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과 베토벤이 ‘한류’를 말하다
대장금과 베토벤이 ‘한류’를 말하다
단돈 8만원으로 시작했다. 경기도 장호원 거리에서 만두를 팔았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일을 접었다. 와신상담. 이번엔 서울 대림동 시장거리에 밥집을 차렸고, 맛깔난 포기김치로 이름을 날렸다. 이를 밑천으로 1997년 강남 역삼동에 한식전문점 봉우리를 열었다. 이하연(51) 김치협회장. 그는 현대판 대장금이다. “그가 담근 김치 맛이 최고”라고 평하는 이가 많다. 자신도 “김치를 담글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회장의 꿈은 원대하다. 김치 하면 한국이 떠올랐으면 한다. 김치의 세계화. 대장금의 목표다.
고전파 작곡가 베토벤을 존경했다. 베토벤의 정서를 느끼고 싶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갔다. 그렇다고 외국 클래식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그의 앙코르곡은 언제나 아리랑이다. 클래식 음악가로선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의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누군지 알아챈 사람이 있을 게다. 그렇다. ‘베토벤 바이러스(2008)’의 실제 모델 서희태(46) 밀레니엄 심포니 감독이다. 그는 ‘다울(다함께 어울어짐) 프로젝트’의 지휘자다. 한국의 멜로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시작된 다울 프로젝트에선 오케스트라로 아리랑·도라지·옹헤야 등 전통음악을 연주한다. 서양 연주기법으로 한국의 울림을 전하는 거다.
같은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은 지난해 만났다. 서희태 감독이 자신의 저서 『클래식 경영 콘서트』에서 ‘클래식 김치론’을 주장한 게 인연이 됐다. “…나는 클래식을 김치라고 표현한다… 김장김치는 몇 년을 묵혀도 곰삭은 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클래식 음악도 (김치처럼) 변하지 않는 매력이 있다….”
두 사람은 경기도 덕소에 있는 ‘봉우리 김치문화원’에서 조만간 김치 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이 회장이 김치를 담그고, 서 감독은 한국 전통음악을 (오케스트라로) 들려준다. 대장금과 베토벤의 합동 공연이다. 지난 5일 봉우리 본점에서 두 사람을 만나 한국문화 세계화의 전략과 가능성 그리고 개선점을 들었다.
서희태 감독 일본 기무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죠?
이하연 회장 한국 김치와 일본 기무치를 비교하시다니요(웃음). 근본이 달라요. 김치는 발효음식이지만 기무치는 겉절이예요. 깊은 맛이 없고, 달기만 하죠. 김치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건강식품이잖아요. 깊은 맛을 제대로 알릴 수 있다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어요. 한국 전통음악도 경쟁력이 있지 않은가요? 이를테면 아리랑처럼….
서희태 물론이죠. 외국 음악인 중 아리랑이 한국 전통음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아요. 베토벤이 살았던 오스트리아 빈에 작은 와이너리가 있어요. 동양사람이 오면 아리랑을 연주하죠.
오스트리아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아리랑이쯤 되면 분명하다. 음식이든 음악이든 한국문화는 세계를 유혹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문화는 아직 세계 속에 없다. 김치가 기무치가 되고, 갈비가 가루비로 통하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우리 전통문화를 중국의 아류쯤으로 생각하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오스트리아엔 유명한 한국사람이 있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수행하고 한국에 왔을 정도다. 그는 외식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일본 스시바를 운영한다. 서브 메뉴는 김치와 한국 라면이다. 애국심이 없는 걸까. 아니다. 스시바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야 할 때다. 막걸리가 뜬다고 마냥 흥분하고 감탄해선 안 된다. 21세기는 컬처노믹스 시대다. 문화가 곧 경제라는 얘기다.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실패하면 경제적으로 잃는 게 많다. 제2의 기무치 사태는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을까.
이하연 산업화만 강조하는 게 문제입니다. 무작정 만들어서 많이 수출하면 된다고 여기죠. 김치도 그랬어요. 내실을 다지기보단 숫자(수출액 등)에 집착했죠. 겉으론 한국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전통문화는 경시하기 일쑤였죠. 한식 셰프의 월급은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숫자도 턱없이 부족해요. 이런 상황에서 세계화라니요. 문단속을 잘해야 안심하고 밖에 나가지 않겠어요?
서희태 (고개를 끄덕이며) 2006년 오스트리아 빈에 한국 국악팀이 공연을 왔어요. 수많은 현지인이 관심을 보였죠. 외국인 친구에게 물었어요. “국악을 국제무대에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고요.” 답은 이랬습니다. “저 악기를 누군가 배워야 한다. 꽹과리·장구를 연주할 수 있는 외국인이 늘어야 세계화가 되지 않겠는가.” 안타까웠죠. 정작 우리나라 사람은 국악에 별 관심이 없잖아요. 배우는 사람도 없고요.
전통만 고집하면 세계화는 멀어질 수 있다. 세계화는 일정한 규격을 통해 진행된다. 공통언어로 소통하고, 기축통화로 교역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규격의 또 다른 말은 현지화다. 현지에서 통할 만한 규격을 갖춰야 세계로 가는 문이 활짝 열린다. 일본 스시는 이제 세계적 음식이다.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는 조리법을 개발해 거부감을 덜었다. 기술로 규격을 만든 거다. 서 감독이 아리랑 등 우리 전통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음악의 세계 규격”이라고 했다. 이 회장도 공감했다. “묵은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외국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외국인에게 김치를 알리려면 ‘그들의 맛’이 (김치에) 들어 있어야 해요. 일종의 퓨전 김치죠.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는 식초절임 김치와 비슷해요. 매운 음식을 즐기는 멕시코 사람에겐 고추소박이가 제격일 거예요. 안에선 전통문화를 육성하고, 밖에선 철저하게 그들의 문화에 맞추자는 겁니다.”
현지화만큼 중요한 건 또 있다. 지금은 융·복합 시대, 모든 게 얽히고설킨다. 음식·음악만으로 승부 짓기 어렵다. 다른 문화도 함께 세계로 나가야 한다. 와인·사케·위스키 등 세계 각국의 전통주가 전해질 때 그 나라의 문화·역사·이야기가 함께 따라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실패했다. 김치 세계화를 외치면서 김치만 수출하는 데 급급했다.
생선 비린내 없앤 스시의 교훈
이하연 무엇보다 스토리텔링 전략이 필요해요. 김치에 얽힌 독특한 이야기가 함께 알려져야 효과가 크죠. 따지고 보면 얘깃거리는 많아요. 막걸리만 해도 김삿갓과 시인의 막걸리 내기 이야기,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막걸리 찬사 등이 있잖아요.
서희태 제가 빈 유학을 결심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어요. 베토벤이 살았던 곳에 가보고 싶었죠. 베토벤처럼 차를 마시면 멋진 교향곡이 탄생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랄까. 외국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리랑에 감동하면 아리랑에 얽힌 얘기를 듣기 위해 한국에 올 거예요. 이걸 준비해야 합니다.
세계화에 성공하려면 전략을 잘 짜야 한다. 현장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는 전례 없는 글로벌 불황에도 성장엔진을 계속 돌렸다. 도요타·소니·파나소닉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이 휘청일 때도 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닌텐도DS와 닌텐도위는 각각 1억 대가 넘게 팔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는 왜 닌텐도 같은 제품이 없는가”라고 탄식한 이유다. 작은 화투업체에 불과했던 닌텐도를 바꿔놓은 건 게임 전문가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그가 개발한 스토리게임 ‘동키 콩’(1981)이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닌텐도의 DNA가 단숨에 변했다. 서 감독은 “21세기는 전문가 한 명이 조직의 운명을 바꿔놓는 시대”라고 했다. 아쉽게도 한국 전문가의 현실은 씁쓸하다.
이하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식 세계화가 본격 추진됐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죠. 한식 세계화 추진단이 구성됐는데, 현장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어요. 식당을 단 한 번도 운영해 본 적 없는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대부분이었죠. 한식을 대체 무엇으로 만드나요? 젓갈·장 등 재료가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또 한식을 어디에 담을지, 한식 전문점을 어떻게 꾸밀지도 논의해야 해요. 각 분야 전문가의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었죠. 한식 세계화의 밑그림은 탁상공론으로 그려졌습니다.
서희태 지난해 열린 G20 서울 정상회의는 우리의 국격(國格)과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저도 동참했죠. 다울 프로젝트에서 연주하는 아리랑 등 전통음악을 화상중계로 각국 정상에게 들려줄 계획이었어요. G20 준비위원회도 동의했습니다. 수년간 연주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죠. 하지만 무산됐어요. 대신 아이돌 가수와 일부 성악가가 ‘그들만의 공연’을 열었죠. 한국 전통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만든 다울 프로젝트가 무시된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꽤 컸죠.(※ 서 감독은 무산 이유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추측한 게 맞냐”고 물으니 “그럴 거다”고만 했다.)
이하연 정부가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수용해야 하는데, 반대인 것 같아요.
서희태 지난해 ‘무한도전’이라는 연예프로그램에서 뉴욕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비빔밥 광고를 냈어요. 뉴욕 한복판에 한국 광고를 실은 것도 대단했지만 더 놀란 건 그들의 협력이었어요. 비빔밥 광고 하나 만드는데 기획자·공연가·한복 전문가·한식 전문가 등이 두루 참여했죠. 세계화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레코드사업·우주사업 등 손대는 것마다 화제를 일으키는 괴짜 CEO 리처드 브랜슨 영국 버진그룹 회장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즈니스는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한국의 세계화는 국가적 비즈니스다. 세계인의 관심을 끌어야 알찬 열매를 딸 수 있다. 이게 쉽지 않다. 냉정하게 말하면 중국·일본에 밀린다. 한국 하면 북핵을 떠올리는 외국인도 많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책의 연속성이 필요하다. 세계화 전략을 꾸준히 추진하는 거다. 세계 최고의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계가 많은 지휘자였다. 나치 전력으로 독일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는 스튜디어 녹음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숱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LP의 정교함을 CD가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일 때도 CD녹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됐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20여 년. 많은 사람이 카라얀을 기억한다. 연속성의 힘이다.
베네수엘라 바꾼 엘 시스테마서 감독은 다른 예 하나를 더 들었다. “엘 시스테마 운동 아시죠? 마약·총기·빈곤의 나라 베네수엘라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은 운동입니다. 음악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는 1975년부터 빈민가 소년에게 음악을 가르쳤죠.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를 청소년 예술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로 만들었습니다. 35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성과가 어떤지 아세요? 엘 시스테마에 참가한 베네수엘라 청소년은 30만여 명에 달합니다. 그중엔 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연소 상임지휘자인 구스타보 두다멜이 있습니다. 감동은 세계 각국에 전해졌고, 마약천국으로 불렸던 베네수엘라는 ‘문화예술국가’로 거듭났죠. (※아브레우 박사는 지난해 10월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면 국가 이미지도 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책이 사라진다. 서울시 김치축제는 딱 세 번 만에 끝났다. 예산 부족이 이유였다. 이하연 회장은 “김치를 세계적 먹을거리로 만들겠다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서울 축제를 없앤 건 촌극 중 촌극”이라고 쏴붙였다. 서 감독이 말을 받았다.
서희태 정부 정책의 연속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해요. 독도 보세요. 정부가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DO YOU KNOW’라는 독도 광고를 뉴욕 타임스에 실은 주인공이 누구죠? 홍보전문가 서경덕(성신여대 객원교수)씨와 가수 김장훈씨 아닌가요?
이하연 연속성이 떨어지니까 자꾸 어설프게 홍보해요. 막걸리 열풍이 그런 것 같아요. ‘막걸리가 떴다’는 말이 나온 지 2년가량 흘렀는데, 성과 등 후속 얘기가 없어요. 정부 정책과 홍보에서 기승전결을 찾을 수 없죠. 이러다 뒤통수 맞을 수 있어요. 일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탁주가 있어요. 니고리자케·도부로쿠 등이죠. 기무치처럼 자신들의 전통음식인 양 포장해 세계에 내다 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비해야 해요.
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박사는 “일본 다카라주조 같은 대형 주류업체는 막걸리와 비슷한 탁주를 생산해 유통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1003호·2009년 9월 8일자 참조). 우리의 세계화 전략, 어설픈 신기루만 키우고 있을지 모른다.
서희태 유행가를 양산해선 안 되는데…. 우리가 그래요. 막걸리가 조금 뜨면 소주도 내보내자고 나오죠. 세계화에 성공하고 싶다면 정부 정책이 장기적이고 꾸준해야 합니다.
이하연 회장과 서희태 감독의 대화는 2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다. 수많은 말이 때론 덤덤하게, 때론 매섭게 오갔다. 아쉽지만 지면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많았다. “정부 정책의 연속성이 없으니까 언젠가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겠나”라며 농을 섞어 물어도 야릇한 미소만 지을 뿐 답을 주지 않았다. 대장금과 베토벤의 첫 번째 김치콘서트는 짙은 여운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 회장은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김치를 알리느라 정작 김치 담글 시간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서 감독은 “외부활동이 많으니까 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들의 김치 콘서트는 또 열릴 거다. 누가 뭐래도 한국의 세계화를 위해 지금껏 뛴 두 사람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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