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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LEADERSHIP]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자`

[WORLD LEADERSHIP]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자`


동독에서 루터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기 집권 지도자가 되기까지 앙겔라 메르켈의 비범한 인생여정
메르켈은 대결보다는 대화와 협력을 추구한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체포된 지 48시간이 지났지만 앙겔라 메르켈(56) 독일 총리는 여전히 그 소식을 곱씹는 듯했다. 유리와 강철로 지어진 베를린의 총리 관저 내 회의실에 앉은 그녀는 스트로스칸의 도덕적 추락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르켈은 스트로스칸과 만나 갈수록 심각해지는 유로화 위기를 의논할 예정이었지만 스트로스칸이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됐다. 매사에 신중한 메르켈은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유죄가 입증되기 전엔 무죄로 간주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법적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겠다.”

최근 어느 이른 오후 메르켈은 빡빡한 스케줄을 쪼개 기자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거의 안 하는 그녀로선 매우 이례적인 배려였다. 메르켈은 기자의 질문에 휘둘리지 않고 인터뷰를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 했다. 깔끔한 베이지색 상의와 검정색 바지를 입은 메르켈은 묻는 말에 독일어로 간결하게 답변했다. 공보담당 비서가 그녀 곁을 지키며 시간을 체크했다. 하지만 기자가 잠시 질문을 멈추고 창 밖 풍경에 감탄하자 메르켈의 단호한 태도(그리고 모국어로만 답변하려는 고집)가 갑자기 누그러졌다. 통일 이후 독일인들은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만들어냈다. 메르켈은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 ‘이쪽’(예전의 서베를린 지역)으로 출근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놀랍다”(메르켈은 공산 치하의 동독에서 자랐다).

더 놀라운 일은 메르켈이 6년 가까이 총리직을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장기 집권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려운 시기에 기민당의 선거 압승을 두 번이나 이끌어냈다. 포브스지는 번번이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여성”으로 지명했다. 올 들어 국내 지지도가 하락하긴 했지만 메르켈은 각국의 국민성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잘 드러내 보여주는 현재 유럽 지도자들(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누구보다 더 이탈리아인답고, 니콜라 사르코지는 누구보다 더 프랑스인답고, 데이비드 캐머런은 누구보다 더 영국인다우며, 메르켈은 누구보다 더 독일인답지 않은가?) 중에서 가장 확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다진 듯하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메르켈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허세부리는 정치인과는 정반대다. 과소평가되기 쉬운 스타일이지만 어떤 정치인이든 그녀를 얕잡아 봤다간 큰코다친다.”

메르켈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독일을 이끌어 왔다. 정부 예산은 줄이고 국민의 자신감은 높였다. 지난해 독일은 3.6%의 경제 성장(서유럽 최고 수준)을 이뤘으며 올해도 경제 전망이 밝다. 유로화의 위기를 맞아 메르켈은 재정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 등 국가채무 부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제할 방법을 부지런히(때로는 마지못해) 모색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독일의 요구에 드러내놓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리스의 한 신문은 독일이 채무국들을 ‘제4제국[현재 독일이 제3제국(나치 독일)의 연장이라는 의미]의 식민지’로, 유럽을 ‘금융의 다하우(나치의 포로 수용소가 있던 곳)’로 만들려 한다고 썼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국가는 이렇게 야유를 퍼붓는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독일이 없다면 유로화는 붕괴될 형편이다. 독일은 현재 유럽의 유일한 경제강국이다.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수출국이며, 미국과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다. 블레어의 말을 들어 보자. “메르켈은 그리스 원조가 단지 문제를 뒤로 미루는데 그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는 어떤 나라에 원조를 제공할 경우 자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근거가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 단순하지만 매우 분명한 논리다.”

여전히 남성이 절대 다수인 세계 지도자 그룹에서 그녀는 꿋꿋하게 자신의 입장을 지켜 왔다. 지난 2월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정착촌 건설 동결 연장을 거부한 그를 책망했다. 네타냐후가 유엔 표결에서 정착촌 반대 의사를 표시한 메르켈을 비난하자 메르켈은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에 따르면) “어떻게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박했다. 기자가 당시 통화 내용을 자세히 캐묻자 메르켈은 “사적인 통화 내용을 발설한 적이 없다”고 말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2국가 해결책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정착촌 건설 중단은 이를 향한 바람직한 단계다. 이스라엘의 친구로서 협상이 이스라엘에 가장 유리한 해결책이라고 확신한다.”

당당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가까운 친구들은 메르켈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녀는 요즘도 통일 이전에 사들인 옛 동독 지역의 작은 별장에서 휴가를 보낸다. 또 그녀의 남편이자 동료 과학자인 요아힘 자우어 교수는 부부가 거주하는 베를린 도심의 소박한 아파트에서 훔볼트대 화학연구소까지 통근한다. 메르켈은 효율적인 사람이다. 제임스 올펜손 전 세계은행 총재는 독립적이고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를 그 이유로 꼽는다. “메르켈은 자신이 총리라는 사실을 내세워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다. 강인한 사람이 아니라면 독일을 이끌어 가지 못한다. 나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세계 무대에서 인권 옹호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 공산 치하의 동독에서 루터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된 자신의 남다른 인생여정을 자주 거론한다. “공산 국가에서 루터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자라면서 ‘자유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자유(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하는 배경이다.”

메르켈은 이번 주 워싱턴 DC에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만나 경제와 현재 진행 중인 전쟁, 미국과 유럽의 관계 등을 의논할 예정이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열리는 만찬에 참석해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미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을 받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독·미 관계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이 상을 받게 됐다. 메르켈은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과는 서로 등을 툭 치며 인사를 주고받는 친밀한 사이였지만 오바마에게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였던 2008년 7월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동서 냉전의 대표적 상징물)을 배경으로 선거유세를 하려던 오바마의 계획을 메르켈이 “적절치 않은 생각”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1년 후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메르켈의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행사 초대를 거절했다. 이 일을 두고 미국의 한 시사풍자가는 이렇게 말했다. “존 F 케네디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냉전 시대 서독을 방문한 케네디는 서베를린 시민을 격려하려고 연설 도중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라고 말해 독일인들을 감동시켰지만 오바마는 대조적으로 ‘나는 바쁩니다’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그들의 초대를 거절한 셈이다.” 오바마는 취임한 지 2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베를린을 방문하지 않아 메르켈 진영은 그가 유럽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는 표시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메르켈 자신은 오바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부시 전 대통령과 믿음직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듯이 오바마 대통령과도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과는 살아 온 배경이 매우 다르지만 뜻이 잘 맞는다. 그가 내게 자유훈장을 수여하려고 워싱턴에 초대한 사실이 우리의 좋은 관계를 말해주는 증거 아닌가?”

메르켈은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독일 경제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던 2008년 12월 독일의 기업 대표와 경제학자, 노조지도자 등 30명이 메르켈의 집무실에 모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지멘스 AG의 CEO 페터 뢰셔는 메르켈이 “참석자 한명 한명에게 독일 경제에서 무엇이 잘못됐으며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물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메르켈은 그들로부터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뢰셔는 말했다. 재계 지도자들은 이듬해에 근로자 상당수를 해고하는 대신 그들의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데 합의했다. 정부는 이에 따르는 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경기가 다시 좋아질 때까지 기업이 숙련된 근로자를 계속 고용하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 독일 정치인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가 메르켈의 정적에게서 나왔지만 그녀는 그것을 수용하고 당 내부의 반대파를 설득했다. “메르켈은 대결보다 협력을 중시한다”고 뢰셔는 말했다. “신뢰를 구축하는 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최근 한 공식석상에서 메르켈은 이런 평판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 지난달 베를린 미국학회에서 헬무트 콜(81) 전 독일 총리는 유로존을 강력히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연설하는 그의 목소리는 들릴락말락 희미했고 발음도 분명치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지만 “독일이 유럽연합(EU)을 유지하는 일에서 제 역할을 못한다”는 연설의 취지는 분명 메르켈(콜은 한때 그녀의 정치적 스승이자 후원자였지만 지금은 관계가 소원해졌다)을 겨냥했다. 하지만 청중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메르켈의 반응은 냉담했다. “독일의 미래는 이웃 국가들과 함께 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콜은 말했다. “우리는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리스와 함께 걸어 가야 합니다.”

지난 3월 메르켈은 리비아 내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개입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표결에 기권해 비난을 샀다. 독일 일간지 디차이트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인 요제프 요페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서방 국가들은 독일이 불간섭주의로 돌아서지 않았나 당황한다. 최근 들어 독일이 이렇게 독단적인 행동을 보이기는 처음이다.” 메르켈은 독일이 NATO 동맹국들을 강력히 지지하며, 자신이 불간섭주의를 주장하는 독일 유권자에게 영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카다피 정권이 종식돼야 하며 리비아인들이 이집트와 튀니지, 시리아 등 세계 여타 지역의 국민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려야 한다는 점에서 우방국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군사적 해결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해결책이 함께 모색돼야 한다.”

베를린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동독의 시골 마을 템플린에서 자란 메르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꽤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메르켈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함부르크에서 가족을 이끌고 그곳으로 이주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이었다. “아주 아름답고 자연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일깨워줬다. 메르켈은 어린 시절 “집안에 책이 가득했고, 손님이 자주 찾아왔으며, 재미있는 대화 상대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경찰국가인 동독에서 살아가는 데 어떤 제한과 위험이 따르는지 잘 알았다. “우리는 독재국가에서 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그녀는 말했다. “부모님은 비밀경찰이 접근해 오면 내가 수다쟁이라서 정보원으로 적합치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라고 일러줬다.” 메르켈은 젊은 시절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라이프치히대에서 물리학 공부에 전념했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과학원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3월 동독에서 유일하게 치러졌던 민주선거 직전 메르켈은 신당인 민주각성당의 동베를린 사무실에 찾아가 자원봉사자로 등록했다. 이 시기에 메르켈을 만난 동독의 정치인 한스-크리스티안 마아스는 메르켈이 “혁명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뭐든 빨리 배웠다”고 말했다. 마아스는 메르켈을 자신의 집으로 자주 초대했고 그녀는 그의 아이들에게 과자를 구워주곤 했다. 민주각성당은 당수가 비밀경찰의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마아스는 메르켈을 과도정부의 부대변인 자리에 앉혔다. 1990년 말 메르켈은 의회에 출마해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콜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 콜은 메르켈이 의회에 당선된 뒤 그녀를 통일 독일 최초 내각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녀에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서광이었다”고 마아스는 말했다.

메르켈은 기민당 내에서 서열이 급상승했다. “난 헬무트 콜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본(통일 이전 서독의 임시 수도)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처음엔 장관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단시간에 배워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배우고 적응해 나갔다. 콜은 차기 정부에서 그녀를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나중엔 기민당 부총재 자리에 앉혔다. 메르켈의 정치 초년기에 그녀와 친분을 쌓았던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출판업자 조지 바이덴펠트경은 그녀가 “매우 친절하고 털털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뱃놀이를 하거나 주말 소풍을 갔을 때 상대방의 말을 경청했다고 한다. “메르켈은 매우 강인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비슷한 유형”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중산층 권리투쟁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민당 원로 의원들은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여성이자 유일한 동독 출신이었던 메르켈을 (어리석게도) 무시하고 얕잡아 봤다. 1999년 콜 전 총리와 볼프강 쇼이블레 기민당 당수가 비밀 선거자금 스캔들에 휘말리자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 스승이었던 콜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에 이 두 사람의 투명성 결여를 비난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글을 게재했다. 쇼이블레가 당수직에서 강제 사임한 뒤 메르켈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5년 뒤 메르켈은 총리에 선출됐다. 베를린의 한 저명인사는 “콜과 쇼이블레는 메르켈이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힘의 정치’ 게임을 할 줄 알았다”

한때 과소평가됐던 앙겔라 메르켈은 조용하고 강인한 성품과 루터교도다운 분별력으로 이제 유럽의 균형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With R. M. SCHNEIDERMAN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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