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기업 회생 전문 CEO

2000년 3월 DJ정부는 퇴출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퇴출기업에는 쌍용중공업(현 STX㈜)이 포함돼 있었다. 이듬해 쌍용중공업의 경영권은 한누리컨소시엄으로 넘어갔다. M & A (인수합병)를 지휘한 주인공은 한누리투자증권(현 KB투자증권) 최진식(53) IB본부장이었다. 그는 쌍용중공업의 회생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주주권을 1년여 행사했다. 당시 CFO였던 강덕수(61·현 STX 회장) 전무를 CEO로 추천한 이도 그다. ‘강덕수 신화’의 서막을 올려준 셈이다.
강덕수 추천한 최진식 “아쉽지 않다”그해 최 본부장이 M & A에 성공한 기업은 또 있었다. 프레스(압축가공기계) 업체 쌍용정공이었다. 그는 강덕수 회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회사 경영권을 훌륭한 CEO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CEO에 올랐다. 쌍용정공의 사명을 심팩으로 변경하고 자신은 심팩 회장에 등극한 것이다. 금융인에서 제조업 CEO로 변신. 주변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 프레스 업계 1위 쌍용정공은 회생 가능성이 충분하다.”
최진식 회장의 눈은 매처럼 정확했다.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쌍용정공(현 심팩)은 고속질주하고 있다. 글로벌 프레스업체 독일 슐러, 일본 고마쓰·아이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했다. 심팩홀딩스(지주회사)·심팩메탈로이(합금철 생산)·심팩ENG(철판가공유통) 등 그룹 매출은 지난해 4584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재계 12위(공기업 제외) STX의 성장세에는 미치지 못한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창업가로 떠오른 강 회장보다 최 회장의 무게도 떨어진다. 아쉽지는 않을까. 최 회장에게 심경을 물어봤다.
2001년 쌍용중공업 M & A를 주도했다던데.“그렇습니다. 제가 인수 주체였습니다.”
강 회장을 CEO로 추천한 주인공으로 들었습니다.“맞습니다. 강 회장을 다각도로 검토한 뒤 추천했죠. 물론 강 회장의 요청도 있었고요.”
최 회장이 없었다면 강덕수 신화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허허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기업가 정신과 책임감이 워낙 투철하셨으니까요.”
강 회장이 CEO에 오른 뒤 STX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내가 CEO 맡을 걸’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허허허.”
테가 없는 안경에 희끗희끗한 머리. 최 회장의 첫인상은 날카롭다. 돈을 다루는 금융인 출신이라 더 그렇게 보인다. 실제 성격은 반대다. 농 섞인 말로 상대방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금융인을 ‘재미없는 직업’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유롭다. 애써 말을 아끼거나 속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예민한 강 회장에 대한 질문에도 시원하게 답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뭐 이런 식의 질문이죠? 답부터 말하죠.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강 회장은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요. 업무능력·리더십 등 부족한 게 별로 없죠. 전 남의 실적과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죠.”
‘아쉬울 게 없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최 회장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다. 욕심이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회사나 직원이 나를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쉬울 게 없는데 쌍용정공 CEO는 왜 맡았습니까. 자리 욕심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등 떠밀려 맡은 거나 다름없어요.”
지금껏 최 회장이 금융인에서 제조업 CEO로 변신한 사연이 알려진 적은 없다. 세상은 그의 ‘낯선 변신’에만 주목했다. 최 회장은 “강요된 길이었다”고 했다. “쌍용정공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CEO를 맡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쌍용정공을 인수할 만한 CEO를 찾았어요. 화일프레스 진세영 회장(2010년 별세) 등 후보군이 있었죠. 이들과 수차례에 걸쳐 가격협상을 했어요. 하지만 정작 인수의지를 밝힌 CEO가 없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CEO를 맡았어요.”

쌍용정공 인수 후 연봉 700만원쌍용정공의 인수자가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적자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부채비율은 1000%가 넘었다. 청산이 거론된 적도 있었다. 쌍용정공의 인수 전 당기순손실(2001년)은 51억원이었다. 이렇게 죽은 기업을 누가 M & A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최 회장은 달랐다. 그의 말대로 어쩔 수 없이 맡았지만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무엇보다 국내 최고인 쌍용정공의 시장점유율과 기술력을 믿었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인수 이듬해인 2002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심팩(쌍용정공 인수 후 사명 교체)의 지난해 매출은 1805억원, 당기순이익은 201억원을 기록했다. 인수 당시에 비해 매출은 4배, 당기순이익은 200배가 됐다. 최 회장은 “시장점유율이 높은 기업은 언제든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다”고 말했다. 겸손한 말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다. 심팩을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털었다. 주택·상가건물·주식 등 자신이 보유한 모든 재산을 담보로 잡았다. 스스로 연봉도 낮췄다. 인수 초창기 그의 연봉은 700만원에 불과했다. 한누리투자증권 IB본부장 시절 그가 받은 연봉은 최소 1억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해외 출장을 끊임없이 다녔다. 비용은 물론 사비를 털어 마련했다.
최 회장은 “심팩 초창기엔 1년에 절반쯤은 해외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 포드·메르세데스 벤츠·GM·르노·닛산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계약을 체결했다. 심팩의 해외수출 비중은 현재 35%에 달하고 중국·인도·브라질·터키 등 해외법인 7개를 갖고 있다. 그는 R&D(연구개발) 의지도 단단했다. 심팩의 매출 대비 R&D 비율은 현재 6%에 이르고, 직원 240명 중 27명이 연구원이다. 심팩은 프레스 기계 관련 12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11개를 M & A 이후에 등록했다. 최 회장의 R&D 의지가 알찬 열매로 이어진 것이다.
최 회장의 전략은 또 있었다. 계열사를 활용해 위험을 관리했다. 프레스 기계를 원활하게 생산하려면 원자재 확보가 관건이다. 원자재 가격의 등락에 따라 회사 수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이런 위험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계열사에서 찾았다. 그 일환으로 2005년 철근가공유통업체 심팩ENG를 설립했다. 가공·유통비를 줄여 원자재 리스크를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는 “심팩ENG의 매출은 500억원을 조금 넘지만 그룹 전체로 봤을 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6년 한합산업을 M & A한 심팩 메탈로이도 같은 역할을 한다. 심팩 메탈로이는 합금철 회사다. 합금철은 쇠를 강하면서도 질기게 만드는 소재다. 제강·제철 분야에선 없어서는 안 될 소재다. 당연히 합금철 수급은 중요하다. 합금철을 제대로 수급하지 못하면 회사 이익이 줄어든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합산업을 M & A한 것이다.
글로벌 불황 때 1250% 보너스 건네한합산업 역시 ‘죽어가는 기업’이었다. 2006년 인수 당시 한합산업은 법정관리 상태였다. 당기순손실은 53억2000만원에 달했다. 게다가 강성 노조가 늘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던 한합산업이 최 회장의 손이 닿자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인수 이듬해인 2007년 89억원의 흑자를 올렸다. 심팩 메탈로이의 지난해 매출은 1966억원, 당기순이익은 249억원을 올렸다. 인수 이전인 2005년보다 매출과 당기순이익이 각각 6개, 20배로 늘었다.
최 회장은 “노조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게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에 “딱 3년만 나를 믿어달라”면서 “노조활동을 하지 않고 회사를 위해 업무를 하면 이익을 공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진심은 노조의 언 마음을 녹였고, 노조는 민주노총 탈퇴로 답했다. 그 결과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예전과 같은 원자재를 쓰더라도 생산량이 10%가량 많아졌고, 불량률은 반대로 줄었다. 최 회장도 약속을 지켰다. 심팩 메탈로이 직원들은 2008년 1250%의 보너스를 받았다. 회사 창립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최 회장의 별명은 ‘죽은 기업 소생술사’다. 그는 “별명에 만족하고 또 행복하다”고 했다. “성취욕만큼 사람을 신명나게 하는 건 없다”고도 했다. 최 회장은 요즘 또 다른 성취를 위해 뛴다. 망간 수급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표다. 망간은 강철을 만드는 원료다. 철·알루미늄·동에 이어 넷째로 소비가 많은 광종이다.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해외에서 전량 수입된다. 최 회장은 “아프리카 국가 등과 망간 수급 계약 관련 MOU(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다”며 “망간 계약이 실제로 맺어지면 심팩그룹은 원자재 수급 걱정을 한결 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르면 6월께 각 국가와 MOU가 체결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심팩그룹의 올해 목표는 매출 6000억원 돌파다. 보수적 목표지만 달성한다면 명실상부한 중견그룹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이만하면 최 회장도 욕심을 가질 법하다. ‘그렇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 글로벌 리더 도약하는 최진식
아시아 최초 국제망간협회 부회장 올라최진식 심팩 회장이 5월 24일 국제망간협회 부회장에 올랐다. 아시아인이 부회장 이상에 선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제망간협회는 망간에 대한 정보와 연구 교류 등을 목적으로 1975년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회원은 30개국 91개 기업이다. 국내 기업으로는 심팩, 동부제철, 포스 하이메탈 등 3곳이 가입했다.
매년 한 번 개최되는 국제망간협회 총회가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다. 2009년엔 UAE 두바이, 지난해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됐다. 이 총회는 세계 각국의 철강 및 망간 업체가 최대 1000여 개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회의다.
최진식 회장은 “2008년 국제망간협회 이사로 선임된 후 줄기차게 차기 회의를 한국에서 열자고 주장했다”며 “이번에 총회를 개최함에 따라 국내 합금철 산업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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