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키워낸 어머니의 꿈
대통령을 키워낸 어머니의 꿈
1960년 미국에서 민권법이 제정되기 전, 그리고 여성운동이 움트기 전 17세의 한 이지적인 백인 여성이 대학에 입학한 지 몇 주 만에 임신 사실을 알았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학기 말에 중퇴했다는 사실도, 그녀 뱃속에 든 아기의 아빠가 다른 대륙 출신의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도 아니었다. 미국의 절반 가까운 지역에서 흑백 결혼이 중죄에 해당되는 시절에 그녀가 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았다. 결혼 직후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아들이 너무 놀라운 재능을 타고나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미국 대통령도 할 수 있다”는 그녀의 확신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런 확신이 옳았다는 사실까지.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네게 흥미로운 삶을 줬다”고 오바마 대통령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녀 자신의 삶도 흥미로웠다. 관습타파적이고, 많이 돌아다녔으며, 당시의 기준으로는 완전히 생소한 삶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온갖 불편을 겪은 뒤 나중에야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캔자스주에 거주하는 부부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어린 시절 유목민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다. 12년간 일곱 번이나 이사한 뒤 시애틀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오바마가 그렇게 애틋하게 기억하는 조부모의 삶도 그들 나름대로 극적이었다. 재니 스콧이 예리한 시각으로 기술한 전기 ‘버락 오바마 모친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A Singular Woman: The Untold Story of Barack Obama’s Mother)’가 이를 뒷받침한다. 외조부는 “늘 익숙한 삶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오바마는 평했다. 일찍이 아직 고등학생이던 할머니와 함께 야반도주를 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둘이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할아버지 랠프 던햄은 매력적이고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꿈이 많았다. 할머니는 빈틈없고 현실적이었다. 결혼 후 할머니 매들린이 할아버지보다 돈을 더 많이 벌 때가 많았다. 1942년 그들은 외동딸에게 스탠리라는 남자 이름을 지어줬다. 그 이름이 그녀의 운명을 좌우했을지도 모른다. 훗날 오바마가 “책 읽기를 좋아하고 민감한 시골 소녀”라고 묘사한 그녀는 특히 아버지로부터 과잉보호를 받았다. 그는 딸이 시카고대 조기입학 제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하와이대에 입학했다. 이는 과보호가 반드시 자녀교육에 좋지는 않다는 교훈을 준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녀는 중간 이름으로 개명했다. 임신했을 때 이름은 앤 던햄이었다. 사회생활에선 대부분 재혼으로 얻은 이름 앤 소에토로를 썼다. 나중엔 S 앤 던햄으로 책을 펴냈다. 평생 동안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그럴 만도 했다. 늘 변함없이 ‘간판’에 회의적이었고, 어떤 교회에 속하지 않고도 깊은 정신적 특질을 지녔으며, 조직화된 종교는 폐쇄적인 조직이나 다름없이 거북하게 여겼으니 말이다. 오바마는 “어디를 가든 친구들을 엮어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의 일과 자녀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는 세계 시민”으로 모친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 시골 마을의 소녀에서 여성문제에 무게를 둔 국제개발 전문가로 변신하면서 그것을 거듭 입증했다.
그녀는 결코 자신과 같은 배경의 남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혼 직후 인도네시아 출신 대학원생 롤로 소에토로와 결혼했다. 여섯살배기 오바마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자바로 건너갔다. 1970년 원시적인 환경에서 오바마의 의붓 여동생 마야를 낳았다. 롤로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언어폭력이 심했다. 그는 한밤중에 위스키 병을 들고 돌아다니는 일이 잦았다. 오바마가 보기에 그 결혼은 눈에 띄게 쓸쓸했다. 엄마와 의붓아버지는 1979년 이혼에 합의했다. 그 뒤로 엄마는 남자와 오래 교제하지 않았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면서도 소에토로는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남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만큼 그들에게 호기심도 많았다.
자녀양육에는 늘 용기가 필요하다. 여자 혼자일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973년 당시 앤 소에토로는 인종과 아버지가 다른 두 자녀를 혼자 힘으로 길렀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자신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여기에 약간의 역설이 있었다. 동남아 지역의 빈민에게 자본 또는 신용을 제공하는 소액금융 분야에서 일했지만 그녀 자신은 빈털터리인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데는 금전적인 이유도 있었다. 해외에선 안락한 생활이 가능했지만 미국으로 돌아가면 빚더미에 올라앉을 뿐이었다. 성공한 여성에게 자녀가 있을 때 우리는 보통 그녀의 양육 능력을 먼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앤 소에토로의 경우는 다르다. 어쨌든 우리는 미국 44대 대통령이 어떤 배경 출신인지를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녀는 어떤 엄마였을까? 적어도 아들의 교육 문제에서는 철저했다. 그녀는 예절을 대단히 중시했다. 버락 오바마는 어릴 때부터 지극히 공손했다. 앤 소에토로는 어릴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세계에 느끼는 의무감, 근면의 중요성, 나눔의 필요성을 주입했다. 외부에서 보는 미국인의 두 가지 특성은 무지와 오만이다. 그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반면 열린 마음에 높은 가치를 뒀다. “내 가치관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어머니에게서 타인을 이해하도록 배웠다”고 오바마 대통령은 썼다. “아인슈타인, 간디, 가수 해리 벨라폰테”의 좋은 점만 갖추도록 교육할 생각인 듯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녀가 아들에게 가르친 내용의 일부는 의도적이기보다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그녀는 개인적인 이유로 흑인으로 살기가 미국보다 더 어려운 나라로 아들을 데려갔다. 그리고 아들을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로 길렀다. 한 무리의 인도네시아 아이가 10살의 오바마를 향해 돌을 던지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그들 주위를 돌며 춤을 췄다. 한 친구가 아이들을 제지하려 나섰다. “아녜요. 애는 괜찮아요.” 엄마가 대답했다. “그런 일엔 익숙해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가정교육이 분명 많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배움의 가치를 강조했다. 자신이 솔선수범했다. 그것이 오바마의 어린 시절 성장환경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엄마가 아들의 숙제를 타이핑하고 교정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예습을 했다고 밝혔다. 거의 텅 빈 냉장고와 엉망인 집 때문에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전하자 그녀는 발끈했다. 그녀는 아들을 앉혀놓고 자신은 싱글맘이고 학교에 다니며 두 자녀를 키운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과자 굽는 일은 사치에 가까웠다. 자카르타의 명문 학교는 인도네시아인을 받지 않았으며 등록금이 비쌌다. 그녀는 오바마가 아홉 살 때 하와이로 돌려보낸 뒤 곧 자신도 그 뒤를 따랐다(마야는 처음엔 홈스쿨링을 했다). 그리고 1975년 아들과 자신의 학업을 위해 미국의 대다수 엄마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했다. 열세 살짜리 아들을 아이의 조부모에게 맡기고 자신은 박사과정 현지조사를 하겠다며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자녀와의 이별이 소에토로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오바마의 여동생 마야는 그것이 엄마에게는 이제껏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들이 교육을 받기에는 하와이의 환경이 가장 좋았다. 그곳에선 오바마가 꽃을 피웠다. 소에토로는 해외로 나가야 연구의 기회가 주어졌다. 오바마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기억했다. 인도네시아에선 배울 게 없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잘 적응했다. 어찌면 국내에서든 외국에서든, 엄마든 양육을 떠맡은 조부모든, 그에게 가장 시급한 과업을 돕기는 불가능했다고 보는 편이 가장 적절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자라는 법 말이다.
3년 후 그녀는 자녀와 떨어져 사는 생활을 더는 견디지 못했다. 아들이 엄마 없이 자라는 데 따르는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아들과 인생을 공유하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1978년 가을 호놀룰루로 돌아가 몇 개월을 함께 지냈다. 아들의 언행에 약간의 반감이 묻어났다. 오바마의 적대감이 십대의 보편적인 분노였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소에토로가 부모에게 거칠게 반항했던 나이다. 그리고 지금 반항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아들을 임신했던 나이였다. 엄마가 자신의 야망을 더 중시할 때 자녀가 고통을 받을까? 그 답은 아직 모른다. 오바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치 않았다. 직장에 다니던 할머니는 그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 오바마의 저서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의 헌사 페이지에선 할머니가 “내 평생 안정의 바탕이 되는 반석”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다.
오바마의 동생이 그 수수께기를 가장 적절히 표현했을지 모른다. “꿈을 품은 여성은 항상 문제에 부닥친다.” 그리고 앤 소에토로는 분명 꿈을 가졌다. 낙천적이고 태평했으며 금방 매력을 뿜어내고 잘 웃었다. 그녀는 또한 지칠 줄 모르고 저돌적이며 야심적인 일벌레에다 욕구가 강한 여성이었다. 홍수에 잠겨 가슴까지 진흙이 차오르고 모기떼가 우글거리는 논 속을 헤치고 다니기를 겁내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열적이었던 그녀는 항목별로 조목조목 나눠 말하지 못했다. 정신이 자유롭다기보다 행동이 자유로운 자유계약 선수에 가까웠다. 장기계약으로 한 팀에 몸을 바쳐야 하는 부모의 자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5년 새해 첫날, 그녀는 자신이 달성해야 할 목표 12가지를 노트북에 기록했다. 과자 굽기는 우선순위에 없었다.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끝에 가까웠고(마야) 하나는 마지막(23세의 버락)이었다. ‘박사과정 이수’가 첫째였으며 그 다음이 경제적 안정이었다. 특이하게도 넷째 목표가 재혼이었다. 파격적이고 남다른 삶의 양식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없었다.
그녀는 군자연하는 태도에 언제나 변함없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관행을 용인하지 못했으며 병적일 정도로 정직했다. 그리고 50세까지 스타킹은 구경도 못해 본 공상적인 이상주의자였다. 보통사람은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자녀 교육에는 지역사회 전체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론을 신봉했던 만큼 오늘날 그녀가 미셸 오바마의 모친과 함께 백악관에서 어른 노릇을 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항상 그렇듯이 자녀교육은 항상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아들이 엄마에게서 받은 가정교육은 그녀가 가르치려는 교훈과 자신도 모르는 새 아들이 보고 배운 다른 교훈의 합이다. 공공 봉사와 꾸밈없는 이상주의는 직접 모친의 본보기를 따랐다. 어머니가 주변 수km이내에서 유일한 서방 여성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냈듯이 그도 백인들의 바다에서 굳건하게 우뚝 섰다. 그러나 변방에서 주변인으로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며 살려 하지 않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오바마는 직접 온갖 혼란을 겪었다. 그래선지 분명 그런 혼란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소에토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직장여성, 독신 여성, 문화적 규범을 뛰어넘는 여성에 갖는 사회의 편견을 거부했다.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에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분명 두 차례 결혼 실패의 결과가 아니면 두 번 결혼한 원인인 듯하다. 그녀는 집에서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없었다. 스스로 전통적인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는 즐겨 말했다. “나는 화성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들에게 남겨놓은 인생 목표는 단 하나, 변화가 없는 삶의 추구였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미셸 오바마의 가족을 만났을 때 ‘비버는 해결사(Leave It to Beaver, 남편은 일하고 아내는 가사와 육아를 맡는 내용의 60년대 초 드라마)’의 세트장에 그가 들어섰다고 느낄 만도 했다. 거기에는 화목한 가정의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안정에의 갈구와 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소속감”을 그에게 불러일으켰다. 모험을 좇는 삶은 그때까지로 충분했다. 그는 엄마의 몽상적인 로맨스와는 다른 자신만의 로맨스를 선택했다. 감상적이고 속박되지 않은 보헤미안이 낳은 아들은 자연스럽게 신중하고 냉철한 체제지향형 인간이 됐다. 그의 모친은 유창한 언변에 공상적인 반면 아들은 간결하게 말하고 냉정했다. 자신은 외국생활을 오래하며 인도네시아를 고향으로 여기게 됐지만 아들은 확고부동한 미국인 애국자가 됐다. 아들이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부분에선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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