 푹 빠져 지냈던 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뮤직비디오 제작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살던 동네 밴드들에 40달러씩 받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줬다. 호텔 접수처나 식품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며 뮤직비디오 제작비를 벌었다. 칸의 부모는 여느 한국 부모가 그렇듯이 그가 열심히 공부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길 바랐다. 하지만 칸은 뉴욕대 영화과에 진학한 지 1년 만에 자퇴한 뒤 곧바로 뮤직비디오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 후 2년간 연출, 촬영, 편집, 미술 등 1인 다(多)역을 소화하며 30여 편의 저예산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그러는 동안 독특한 영상 연출 기법을 시도해 주목할 만한 신예 감독으로 떠올랐다. 칸의 뮤직비디오들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화려한 색채감과 만화같이 빠르고 재기발랄한 연출이 특징이다.
40달러짜리 뮤직비디오를 만들던 청년은 이제 150편 가까운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유명 감독으로 성장했다. U2, 브리트니 스피어스, 머라이어 캐리, 레이디 가가 등 세계 대중음악계의 스타들이 그를 선택했다. 상복도 쏟아졌다.
브랜디&모니카의 ‘The Boy is Mine(1998)’과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2004)’으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 최우수 비디오상을 수상했고 에미넴의 ‘Without Me’로 2002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비디오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칸은 자신의 커리어가 어느 한순간 비약했다기보다 한 발씩 딛어가며 지금의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대중음악은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항상 남들이 하지 않은 신선한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단거리 경주라기보다는 마라톤이라고 봐야죠.” 칸이 말하는 자신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상당수의 유명 감독들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지만 저는 그 반대로 갑니다.”
그는 가수 개개인의 작업 방식을 존중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다. “아티스트들이 저를 믿고 선택해줘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함께 작업했던 가수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아일랜드 출신의 대형 록그룹 U2다. “그들이 뮤직비디오 콘셉트를 정하려고 저한테 U2 공연 투어에 동참해달라고 부탁했을 땐 온몸이 짜릿하더라고요.”칸은 스스로를 “문화적 스펀지”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처럼 여전히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감상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급변하는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20년 가까이 장수하는 비결이 아닐까?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란 점도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대중문화를 좋아하지만 한번도 주류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었어요.” 물론 아시아인으로서 한계에 부닥친 적도 없지 않았다.
“최근 한 대형 아티스트에게 뮤직비디오 연출을 거절당했어요. 제가 그와 ‘통하지’ 않을 거란 이유였죠. 예전보단 상황이 훨씬 나아졌지만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미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선입견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최대한 히트작을 내야 그런 현실을 이겨내겠죠?”
한국은 그에게 매혹적인 나라다. 가끔씩 스스로 한국계라는 뿌리를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철저한 프로 정신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산물이라 여긴다. “부모님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수성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그가 말했다.
2004년 ‘토크’라는 바이크 액션 영화로 할리우드에 데뷔한 칸은 현재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검토 중이다. 또 조만간 한국에서 한국말도 된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제작사들, 이 기사 보면 연락 주세요!”■
클로이 조(싱가포르) | CNBC 앵커
‘꼬마 코니 정’이란 격려가 나를 키웠다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클로이 조(37)는 미국의 경제 전문 케이블채널 CNBC의 유일한 한국인 앵커다. 세계 각국의 경제 현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CNBC는 지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CNBC의 시청자는 전 세계 4억 가구에 이른다. 클로이 조는 지난해부터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총괄하는 CNBC 싱가포르에서 일한다.
클로이 조가 처음 언론계에 관심을 싹 틔운 계기는 뜻밖에도 초등학생 시절의 ‘별명’ 덕분이었다. “일곱 살에 미국에 건너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수업 시간에 제 발표를 들은 선생님과 아이들이 ‘꼬마 코니 정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칭찬 한마디가 내게 꿈을 심어줬어요(코니 정은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공중파 뉴스 앵커로 이름을 떨쳤다).”
중학교 때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EBS의 어학 프로그램이나 공중파 TV 아침방송의 리포터로 일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96년부터 아리랑TV에서 일하다가 2004년 싱가포르의 채널 뉴스 아시아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해 CNBC로 스카우트됐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자신의 커리어를 글로벌 무대로 넓힐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누구보다 맹렬히 일에 매달리는 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늘 새로운 도전을 꿈꿨어요. 낯선 환경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더 ‘큰물’에서 일하고 싶은 갈증이 나를 이끌었습니다.”
한국에서의 방송 경력도 큰 자양분이 됐다. “한국의 방송업계는 프로 정신이 강하고 규율이 바르다고 할까요? 그때 배웠던 엄격한 자기관리법이 큰 도움이 됐어요. 이 업계에서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으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거든요.”
CNBC에서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간다. 새벽 5시 30분쯤 출근해 간밤에 일어난 미국과 아시아 경제 관련 뉴스를 정리한다. 가장 먼저 ‘스쿼크 아시아(Squawk Asia)’란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 시장 소식을 전한 뒤 2~3개 생방송 프로그램에 앵커나 기자로 투입된다. CNBC의 모바일 서비스에도 시장 동향 뉴스를 전달한다.
특별한 업무나 인터뷰가 없으면 오후 2시쯤 퇴근한다. 곧바로 요가 학원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와 아시아 시장 마감과 유럽 시장 동향을 살피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국 시장 개장을 다시 확인한다.
“과거에 제아무리 큰 특종을 보도했더라도 시청자들은 늘 현재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늘 긴장의 연속이죠. 또 뉴스 진행은 대본을 읽지 않고 실시간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라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하지만 기술 문제가 생기기 쉬운 해외 취재 생방송을 순조롭게 마치거나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때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한다.
윤형(42, 미국)
이기희(55, 미국)
큐레이터오하이오주 센터빌에서 미국 중서부 최대 규모의 ‘윈드 파인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기희 씨는 현대미술품을 전문으로 판매하고 세계적인 작가 기획전을 유치한다. 미 주류사회에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딜러로도 활동 중이다. 또한 건축 디자인 컨설팅과 인테리어 디자인, 고급 가구 직판을 전문으로 하는 하이드렌지아 홈 퍼니싱도 운영한다.
엘레나 리(38, 미국)
CNN 아·태 본부장조지타운대에서 국제관계학을, 뉴욕대에서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마친 엘레나 리는 1997년 CNN에 입사했다. CNN 창사 이래 가장 빠른 승진으로 2007년 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프로듀서로 입사한 뒤 중국과 인도의 발전상을 심층 분석한 ‘아이 온 차이나(Eye on China)’ ‘아이 온 인디아(Eye on India)’등 기획 프로그램을 히트시켰다. 권정달·도영심 전 의원의 딸이다.
정의신(일본) | 극작가
재일 한국인 이야기로 일본을 감동시키다도쿄=박 소 영 중앙일보 특파원
10월 4일 오전 10시. 도쿄 기치조지(吉祥寺) 시어터 정문 앞에 한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주륜장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달려온 그는 “제가 정의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마땅한 인터뷰 장소를 찾지 못해 쩔쩔매는 기자를 이끌고 그가 간 곳은 근처 편의점. 캔커피를 사더니 극장 복도로 기자를 안내했다.
요즘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로 꼽히는 정의신(52). 일본 연극계에서 크고 작은 상을 휩쓸면서 주목을 받는다.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재일동포 2세다. 기자가 추석선물로 준비한 송편을 받아 든 그는 “어린 시절 할매가 추석 때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가르쳐줬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보통의 재일동포 2세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15세 어린 나이로 일본에 혈혈단신 건너온 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이주한 어머니 사이에서 1957년 효고(兵庫)현 히메지(姬路)에서 태어났다. 전쟁 때 일본군 헌병으로 활동한 탓에 아버지는 해방 후에도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군 앞잡이’란 낙인을 각오하면서 한 차례 귀국길에 올랐지만 탔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일본 땅에 정착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히메지 성곽 주변의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곳에는 재일동포와 가난한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다.
아버지는 고철과 폐품을 수집해 생계를 꾸렸다. 아들 5형제 중에서도 유독 정씨는 외할머니와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 어머니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할머니 집은 높은 언덕에 있었어요. 발 아래로 빈민가가 내려다보였고 근처 화장터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마시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비록 가난했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웃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라서 재일한국인이라고 놀림 받는 일도 드물었다. 어려서부터 남을 웃기는 일을 좋아했던 넷째 아들 정씨의 집은 언제나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 성장과정 때문일까? 그가 무대에 올리는 대부분의 작품은 일상적인 내용이지만 그 속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유머가 녹아 들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한국 이름 ‘정의신’을 썼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했던 시절, 주위 선배와 친구들은 그에게 “원래 네 이름을 찾으라”고 충고해줬다. 데이 요시노부(手井義信)라는 일본 이름과 영영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히로시마대 재학 중에 징병으로 군대에 끌려간 아버지는 대학을 마치지 못해선지 자식 교육에 각별했다.
아버지는 늘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살려면 남에게 없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과 출신인 다른 형제들은 모두 의사, 치과의사, 약사가 됐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교토의 도지샤(同志社)대 문학부에 진학했다. 이후 영화사의 촬영소 조수로 영화 일을 시작한 그는 1983년 극단 ‘구로텐트’에 입단하면서부터 연극인의 길을 걸었다.
1987년 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 뒤로 전속 작가로 활동했으며 1990년 ‘천년의 고독’을 시작으로 ‘더 데라야마(寺山)’ ‘인어전설’ 등으로 일본 연극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로 장르를 확대해, 1993년에는 현대 일본 사회를 택시운전사의 눈으로 바라본 ‘달은 어느 쪽으로 뜨는가’로 일본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했고, 마이니치(每日) 영화콩쿠르 각본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지난해엔 처음으로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을 그린 ‘야키니쿠 드래곤’을 한국과 일본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오사카엑스포가 열린 1970년 전후 간사이지방의 재일동포 거리에 있었던 작은 불고기집 ‘야키니쿠 드래곤’을 무대로 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뒤편으로 떠밀린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을 진지하고 유머 넘치게 그렸다. 극본과 공동연출을 맡은 정씨는 “재일 한국인의 작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연일 만석을 이뤘다. 정씨는 이 작품으로 요미우리 연극상 대상과 최우수작품상, 우수연출상, 아사히무대예술상 그랑프리, 기노쿠니야 연극상, 쓰루야난보쿠 희곡상, 문화청예술선장 문부과학대신상 등 일본에서만 7개의 상을 휩쓸었다.
올 한해 중앙대 연극영화과 초빙교수로 활동하는 그는 11월에는 서울 대학로에서 새 연극 ‘바케레타’를 무대에 올린다. 그는 일본에서 김치와 야키니쿠(불고기), 호르몬(곱창)이 인기를 끄는 데 놀라워하는 눈치다. “데이트하는 젊은 커플들이 야키니쿠집에서 밥 위에 김치를 얹어 먹는 모습은 70~80년대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이라며 “한류 덕분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한국인이라는 의식은 있지만 저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일본 교육을 받았어요. 한국을 ‘조국’이라고 절실히 느낀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인터뷰 말미에 기자는 그에게 좋아하는 음식과 가족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 간장게장 맛에 푹 빠졌어요. 얼마 전에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색시는 언제 얻을 거냐고 잔소리를 하더군요.” 50년 넘게 일본에서 살았지만 그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이민숙(34, 캐나다)
다큐멘터리 감독1997년 불법입국 노동자의 암울한 삶을 날카롭게 파헤친 ‘국경을 넘어(Borderless)’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캐나다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핫 독스에서 ‘호그타운’이 2005년 베스트 캐네디언 다큐멘터리로 선정됐다. 릴아시안 국제 영화제에 소개된 ‘타이거 스피릿’은 남북분단과 탈북자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올 1월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됐다.
백나라(20, 칠레)
가수칠레에서 태어난 백나라는 2003년 14세 때 나라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3인조 남녀 혼성 일렉트로니카 밴드 ‘룰루잼’에 합류했으며 노래뿐만 아니라 독특한 외모와 패션으로 남미 청소년의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칠레의 MTV격인 VIAX의 생방송 버라이어티쇼 ‘블로그 TV’ 사회자로도 활동하는 신세대 만능 엔터테이너다.
진위(46, 중국)
화가베이징에서 활동하는 흑룡강성 출신의 화가 진위는 중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작품성을 인정 받는다. 대표 작품으로는 회색의 배경을 바탕으로 유리에 짓눌려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과 몸을 통해 현대인의 고달픔과 스트레스를 표현한 촉점 시리즈가 있다. 올 9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품전을 열었으며 현재 북경청년정치대학 예술계 부교수로 일한다.
짐 리(미국) | 만화가
미국 만화계의 ‘800만 부 사나이’류 지 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짐 리(45)는 미국 만화계에서 ‘800만 부의 사나이’로 통한다. 그는 1991년 마블코믹스의 인기만화 ‘엑스맨(X-Men)’의 두 번째 시리즈인 ‘엑스맨 넘버 원’의 일러스트레이터 겸 공동작가로 참여해 800만 부가 훌쩍 넘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미국 만화계에서도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다.
마블코믹스의 전 대표이자 엑스맨의 원작자인 스탠 리는 직접 짐 리를 인터뷰한 방송에서 “만화책은 보통 한 권이 100만 부만 팔려도 빅 히트작으로 꼽는다. 800만 부 판매기록은 짐 리의 그림 한 장 한 장이 독자들을 흥분시켰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엑스맨’ 외에도 그는 ‘배트맨’이나 ‘슈퍼맨’ ‘판타스틱 4(Fantastic Four)’와 같이 미국을 대표하는 픽션 영웅들의 형상을 지금의 모습으로 현대화하면서 업계와 팬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또 ‘와일드스톰’이라는 만화제작사를 설립해 많은 창작 만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짐 리는 5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그림을 처음 배웠던 곳은 한국이다. “노란색 크레파스로 윤곽을 그린 다음 차차 짙은 색으로 색칠을 하라고 하셨던 미술선생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당시 한국에서 한창 인기리에 방영됐던 만화영화 ‘황금박쥐’와 ‘슈퍼맨’도 그의 뇌리에 각인됐다.
“황금박쥐를 특히나 좋아했어요. 그래서 황금박쥐 껌도 정말 열심히 씹었죠.”
어린 시절부터 짐 리는 만화를 유독 좋아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만화가가 되겠다고 꿈꿔본 적은 없었다. 리의 부모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 또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프린스턴대에 입학해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는 교양수업으로 듣던 회화 강의에 금세 마음을 뺏겼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강사였어요. 그들이 제 소질을 인정해주고 저도 몰랐던 제 꿈을 살려냈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 리는 ‘의사보다는 만화가로서 제 몫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그런 그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곳이 바로 마블코믹스였다.
리는 일러스트레이터일 뿐 아니라 작품의 줄거리를 구상하는 ‘플로터(plotter)’로 일하기도 한다. 등장인물의 세세한 대사까진 아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과 캐릭터를 만드는 역할이다.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를 묻자 “배트맨과 조커”를 꼽았다. “그들만큼 사랑을 많이 받는 캐릭터는 없을걸요.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되지만 한편으론 매우 닮았어요.”
요즘 그는 젊은 만화가들과 창작 작업을 계속하면서 게임업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마블코믹스와 미국 만화계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DC코믹스의 게임을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다.
“현재 DC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개발 중이에요. 오래전부터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에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스스로 재미있는 일을 한다.’ 짐 리의 성공 비결은 이 간단한 원칙에 있는 듯하다. ■
박영희(독일) | 작곡가
박영희(64) 독일 브레멘 음대 교수는 ‘파안(琶案)’이란 예명을 쓴다. ‘책상에 놓인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인인 도올 김용옥 선생이 붙여줬다고 한다.
평소 수양하는 마음으로 한음한음 곡을 쓴다는 그녀의 진중한 음악세계를 나타내는 말인 듯하다. 그녀가 주로 활동하는 유럽에선 ‘영희 팍-파안(Younghi Pagh-Paan)’이라는 이름을 쓴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박 교수는 유럽의 현대음악계에서 확실한 자기 영역을 구축한 작곡가다. 1974년 서울대 작곡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독일정부 학술교류재단의 장학생으로 유학 길에 오른 그녀는 음을 짜임새 있게 ‘건축’하는 이성적인 작곡법과 한국적 정서에 뿌리를 둔 작품세계로 명성을 쌓아왔다.
1978년 ‘만남’이란 곡으로 스위스 보스윌 세계작곡제에서 1등을 수상한 이래 1980년에는 파리 유네스코 주최 작곡 콩쿠르와 독일 슈튜트가르트시 주최 작곡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았다. 또 작곡가들의 ‘꿈의 무대’라고 불리는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에 여성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초청돼 관현악곡 ‘소리’를 초연했고 1994년에는 유서 깊은 브레멘 음대에서 여성 최초로 주임교수에 발탁됐다.
국내 음악평론가들은 그녀를 ‘제2의 윤이상’이라고 부를 정도다. 박 교수는 작곡을 “생각을 음으로 표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작품들엔 유럽의 철학 사상, 중국의 노장 사상, 조선시대의 가사문학, 성경, 그리스·로마신화 등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제가 담겼다.
어디서 그런 영감을 얻을까? “책이나 음악, 공연 등을 보면서 간접체험을 하다 보면 내 안에 어떤 생각이 싹트게 되고 그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한다”고 그녀가 말했다. “음악을 만날 때는 늘 ‘내면의 귀’로 음악 속의 생각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건축가가 ‘공간’에 자신의 생각을 담는다면 작곡가는 흐르는 ‘시간’ 속에 음악으로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녀의 음악 세계는 건축가였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충북 청주가 고향인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같은 건축가를 꿈꿨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평소 시 낭송과 퉁소 불기를 즐기는 등 예술을 가까이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장터에 나가 민요와 판소리 같은 우리 소리를 만나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그녀의 애정은 이런 경험에서 싹텄다. 그래서일까? ‘만남’ ‘소리’ ‘흰 눈’ 등 박 교수의 작품명은 대부분이 한국말이다. 영문 제목도 한국말의 음운 그대로 제목을 표기한다. 한국말이 아름답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녀의 음악에서 한국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제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제가 있었을까요? 한국문화 안에서 형성된 제 정체성을 여과 없이 표현하기 때문에 유럽무대에서 작곡가로 당당히 활동하는 거지요.”
강의가 없는 날이면 박 교수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물며 곡을 쓴다. 1980년대부터 그녀는 줄곧 이탈리아에 보금자리를 꾸려왔다.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다. “이탈리아는 기후나 사람들의 기질이 한국과 매우 닮았어요. ‘유럽 속의 한국’이라고 할까…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이란 점도 제 고향과 꼭 빼닮았어요.”
요즘 박 교수는 내년 9월 뮌헨 초연을 앞두고 ‘높고 깊은 빛’이라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이중주와 오케스트라 곡을 다듬고 있다. 한국의 두 번째 가톨릭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서한을 바탕으로 한 연극 음악도 구상한다. 세계 각지에서 공연과 음악제 심사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없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젊음을 선물한 듯하다. ■
팀 강(미국) | 증권맨 출신의 근육질 배우
얼마 전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미국 드라마에서 멋진 아시아 청년이 눈에 띄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혹시 한국인? 호기심에 알아봤더니 과연 팀 강(37, 한국명 강일아)이란 한국계 배우였다.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2008~2009 시즌 미국 드라마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한 ‘멘탈리스트’.
영매사로 활동했던 주인공(사이먼 베이커)이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의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겪는 일을 다룬 범죄 드라마다. 극 중 팀 강은 주인공의 영적 능력을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수사에 매진하는 ‘킴벌 조’ 역을 맡았다. 기존의 범죄물에서 아시아계 역할과 달리 지적이면서도 근육질의 남성 캐릭터다.
미 전역에 방송되는 이 드라마로 팀 강은 미국 안방 시청자들에게 눈 도장을 찍었다. 팀 강은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일보 기자였던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 앞에 서길 좋아했지만 연기자의 길은 우연히 다가왔다.
버클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월스트리트의 한 증권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우연히 회사 근처에 초심자를 위한 연기 강좌를 들었다가 연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래서 하버드대 부설 연기학교(ART)에서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고 여러 ‘미드’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번듯한 직장 대신 신인 연기자의 길을 택했을 때 불안감은 없었을까? 그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출세작이 된 ‘멘탈리스트’는 “남들과 똑같이 오디션을 통과해서” 출연했다. 수차례에 걸쳐 캐스팅 디렉터와 감독, 드라마 제작사, 방송사 면접을 거친 뒤에야 출연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멘탈리스트’가 이렇게 인기 가도를 달릴지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팀 강은 “요즘 확실히 전보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박서원(31, 미국)
광고 디자이너단국대 경영학과를 자퇴한 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재학 중 광고회사 ‘빅앤트 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20~30대 초반의 다국적 젊은이 10명이 근무하는 작은 회사지만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반전 포스터로 올해 세계 5대 광고제에서 모두 12개의 상을 받았다. 총을 겨누는 병사의 총구가 기둥을 감고 돌아와 다시 자신을 겨누는 아이디어가 뛰어난 작품이다.
마이클 김(45, 미국)
ESPN 스포츠 해설자미국 미주리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미주리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4시간 스포츠 채널 방송 ESPNews에 1996년에 입사했으며 ‘핫 리스트(The Hot List)’와 ‘스포츠센터(SportsCenter)’에 출연한다. 1993년에 에미상 스포츠 보도부문을 수상했으며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일일프로에 출연하는 스포츠캐스터다.
백주현(39, 미국)
동화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파슨스 디자인 스쿨과 메릴랜드 미술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워싱턴 포스트, 볼티모어 선 등 유명 신문과 잡지에 삽화를 그린다. 지난해 유명 출판그룹 ‘펭귄’에서 출간된 백씨의 동화책 ‘Be Gentile With the Dog, Dear(국내에서는 지경사에서 ‘다정한 친구’라는 제목으로 출간)’는 2008년 여름 추천 도서로 선정돼 미국내 학교와 도서관 등에 대량 보급됐다.
재니스 리(미국) | 소설가
‘피아노 교사’로 동·서양을 잇다서 정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소설 ‘피아노 교사(The Piano Teacher)’의 주인공 윌과 두 연인과의 관계를 거침없이 풀어나간 필력에 독자들은 매료된다.” -뉴욕 타임스“얽히고 왜곡된 러브 스토리와 전쟁을 다룬 서사시 이상이다.” -시카고 트리뷴
“품위 있는 산문체와 뛰어난 공간 감각으로 완성된 소설… 2차 세계대전 무렵 겉으론 화려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공황과 부패가 만연했던 당시 홍콩의 모습을 재현한다.” -마이애미 헤럴드
지난 1월 재니스 Y K 리(36, 한국명 이윤경)의 소설 ‘피아노 교사’는 세계 유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첫 작품이었는데도 ‘성공’ ‘베스트셀러’라는 묘사가 자연스레 어울렸다. 2007년 프랑크프루트 도서전에서 픽션 부문 우수작품으로 선정됐으며 세계 26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이미 14개국어로 출간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발매 2주만에 뉴욕타임스 소설 부문 11위, 홍콩에선 다이목스 서점 체인이 선정한 소설 부문 1위에 올랐다. 재미동포 작가 재니스 리는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미국으로 갔다.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한동안 ‘엘르’ 등 몇몇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에디터라는 직업이 불만족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에디터에 안주하면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작가의 꿈이 더 멀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 어느 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자신의 이름이 찍힌 소설을 꼭 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리씨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헌터대 대학원에서 소설 창작을 공부하면서 재미소설가 이창래 씨를 만났다.
“창작의 열정과 진지함을 그에게서 배웠어요.” 리씨의 정신적인 스승은 리씨의 처녀작을 이렇게 평했다. “‘피아노 교사’만큼 매력적이며 확실한 데뷔작을 내놓긴 쉽지 않다. 동·서양의 매혹적인 상호작용과 생생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독자들을 뇌쇄시킨다.”
‘피아노 교사’의 시대적인 배경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940~50년대 홍콩. 영국인 윌이 이곳에서 유라시아 혼혈 여자와 영국 여자를 만나 전쟁 속에서 사랑하고 번민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이 소설을 두고 “시공을 초월해 가공의 세계를 마치 생생한 실제 상황처럼 느끼게 된다”고 찬사를 보냈다.
문학은 작가의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피아노 교사’는 작가가 체험하지 못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삼았는데도 많은 평론가들은 “사실적”이라고 칭찬했다. 리씨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홍콩대 도서관에서 역사책과 오랫동안 씨름했다.
홍콩에서 전쟁을 체험했던 영국인들이 쓴 전기와 소설들을 모조리 탐독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날짜는 실제 역사의 날짜와 모두 일치한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가의 의무는 이야기지 진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사실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주인공 세 사람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상상력’과 ‘사실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하다. 리씨는 2002년 작업을 시작해 5년 동안 ‘피아노 교사’에 매달렸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런 기쁨을 독자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는 리 씨는 지난 10월 말 서울에서 ‘피아노 교사(문학동네 펴냄)’의 한국어판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한국인의 외모 그리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리씨는 홍콩·영국·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들 사회에 진정으로 섞이기 어려웠던 그녀는 ‘피아노 교사’를 통해 그들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소설의 마지막 묘사처럼. “일단 저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그녀는 거리 풍경 안으로 녹아 들고. 거리의 리듬에 흡수돼 어렵지 않게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피터 손(미국) | 픽사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영화광 어머니가 내 창의력의 원천”뉴욕 = 정 보 라 프리랜서
올해 상영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업(Up)’은 또 다른 이유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 제작에 한국인이 참여했으며 그 한국인의 어린 시절이 영화의 내용에 녹아 들었기 때문이다. ‘업’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인 피터 손(31, 한국명 손태윤) 얘기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주인공 꼬마 러셀이 손씨와 무척 닮은 듯하다.
통통한 얼굴에 순박한 얼굴은 친근감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상당히 좋아했어요. 그 뒤로도 그림 그리기를 천직으로 생각했죠. 애니메이션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꿈의 세계였습니다.” 손씨는 ‘업’의 제작 과정에서 장면 장면마다 스토리 아이디어를 감독에게 제공했다.
영화 ‘업’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칼과 경로 배지를 받으려고 거침없이 덤벼드는 사랑스런 꼬마 러셀의 모험담이다. “제작 초기 꼬마 러셀의 캐릭터는 조금 달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피트 닥터 감독이 내게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내가 자란 도시가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꼬치꼬치 물었어요. 내 유년기가 영화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제작기간 내내 나를 흥분시켰어요.”
손씨는 뉴욕 브롱스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낮에 일하는 동안에는 두 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1970년대 미국에 이민 온 아버지는 과일과 야채 가게를 운영했으며 어머니는 간호사로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런 어머니가 애니메이션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손씨에게 만들어줬다.
매주 금요일이면 어머니는 꼭 두 아들을 이끌고 영화 구경을 갔다. “어머니는 굉장한 영화광이었어요. 함께 영화를 보면서도 어머니는 모르는 영어가 나오면 어린 내게 무슨 뜻이냐고 묻곤 하셨어요. 그런데 디즈니 만화영화를 볼 땐 잠잠하시더라고요. 그 시절에 애니메이션이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장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애니메이션과 친해지면서 손씨의 그림 그리기는 더 이상 무료함을 달래는 시간 때우기가 아닌 꿈이 됐다. 그림의 재능도 뛰어났다. 일찌감치 아들의 능력을 알아본 부모님은 손씨가 고등학생에 입학한 뒤 아예 미술용품점을 열었다. 그 덕분에 애니메이션업계에서 일하는 한 고객을 알게 됐고 아들의 진로를 상의하기도 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 “학교는 어디가 좋은가” “장래는 밝은가” 등등.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대학교의 야간 수업을 들었다. 낮엔 고등학교에서, 밤에는 대학생과 함께 공부했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 입학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오랫동안 꿔왔던 꿈이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대학 2학년 때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 ‘아이런 자이언트(Iron Giant)’를 제작한 브래드 버드 감독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인비트위닝(inbetweening: 수석 애니메이터들을 돕는 일종의 어시스턴트)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버드와의 만남으로 손씨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도 인연을 맺었다. 버드가 픽사와 손잡고 만든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The Incredibles)’에서 그는 스토리보드와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다.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에서는 스케치 아티스트로 참여해 디자인과 테크니컬 드로잉을 맡았다.
‘라따뚜이(Ratatouille)’에선 성우로 에밀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런 과정에서 단편영화 ‘파틀리 클라우디(Partly Cloudy)’를 직접 제작해보기도 했다. 손씨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의 마술은 그의 가족을 넘어서 전 세계인을 감동시킨다. 그 스토리의 원천이 마르지 않도록 그는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배운다”고 말했다.
‘업’에서 할머니 엘리가 남편인 칼에게 남겼던 ‘새로운 모험을 지금 시작하라(Now go have a new one)’는 글처럼 또 다른 작품을 통해 손씨의 모험은 시작된다. ■
이규정(이집트) | 코리아TV 사장
요즘 한류는 식어가는 듯하지만 사업가에게는 여전히 좋은 사냥감이다. ‘코리아TV’의 이규정(49) 사장은 좋은 사냥감을 중동에서 찾았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이집트에서 이 사장은 한류 태동의 첫 전파를 끊었다.
위성 채널 방송 코리아TV는 지난 5월 이집트 국영 위성인 나일샛의 주파수 10719MHz(v)를 통해 방송을 시작했다. 한 달에 60~70개의 드라마,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 등을 방영한다.
나일샛과의 계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장은 지난해 7월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개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의 허가가 생각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이 사장은 이집트 투자부 공무원에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자신의 입장만 생각한 항의가 문화를 파는 사람의 행동으론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현지의 질서와 문화에 반하는 행동이 장기적으로 사업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뒤 이슬람 문화를 익히고 존중하면서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14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왜 그는 중동을 선택했을까? 이 사장은 “나의 자산은 돈이 아니라 언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첫째, 외국어 전문 제작 프로덕션을 운영했던 경험이 그에게 자신감을, 그리고 아리랑 TV에서 일했던 경험이 방송 진출에 힘을 더해 주었다. 둘째, 중동은 아시아처럼 국가별로 고유 언어를 쓰지 않고 아랍어로 통일돼 있기 때문에 사업 영역이 아무런 장애 없이 넓어진다.
무려 44개국 5억 명의 잠재 시청자를 둔 거대한 시장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부국인 데다 지상파 방송은 국가 홍보에 치중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위성방송이 현지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있으리라는 판단도 주요했다. 중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이집트의 소비시장은 한류 방송의 발판을 다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점이었다.
전 주한 이집트 대사 레다 엘 타이피는 한국·이집트 간 경제·문화 교류가 아직 활발하지는 않지만 코리아TV를 계기로 확대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가 역사적이고 로맨틱한 점이 이집트 드라마와 많이 흡사하다”며 ‘겨울연가’ 팬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는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할 계획도 있다. 이집트 현지 대학생들이 직접 창업 아이템을 선정, 돈 버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리얼리티 쇼다. 또 현지 중고생을 대상으로 중동판 장학퀴즈도 제작할 예정이며. 그리고 한국 드라마를 힌두어로도 번역해 인도 전역에 송출할 예정이다. ■
이말용(58, 일본)
유리공예가재일동포 2세인 이말용씨는 도자기 장인의 길을 포기하고 오사카와 나고야의 유리공장에서 견습기간을 거쳐 1976년 세토시에서 자신의 공방을 차렸다. 1988년에는 2년 동안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현재 아이치현 현립 예술대에서 유리공예 강사로 일한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데 연간 6억 원 정도의 공예품이 팔려나간다.
김영성(45, 프랑스)
샤넬 원단구매 책임자부산대 불문과를 나와 프랑스에서 미술과 패션을 배운 뒤 1998년 샤넬에 입사한 김영성 씨는 샤넬 본사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샤넬에서 만드는 의류 등의 시즌 콘셉트와 색상 그리고 트렌드를 결정하는 일을 한다. 지난해 대구국제섬유박람회에 참석해 샤넬이 한국 원단을 구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그 이유로 샘플 제작의 무성의 등을 들었다.
존 조(37, 미국)
배우여섯 살 때 미국 내시빌로 이민을 갔다. 대학 시절 연극 출연을 계기로 배우가 됐다. ‘아메리칸 파이’ 1편에서 처음 얼굴을 알렸고 주연으로 출연한 ‘해럴드와 쿠마‘란 공전의 히트작으로 유명세를 탔다. 최근 ’스타트랙: 더 비기닝’에 주연급으로 출연했다. 언론을 통해 한국 진출 의사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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