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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10대 작가 ① >> 대미언 허스트 죽음의 계보학

[새연재] 10대 작가 ① >> 대미언 허스트 죽음의 계보학

[사진 1-1] Damien holding the skull, Photographed by Martin Wong. ⓒ Damien Hirst and Hirst Holdings Ltd, DACS 2011. 해골을 든 대미언 허스트.

쿠미에서 한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

“죽고 싶어….”

-T. S. 엘리엇, <황무지> (1922) 중에서

쿠미에 아름다운 한 무녀가 살았다. 사랑에 빠진 태양의 신 아폴론은 무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무녀는 영원한 생명을 원했다가 마음이 변했다. 무녀는 뒤늦게 아폴론의 사랑을 거절했고 아폴론은 화가 났다. 그래서 그녀가 요구한 영생은 주었으나 영원한 젊음은 주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무녀는 점점 늙고 추해지고 쪼그라들어 조롱 속에 담겨 동굴의 천장에 매달렸고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소원은 ‘죽는 것’이었다.

[사진 1-2] Damien Hirst ‘Forgotten Promises’. Gagosian Gallery, Hong Kong. January 18 to March 19, 2011. Photographed by Martin Wong ⓒ Damien Hirst and Hirst Holdings Ltd, DACS 2011(Gagosian Gallery Shot 18) 가고시안 홍콩 갤러리 개관전, 대미언 허스트의 ‘잊혀진 약속’(2011년 1월 18일~3월 19일).
엘리엇이 <황무지> 를 시작하며 인용한 신화의 내용이다. 이처럼 신화시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에게 죽음은 가장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자 저항할 수 없는 욕망이다.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누구도 쉽게 다룰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욕망(타나토스)’을 대미언 허스트(Damien Hirst·1965~)[사진 1-1]가 집중적으로 다루며, 그의 전시 ‘잊혀진 약속(Forgotten Promises)’[사진 1-2]이 가고시안 홍콩 갤러리(Gagosian Gallery, Hong Kong)에서 3월 19일까지 열렸다.

‘충격’의 대명사 허스트는 경악과 찬탄,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영국 출신의 설치미술가다. ‘미스터 죽음’ ‘악마의 자식’ ‘무서운 아이’ ‘컬트 조각가’ ‘잔혹한 현대예술가’라는 별명과 더불어 자신의 작품을 탁월하게 홍보하고 판매하기에 ‘미술계의 상인’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의 별명에 걸맞게 죽음의 양면성을 다룬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2007)는 940억원에 팔려 화제가 되었다. 오늘날 죽음이 이처럼 비싼 상품이 된 이유는 뭘까?





웰스(富)·섹스(性)·데스(死)
1965년 허스트는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리즈에서 자랐다.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그가 12세 때 가정을 떠났고 아일랜드 출신인 어머니가 시민상담소에서 일하며 홀로 그를 키웠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그림 그리던 그를 격려했고, 그림을 다 그리면 도화지 끝에 다른 종이를 이어 붙이고는 계속 그리게 했다.

그는 “그림이 도화지라는 한계 내에 머무를 필요가 없고 이를 넘어서 확장될 수 있으며 도화지의 한계를 한번 벗어나면 확장은 쉬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그에겐 무한한 상상력이 생겨났다. 도화지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였으며 캔버스의 한계는 고전미술의 한계였다.

일상생활이나 사회제도도 도화지를 연결하듯 그렇게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인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늘 한계와 경계를 벗어나려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허스트는 어렸을 때 두 번이나 절도 혐의로 체포됐으며 어머니는 그 벌로 ‘섹스 피스톨스’의 음반을 오븐에 구워서 과일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는 일찍부터 어머니의 통제를 벗어났다.

리즈 예술디자인대학의 입학시험에 실패한 후 런던 빌딩업체에서 2년간 일하며 다시 도전, 마침내 1986년 골드스미스 대학에 합격했다. 이때 영안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 경험은 오랫동안 그를 두렵게 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했으며 그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 1-3 (1)] Exterior Image of the gallery’s current location. Image courtesy of the Saatchi Gallery, London ⓒ Matthew Booth, 2009. 사치 갤러리 전경

1988년은 영국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골드스미스 대학 2학년인 허스트는 그를 초청하는 갤러리가 하나도 없자 스스로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친구들과 함께 전시를 열기로 한 그는 직접 전시 기획을 맡고 템스 강 부근에 있는 빈 창고건물의 책임자를 찾아가 무료로 빌려달라고 부탁하고 후원금까지 요구했다.

이 첫 시도가 예상외로 성공하자 용기를 얻은 허스트와 친구들은 예술 관련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전시회를 알렸고 초대장과 카탈로그를 보냈으며 주요 인사를 전시장까지 직접 모시는 등 완벽한 기획을 했다. 바로 이 자리에 사치 갤러리의 찰스 사치[사진 1-3 (1) / 사진 1-3 (2)]와 화이트큐브 갤러리의 제이 조플링이 참석했다. 상상을 초월한 획기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금기를 넘어선 자유로움이 가득한 이 전시 ‘프리즈’는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사치 갤러리는 1992년 3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6회에 걸쳐 역사적인 전시회 ‘영국 청년 작가들’을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허스트를 비롯해 트레이시 에민, 제이크와 다이노스 채프먼 형제, 세라 루카스[사진 1-4], 개빈 터크[사진 1-5] 등 이후 영국미술을 이끌어갈 다수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또한 사치 갤러리는 이들의 작품을 구입해 이들이 재정적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시 이후 전시의 제목 ‘영국 청년 작가들(Young British Artists)’을 줄인 용어인 ‘YBAs’ 그룹이 탄생했는데 이후 이 용어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활동한 영국 젊은 작가들 그룹과 그들의 정체성을 지칭하게 됐다. YBAs는 각종 주제를 포괄하는 다양성을 가지고 개념·소재·표현 등 모든 면에서 파격적·실험적·혁명적인 방법으로 시각적·감성적 폭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전술적 충격요법’으로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들듯” 그렇게 잠들어 있던 영국 현대미술을 일깨웠다.

[사진 1-3 (2)] Exterior Image of the gallery’s current location. Image courtesy of the Saatchi Gallery, London ⓒ Matthew Booth, 2009. 찰스 사치 갤러리스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의 신진보의 기치, 정부의 예술 지원과 더불어 왕립미술관에서 개최된 YBAs의 ‘센세이션’전(1997)은 커다란 호평과 함께 국제 미술계로 진출할 도약판이 됐다. 이처럼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한껏 고취하는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에서 예술의 꽃이 활짝 피어났는데 이 꽃의 토양은 1970년대 그룹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오랜 전통과 관습에 묶여 있는 영국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영국의 펑크적 무정부 상태는 곧 대처리즘의 초강경지배로 대체되었지만 그래도 당시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섹스 피스톨스의 해체주의적 반미학적 정신이 YBAs로 계승[사진 1-5]되었으며 특히 허스트는 비즈니스 역량을 가진 섹스 피스톨스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잊혀진 약속’전[사진 1-2]을 계기로 한 소감에서 그는 ‘스’로 끝나는 3개의 단어인 ‘웰스(wealth·富), 섹스(sex·性), 데스(death·死)’를 강조했다. 마치 고전적 덕목인 ‘진선미’를 대변하는 듯한 이 낱말들은 ‘섹스(Sex)’와 ‘피스톨스(Pistols·권총)’와도 어감이 멀지 않다.

이 해체적 섹스(사랑)와 죽음의 공포가 충격적인 섹스와 죽음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1980년대의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때문이었다. 에이즈는 서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정치·문화를 비롯한 일상사의 미세한 습관까지 단시간에 바꾸게 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구태의연한 느낌의 영국은 YBAs 덕분에 다시 젊음과 활기를 가진 나라로 인식되고, 무엇보다 세계 미술계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상황을 뛰어넘어 오늘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시장으로 도약했다.
[사진 1-4] Tracy Emin, Damien Hirst, Jake and Dinos Chapman and Sarah Lucas Installation View. The Saatchi Gallery, Boundary Road, London March 1992~August 2001. Image courtesy of the Saatchi Gallery, London ⓒ Saatchi Gallery, London. 영국을 현대미술 강국으로 만든 역사적인 전시 ‘YBAs’. 트레이시 에민, 대미언 허스트, 제이크와 다이노스 채프먼 형제, 세라 루카스 등 참여.

YBAs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허스트의 뛰어난 역량과 기획, 두 주요 갤러리스트 찰스 사치와 제이 조플링, 데이트 모던의 이사이자 골드스미스 대학 선배인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정부의 예술 지원,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섹스 피스톨스의 해체적 음악 등 여러 요소가 작용했다.

YBAs 가운데 허스트가 특별히 눈에 띄는 이유는 보편적인 주제를 충격적인 방법으로 재현하고 평범에서 비범을 찾아내 작품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에 더욱 충격적이고 이 충격은 그의 작품을 잊을 수 없게 한다. 그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전에 참가하고 1995년에는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았다.

그는 예술사업의 규모가 커지자 비즈니스 매니저 프랭크 던피를 고용했다. 던피는 쇼 비즈니스 사업을 하면서 배우들 매니저를 했던 베테랑으로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 를 약 940억원에 팔아주고 갤러리를 거치지 않고 런던 소더비 경매에 직접 판매해 2280억원을 벌도록 도왔다.

또한 그는 갤러리에 슈퍼스타 예술가를 특별 대우하도록 요구하며 거래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을 얻도록 했다. 허스트·쿤스·카푸어 등과 같은 슈퍼스타 작가들은 갤러리보다 그들의 비즈니스 매니저들에게 더 의지한다.

[사진 1-5] Gavin Turk Installation View. The Saatchi Gallery, Boundary Road, London March 1992~August 2001. Image Courtesy of the Saatchi Gallery, London ⓒ Saatchi Gallery, London. ‘YBAs’ 전시에서 개빈 터크 전시 풍경. 중앙의 조각은 터크가 섹스 피스톨스의 베이시스트 시드 비셔스로 얼굴만 바꾼 작품. 1978년 시드 비셔스는 바로 이 조각과 똑같은 차림으로,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를 펑크식으로 부르며 팝음악의 고전을 해체했다.


작품세계



죽음과 욕망
허스트의 작업은 인간 심리의 모순된 욕망을 다양하게 재현하면서 꾸준하게 일관된 주제인 ‘죽음에 대한 욕망(타나토스)’을 다룬다. 그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예술 재료를 사용하여 이를 냉소적으로 표현해 관람객에게 죽음을 좀 더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한다.

그가 제시하는 죽음의 양상은 그의 작업의 꾸준한 주요 소재로서 이중적인 뉘앙스를 지닌 ‘나비’[사진 1-6]와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혼’을 뜻했던 ‘나비(psyche)’는 ‘확실한 시각적인 죽음’과 ‘불확실하지만 화려한 부활’을 동시에 의미한다.



죽음허스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 이하 상어> (1991)이다.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제목도 그의 특징 중 하나다. 1991년 사치 갤러리는 허스트의 첫 개인전에 앞서 그가 어떤 작품을 제작해도 가격을 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역사적인 작품이 만들어진다. 허스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어부에게 “당신을 삼켜버릴 만큼 커다란 상어”를 주문했고, 길이 4.6m에 2t이 넘는 거대한 상어를 포름알데히드가 가득 찬 유리관 속에 넣고 모터를 달아 움직이게 한다.

총 제작비가 1억원이 들었고, 사치 갤러리는 이 액수를 지급했다.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겨 있는 상어는 병원 연구실이나 자연사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표본과 비슷하다. 당시 허스트는 이 상어가 살아 있는 동물처럼 보이기를 원했고 관람자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상어가 그들을 잡아먹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기 원했다.

해양박물관의 거대한 수족관에서 실제 살아 있는 상어들을 보면서도 겁내지 않는 관람자들이 과연 이 작품을 보며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술 안에서 재현되었던 ‘고상한’ 형태의 죽음과는 다른, 또한 실험실이나 박물관에서의 과학적·교육적 목적이 아닌 미적 감상의 목적으로 죽음이 미술관에 전시되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사진 1-6] Damien Hirst, Idea leuconoe in Nerium oleander, 2009~2010 Oil on canvas 72x46½inches(182.9x118.1cm)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 Damien Hirst and Hirst Holdings Ltd, DACS 2011. 죽음과 부활, 나비 고치의 추함과 나비의 화려함 등 양면성을 지닌 ‘나비’는 대미언 허스트가 즐기는 소재.

이 작품을 두고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 선> 은 “감자튀김도 빠진 생선이 1억원이라니”라는 획기적인 제목으로 <상어> 의 비싼 가격을 조롱했다.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음식 ‘피시 앤드 칩스(생선과 감자튀김)’는 영국의 작은 마을에도 ‘칩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식당이 하나는 있을 정도로 영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지극히 영국적이고 재치 있는 이 기사 제목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여전히 회자된다.

적어도 이때는 감자튀김은 없어도 ‘생선’만은 싱싱했다. 이 <상어> 는 13년 후에 다시 출현, 이번에는 영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91년 1억원이었던 <상어> 가격이 2004년 120배가 뛰어 120억원이 됐다. 오랜 기간 포름알데히드 안에서 죽음을 유지해야 했던 상어의 피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너덜너덜했는데도 말이다. 사치 갤러리의 <상어> 판매를 돕겠다고 가고시안 갤러리가 나섰다. 가고시안 갤러리스트인 래리 가고시안은 영국의 현대미술전문지 <아트리뷰> 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세계 예술계를 움직이는 ‘파워 100인’에서 첫 번째로 발견되는 이름으로, 단순한 미술 거상의 의미를 넘어서 거대기업의 사장과 같다.

그러자 상어를 낚겠다고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니콜러스 세로타 관장과 미국에서 헤지펀드를 운용하는 세계적인 컬렉터 스티브 코언이 낚싯줄을 던졌다. 부패한 상어는 120억원이라는 떡밥을 내민 코언에게 낚였다. 허스트는 더욱 유명해졌으며 그의 작품 가격 또한 치솟았다. 영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두 갤러리스트, 영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미술관 관장, 세계적인 컬렉터가 다 모이자 부패한 상어도 엄청난 가격에 판매가 가능했다.

허스트의 상징이 되어버린 ‘포름알데히드 유리관’ 속에 그의 모든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죽은 양을 통째로 방부액에 담는가 하면 심지어는 소 한 마리를 열두 토막으로 잘라 12개의 유리관에 넣어 따로따로 진열한다. 이처럼 상어·양·소·돼지 등이 전기톱으로 끔찍하게 잘려진 단면 그대로 관람객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분리된 어머니와 아이> 라는 작품으로 허스트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다. 이 작품은 어미 소와 송아지를 머리에서 꼬리 길이로 반으로 가른 뒤 포름알데히드 유리관에 각각 나누어 담았다. 분리된 유리관 사이로 걸어가면 끔찍하게 잘려진 소의 내장들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어미 소와 송아지가 둘 다 유리관에 진열된 운명, 반으로 나뉜 가련한 아기 송아지, 송아지의 비극을 지켜보는 측은한 어미 소 등. 유리관 사이를 통과하며 충격을 받은 관람자들은 유리관 안에 있는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안심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운명인 죽음. 허스트는 가능한 한 모든 존재의 죽음을 실험해본다. 하잘것없는 파리의 죽음에서부터 거대한 상어의 죽음까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1999~2004)의 죽음에서부터 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in nomine patris)> (2004~2005)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방식으로 오늘도 죽음의 계보학을 쓴다.

그의 전시 제목 ‘잊혀진 약속’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서구문명을 상징하는 쿠미의 무녀에게 ‘잊혀진 약속’이란 아폴론에게 약속했던 ‘사랑’으로, 잊혀진 약속(사랑)의 대가로 결국 죽음의 욕망(타나토스)만 남았을 뿐이며, 사랑과 생명이 깃들 수 없는 ‘황무지’ 같은 문명의 ‘영원한 노쇠함’에는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다.

구대륙의 허스트가 이처럼 ‘죽음의 계보학’을 쓴다면 신대륙의 쿤스는 ‘사랑의 고고학’을 파헤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구대륙이 신대륙보다 좀 더 심각하고 비관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면 신대륙에서는 구대륙보다는 좀 더 실증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욕망부패한 생선값 120억원 정도는 비교도 하지 못할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의 해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든 <신의 사랑을 위하여> (2007)가 940억원에 팔렸다. 허스트는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의 상징인 해골 위에 사치의 상징인 다이아몬드를 덮어 욕망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 해골의 엄청난 가격을 뛰어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미술시장의 구조는 작가가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판매한다. 이는 작가가 고객과 직접 가격을 흥정할 필요가 없어 고상함과 체면을 유지하는 동시에 작품 생산에 좀 더 몰두하도록 해준다. 또한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갤러리를 통해야 이윤을 나누더라도 훨씬 득이 되기 때문이다.

일요작가에서 슈퍼스타작가에 이르기까지 작가에도 많은 차이가 있듯이 갤러리도 활동 범위에 따라서 동네가게 같은 갤러리부터 세계적인 기업 갤러리까지 다양하다. 슈퍼스타 허스트는 대기업과 같은 가고시안과 사치 갤러리의 작가다. 한 생산자가 대기업을 상대로 싸운다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2007년 <신의 사랑을 위하여> 의 판매에 기업 갤러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서였을까? 2008년 허스트는 자신이 직접 경매에서 작품을 팔기로 결정, 미술시장 구조에 직격탄을 먹인다.

그의 옥션 판매를 앞두고 미술계는 다시 한 번 양분된다. 갤러리의 역할을 무시한 허스트는 이제 작가로서 매장되리라는 의견과 그래도 작가가 중요하니 이번을 기회로 미술계의 유통 구조가 바뀔지 모른다는 의견이었다. 많은 사람이 전자에 손을 들었다. 허스트와 이러한 기획을 세운 그의 비즈니스 매니저 던피, 그리고 런던 소더비는 하나가 되어 이번 세계적 내기에 이기려고 최선을 다했다.

마침내 2008년 10월 런던 소더비에서 ‘내 머리 속의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전시회와 함께 경매가 시작되었다. 223점의 작품 중 218점이 낙찰돼 2280억원이라는, 개인 작품 판매가로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긴다. 많은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 어떻게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는지는 경매를 지켜보았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매 중에 허스트의 가장 비싼 작품들, 즉 낙찰이 어려운 작품들을 구매한 컬렉터들은 다름 아닌 가고시안과 사치였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직접 판매한 허스트의 작품을 구입했다니 심정상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보다는 사업을 택했다. 그들의 갤러리 창고에는 수많은 허스트의 작품이 쌓여 있는데 작품 가격이 떨어지면 직접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을 대상은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스트의 높은 작품 가격을 유지하려고 이 두 갤러리스트는 낙찰이 어려운 가장 비싼 작품들을 구입했다. 이후 허스트는 더 이상 공개적인 직접 판매는 하지 않았으며, 미술시장 구조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지속된다. 누가 승자였을까?



DIY(스스로 해)!마르셀 뒤샹의 <샘> 이 그러했고 또한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도 누구나 할 만한 쉬운 작품들이다. 허스트의 작품도 누구나 해볼 만한 것이 많다.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개최된 전시 오프닝에서 허스트는 “전시된 그림 중 내가 그린 것은 단 한 점도 없다”고 폭탄선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작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장인정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아이디어 혹은 ‘개념’만을 만드는 창조자의 입장에 철저하겠다는 태도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그를 맹렬히 비난한다. 그의 작품은 자극적이고 혐오스러우며, 그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고 예술을 장사로 변질시켰으며, 무엇보다 누구라도 할 만한 작품인데 너무 비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논란에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하지 않았습니까?” ‘콜럼버스의 달걀’을 연상시키는, 아니 좀 더 현대적으로 섹스 피스톨스의 모터인 “DIY!(Do It Yourself·스스로 해!)”를 연상시키는 지적이다.

상점을 열기 전에 그 지역의 시장조사를 하듯 갤러리가 개관하려고 작가를 초대할 때는 갤러리가 위치한 지역의 그림 애호가들이나 수집가들의 성향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지난해 가을 가고시안 갤러리가 파리에서 개관전을 열 때는 추상주의 대가인 ‘사이 톰블리’를 초청했지만 아시아를 목표로 홍콩에 갤러리를 개관하면서는 황금빛 죽음을 충격적으로 다루는 허스트를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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