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인도영화 ‘청원’ - 인간은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
[Culture] 인도영화 ‘청원’ - 인간은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
여기, 한때 독창적인 마술쇼를 선보여 천재로 불린 남자가 있다. 지금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환자 신세다. 곁에는 그를 12년째 헌신적으로 간호한 여자가 있다. 남자는 날개 부러진 새가 된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콧등에 앉은 파리 한 마리 제대로 쫓을 수 없고,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무력할 따름이다. 남자는 법원에 안락사를 허락해달라는 청원을 낸다. 장애인들에게 ‘희망이란 이런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던 그의 돌연한 결정에 안락사를 둘러싼 격렬한 논란이 시작된다.
11월 3일 개봉한 인도영화 ‘청원’은 보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진다. 누군가에겐 사소한 몸짓 하나가 누군가에겐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일일 수 있다. 내가 무심히 흘려보내는 이 시간이 죽음을 앞둔 누군가에겐 행복을 느끼는 마지막 순간일 수 있다. ‘청원’은 이런 깨달음을 선사하는 영화다. 그렇다고 마냥 심각하지도 않으니 더 좋다. 이 영화엔 웬만한 ‘막장드라마’보다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배신과 음모, 눈물과 웃음 등이 126분을 거미줄처럼 감싼다. 중간중간 남자 주인공의 회상 장면을 통해 환상적인 마술쇼를 보여주며 완급을 조절하는 연출이 수준급이다.
올드팝 선곡 뛰어나음악은 ‘제3의 주연’이라 할 만하다.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 ‘스마일(Smile)’ 등 올드팝의 선곡이 뛰어나다. 특히 이튼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가 숨겨놓은 뭉클한 순간 중 하나다. 인도의 유명 휴양지 고아의 풍경과 유럽풍 대저택도 눈길을 고정시킨다. 흥미로운 스토리, 배우들의 호연, 음악. 3박자를 딱딱 맞추며 작품성과 대중성의 하모니를 이끌어낸 지휘자는 산제이 릴라 반살리(48)다. 2005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 10편’에 포함된 ‘블랙’을 만든 감독이다. 그가 안락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블랙’의 대성공 후 착수한 ‘사와리야’(2007)가 참패하면서다.
“(잘 나가던 시절) 내 곁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갑자기 나를 외면했다.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1년 여 동안 안락사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인도를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안락사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난 모든 인간은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도 인간관계와 삶에 대한 씁쓸함이 그의 눈을 이런 주제로 돌린 게 아닐까? “삶과 가깝지만 별로 얘기되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고 싶었다. 영화는 인생의 아름다움과 우리가 가진 것들을 어떻게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게다가 배우들은 어찌나 잘생기고 예쁜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 주인공 이튼을 연기한 리틱 로샨, 간병인이자 애인 소피아 역의 아이쉬와라 라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줘’(2000)로 스타가 된 로샨은 별명이 ‘인도의 마이클 잭슨’일 정도로 춤 실력이 빼어나다. 그가 전신마비 환자 역에 캐스팅된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이 “그렇다면 춤 솜씨를 볼 수 없지 않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초록 눈동자의 여신’으로 통하는 국민 여배우 라이의 미모는 압도적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라이는 ‘블랙’의 주연이자 인도의 유명 배우 아미타브 밧찬의 며느리다. 그녀는 반살리의 제안에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 그의 미모뿐만 아니라 몸매, 의상과 장신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로샨은 달랐다. 출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반살리와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눈지 5분이 흐르자 상황은 달라졌다. “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도 슈퍼히어로 역을 몇 번 했지만, 청원의 이튼 만큼 대단한 슈퍼히어로는 없었다.” 한때 춤실력에 비해 떨어지는 연기력 논란에 시달렸던 로샨은 ‘청원’으로 그런 이미지를 말끔히 씻었다.
완성도 높은 인도영화 관객 발길 끌어 이 영화는 11월 10일 현재 전국 관객 4만여명이 관람했다. 200여개 스크린이라는 개봉 규모에 비해 흡족한 성적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영화 아니면 할리우드영화로 양분된 극장가에선 선전한 것이다. 최근 인도영화의 부상이 뚜렷하다. 올해 ‘내 이름은 칸’이 38만명, ‘세 얼간이’가 45만명을 끌어들였다. 이례적이다. 인도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더불어 점유율 1% 미만인 ‘기타 영화’에 속하기 때문이다. 유럽·중국·일본 영화보다도 점유율이 훨씬 미미하다.
인도영화가 떠오른 건 2009년부터다. 인도와 영국 합작인 대니 보일 감독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전국 관객 110만명을, 시각장애 소녀와 가정교사의 감동스토리를 그린 ‘블랙’이 86만명을 동원했다. 특히 ‘세 얼간이’는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로 ‘볼 사람은 다 본’ 악조건이었지만, 예상을 깨고 흥행해 인도영화 시장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인도영화의 강점은 뭘까. ‘청원’을 보면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완성도가 높다. 정광현 한국인도영화협회 회장은 “발리우드(Bollywood, 봄베이(현재 뭄바이)+할리우드) 영화는 1년에 1000편 가까이 제작되는데, 국내 수입되는 작품은 이중에서도 할리우드를 겨냥해 자본을 많이 투입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보여주듯 인도 스태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인정받는다. 작품 퀄리티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생소한 국적의 영화지만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매끈한 만듦새가 관객에 어필한다는 얘기다.
스토리도 ‘MSG(화학조미료)영화’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자극적이면서 묘한 중독성이 있다. 한 영화 안에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가 공존한다. 희비극을 넘나들다 춤과 노래가 나오는 식의 엉뚱한 전개도 이색적이다. 영화평론가 정지욱씨는 “인도영화는 순정과 배신, 신파 등을 골고루 섞어 특유의 즐거움을 준다. 청원처럼 즐거움 속에 분명한 메시지도 던진다. 인도영화의 장점과 할리우드의 대중성을 잘 취한 것 같다”고 평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국내에서 히트한 인도영화들은 이른바 ‘마살라 영화’로 불리는 정통 발리우드 영화는 아니다. 마살라 영화는 영화 중간중간 춤과 노래를 잔뜩 넣어 뮤지컬적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러닝타임도 3시간은 기본이다. 반면 ‘블랙’ ‘내 이름은 칸’ ‘청원’은 할리우드 스타일에 가깝다. 주인공들이 영어를 쓰는 점도 특징이다. ‘세 얼간이’는 마살라 영화지만 마살라 영화다운 요소를 상당 부분 덜어냈다. 원래 상영시간 171분에서 30분 가까이 잘라낸 ‘코리안 버전’으로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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