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V 너쯤이야!’ 매직 존슨의 마법
어빈 ‘매직’ 존슨은 생각이 깊은 편이 아니다. 과거의 일을 두고두고 되새김질하거나 10분 전에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법이 없다. 그는 1991년 11월 어느 쌀쌀한 아침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그레이트 웨스턴 포럼의 무대에 서서 자신이 HIV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표했다. 지금도 그때를 종종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과거를 그리 많이 돌아보지 않는다. 후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고 LA 레이커스 농구팀의 포인트가드 출신인 존슨이 말했다. “내 가족과 아내 쿠키에게 그런 고통을 준 점, 내가 몇 가지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던 일은 후회한다. 그러나 내가 후회하는 일은 그게 전부다.”
농구의 전설에서 기업 경영자로 변신한 그는 대신 정신을 집중해 심사숙고하는 문제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자신의 삶이다. LA 레이커스 시절 얻은 명성에다 불가능을 이겨낸 생존자의 승리가 더해졌다. 그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어우러져 빚어낸 더 큰 유산일지 모른다.
존슨은 평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베벌리힐스에 있는 사무실까지 8㎞를 조깅으로 출근한다. 그가 이끄는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시즈는 도시의 오래 방치된 지역에서 영화관, 스타벅스 매장과 기타 사업체를 운영한다. 한편 그는 매직 존슨 재단의 HIV·에이즈 홍보·교육 사업에 적극 개입하며 오바마 정부와 긴밀한 협력체제를 갖춰 지역사회 개발 사업을 벌인다. 퇴근 후 속보로 귀가한 후에도 밤 9시까지 업무와 관련된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업무 시간을 많이 줄인 편이다. 부인이 근무시간의 원칙을 정할 때까지 “한동안 밤 10~11시까지 일하곤 했다”고 그가 말했다. “일할 때는 정신을 집중한다. 나는 ‘매직’이다. 일을 사랑하지만 대신 많은 희생이 따른다.”
51세의 중년이라면 거의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힘든 업무일정이다. 게다가 지난 20년간 매일 HIV와 씨름하며 보낸 사람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HIV에 감염돼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모양이야. 매직을 봐, 멀쩡하잖아’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고 에이즈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존슨이 말했다. “약이 내 몸과 체질에 상당히 효과적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약이 그렇게 잘 듣지는 않는다. 나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
1981년 6월 5일, 미국 질병관리본부(CDC)는 LA의 동성애자 남성 다섯 명에게서 이상하고 치명적인 폐렴이 발견됐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 프로농구(NBA)의 시즌 개막 전 정기 건강검진에서 존슨이 HIV 보균자로 판정됐을 무렵엔 에이즈로 사망한 미국인 수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모든 전쟁에서 생긴 전사자 수보다 많았다. 사망자가 매년 증가하는데 치료법은 개발되지 않았다. 1991년 당시의 문제는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완전하고 생산적인 삶을 지속할 수 있느냐보다는 얼마나 더 오래 사느냐였다. 그 과정에서 면역력 약화에 따른 기회감염(opportunistic infections)이 급증하면서 환자의 피부에 이상한 자주색 반점이 생기고 효모 모양의 진균이 폐를 뒤덮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의 산송장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1991년 그날 아침 존슨의 모습은 차분하고 심지어 자신감이 넘쳤다. 제리 버스 LA 레이커스 구단주, 전 레이커스 스타 카림 압둘 자바, 데이비드 스턴 NBA 커미셔너가 그의 곁을 지켰다. TV 카메라 앞에 서 있던 고문과 같은 15분 동안 그는 사뭇 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을 피해 달아날 마음은 없었다. 그럴 순 없었다”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그는 32세의 나이에 눈부신 경력, 뜨거운 열정과 작별을 고하고 끔찍한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생존 가능성은 얼마나 되고 그의 젊은 가족은 어떻게 되나?
그 불과 몇 달 전 존슨과 결혼한 얼리타 ‘쿠키’ 켈리는 임신 2개월째였다. 당장 그녀와 뱃속에 있는 아기의 건강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둘 다 음성 판정을 받았다). 그 밖에 존슨이 바이러스에 어떻게 감염됐는지도 거북하지만 피하기 힘든 의문이었다(결국 그는 1980년대 다수의 여성 파트너와 성관계를 했다고 설명했다).
당초 쿠키 존슨은 감염 소식을 즉시 공개하려는 남편을 말렸다. “그는 자신이 HIV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자마자 세상에 알리려 했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나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두려웠다. 당시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남편이 좀 더 지켜보기를 바랐다.”
당시 에이즈는 동성애자 사이에서만 전염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실은 여성, 아동, 고령자 그리고 이성과 성관계를 하는 남성도 감염 위험이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에이즈 환자임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미국의 상징적인 흑인 안무가 앨빈 에일리는 1989년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의사들에게 자신의 사인을 혈액암으로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다. 테니스의 전설 아서 애시는 1988년 수혈을 통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5년 뒤 사망 직전에야 에이즈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존슨은 드러내놓고 싸우기로 결심했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긴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하늘의 뜻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존슨이 LA에서 에이즈를 보는 대중의 인식을 바로잡으려 힘쓸 동안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열 살짜리 아들 안드레는 그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미시간주 랜싱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그는 초등학교 친구와 학부형들이 던지는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돌이켰다. 지금 그는 30세의 성인으로 아버지 밑에서 일한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나를 타일렀다. 아주 많은 사람이 HIV나 에이즈를 이해하지 못하며 아이들은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어른도 잔인한 면이 있다. 1992년 존슨이 의사들의 허락을 받아 코트로 복귀했을 때 다른 많은 HIV 보균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왕따를 당했다. 팀 동료 몇몇이 그의 출전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경기 중 부상당해 피를 흘릴 경우 자신들이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감염 후 처음 5년이 내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그가 말했다. “효과적인 치료법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었다.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느낌이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겨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그때뿐이었다. 또는 적어도 그 순간이 지나면 잊도록 노력했다. 그런 생각에 오래 사로잡혀 있을 여유가 없었다.”
존슨이 의구심과 싸울 동안 의사들은 그의 몸 안에 침입한 킬러 바이러스와 싸웠다. 데이비드 호 박사는 가능성 있는 신무기로 실험을 시작했다. 이 항레트로바이러스 약품의 칵테일은 HIV를 억제하고 에이즈의 본격적인 발현을 막는 듯했다. 그래서 그 새로운 치료법이 일반인에게 정식으로 적용되기 약 1년 반 전인 1994년 호 박사는 존슨에게 그 약을 처방했다. “우리가 그 치료법을 개발했기 때문에 존슨을 일찍 포함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그의 건강과 삶이 크게 개선됐다”고 뉴욕에 소재한 애런 다이아먼드 에이즈 연구소의 사무실에서 호 박사가 말했다. “초기에는 하루에 여러 번 다량의 알약을 복용해야 했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좋아져 약을 많이 쓰지 않으며 부작용도 작다.” 존슨이 복용하는 약으로는 트리지비르와 칼레트라 등이 있다.
호 박사는 요즘 존슨과 나누는 대화 내용의 대부분이 반드시 매일 같은 시각에 약을 복용하도록 그에게 다짐받는 일이라고 말한다. HIV 보균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다. “존슨은 항상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호 박사가 말했다. “우리는 그가 약을 더 쉽게 복용하도록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는 약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이해한다. 그는 HIV 양성반응자가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다. 그가 HIV와 싸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에이즈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지 30년이나 흘렀지만 HIV와의 싸움은 전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존슨으로서는 답답하다. 에이즈 사망자 수는 세계적으로 2500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3300만 명 이상이 HIV와 함께 살아간다. 근년 들어 미국에서는 흑인 사이에서 HIV 감염자와 에이즈 환자 수가 증가했다. 미국 내 HIV·에이즈 신규 감염자 중 여자가 25% 안팎을 차지하며 그 가운데 세 명 중 두 명이 흑인 여성이다. 2006년 흑인 여성의 HIV 감염률은 백인 여성의 15배, 라틴계 여성의 4배였다. 감염 여성의 과반수가 성관계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 사람이 많아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존슨이 말했다. “그렇게 많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동성애자 사회가 에이즈를 알리는 캠페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것은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한 편견이 심하기 때문에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자녀나 가족과 그 문제를 논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 없이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우리 재단은 바로 그런 변화를 가져오려 노력한다.”
대조적으로 존슨은 20년 전 자신의 HIV 감염 소식에 가족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억한다(그의 가족은 아직도 대부분 미시간에서 산다). “엄마는 전화를 끊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내게로 날아왔다. 아버지도 비행기를 탔고 형제자매들도 내 곁으로 달려왔다. 고모와 사촌들도 모두 비행기를 탔다. 그것이 사랑이고 후원이다. 그것이 에이즈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이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나 심사숙고하지 않는 사람치고 존슨은 자신이 얼마나 크나큰 업적을 이뤘는지 따져볼 동안 약간 놀라는 듯하다. 그는 HIV 보균자에게 충실한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부활절 주간에 아들 안드레,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우리 집을 찾아왔죠.” 그날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너무나 특별한 순간이었어요. 손녀를 품에 안고 놀아주는 것, 이렇게 훌륭한 남편과 아빠가 된 아들을 바라보는 것. 와, 남들은 아마 모를 걸요.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기가 힘들었어요.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을 말이에요.”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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