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머니볼> - 선수가 아닌 승리를 사다

영화 ‘머니볼(Moneyball)’은 미국 메이저리그판 ‘다윗과 골리앗’ 얘기다.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프로 스포츠에서 부자 구단과 가난한 구단의 차이, 즉 빈부 격차는 곧 성적으로 이어진다. 선수 전체 연봉 1억1400만 달러의 부자 야구단과 4000만 달러의 가난한 야구단이 대결한다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그렇다면 가난한 구단은 구단이 문 닫을 때까지 마냥 꼴찌만 해야 할까. ‘꼴찌의 악순환’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이야기는 한 남자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남자의 이름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그는 부자 구단에 재능있는 선수를 빼앗기는 통에 만날 하위에 머무르고 있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이다. 빌리는 변화를 가져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가 내세운 이론은 이름하여 머니볼. 1977년 빌 제임스가 만든 세이버매트릭스(sabermetrics) 이론이 원조다. 출루율·장타율 등 통계학과 수학을 야구에 적용한다. 감(感) 말고 과학에 의거해 선수를 고르자는 거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선수들을 모아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재기용하자는 거다. ‘스포츠는 과학’이라는 구호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현장은 비(非)과학적 요소가 다분하다. “걔는 안돼. 여자친구가 못생겼어. 그건 자신감이 없단 뜻이지.” 빌리는 맞선다. “진흙 속 진주를 찾읍시다.” 오른팔도 데려온다. 예일대 경제학과를 나온 피터(요나 힐)다. 피터는 조언한다. “선수를 사지 말고, 승리를 사세요.”
머니볼 이론과 참모 피터의 충고,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스스로의 위기감을 종합해 빌리는 선수진을 재구성한다. 팔꿈치 신경이 영구손상됐어도, 사생활이 깔끔하지 못해도 출루율이 높으면 데려왔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였다. 결과는 드라마틱했다. 애슬레틱스는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가난한 구단의 서바이벌 전략은 부자 구단이 따라하고 싶어하는 ‘조직 리엔지니어링 비법’으로 통하기 시작한다. 빌리가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거액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 대목은 이런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빌리는 스카우트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
과정의 중요성 강조이쯤 되면 눈치챘을 거다. 머니볼은 시합 장면을 클라이맥스에 배치해 산봉우리로 줄달음치는 스포츠영화의 전형을 비껴간다.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컨벤션이 자아내는 극적 쾌감이 아니다. 머니볼은 더 큰 그림을 보여준다. 리더십의 한 모델을 제시하는 게 대표적이다. 빌리는 따르고 싶은 리더다. 조직 혁신을 원하는 건 여느 지도자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 남자의 개혁은 반(反)인본주의적이거나 마구잡이식이 아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는 “야구는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재능없다고 스스로 낙담한 사람들을 일으켜세우는 것, 그래서 조직원 하나하나에게 존재의 이유를 찾아주는 것, 그 ‘과정의 총합’이 성취를 이끌어낸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찌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How can you not get romantic about baseball)”라는 이 ‘야구 CEO’의 고백은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가 ‘야구계의 스티브 잡스’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남다른 시각에서 조직혁신을 이끌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빌리가 내면의 성공을 거두는 설정을 더한다. 빌리의 ‘저비용 고효율’ 전략은 잘나가는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주로부터 연봉 1250만 달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가 진짜 거둔 성공은 따로 있다. 빌리는 원래 청소년 시절 촉망받는 인재였다. 스탠포드대 4년 장학금과 뉴욕 메츠 입단을 사이에 놓고 갈등하던 그는 프로구단 입단을 택한다. 하지만 곧 자신의 재능이 선수생활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좌절하고 방황한다. 애슬레틱스의 오합지졸들을 규합하면서 그는 과거의 상처와 재회한다. 자신처럼 잘못 평가된, 혹은 저평가돼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리라는 확신이 머니볼 이론을 적용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상처는 제2의, 제3의 빌리 빈을 낳지 않는데 밑거름으로 쓰인 것이다. 이것이 빌리가 거둔 또하나의 성취다.
흥미로운 사실은 빌리가 이런 내면의 승리를 거두고도 머뭇거린다는 사실이다. 외형적 성공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놓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실 얼마나 많은가. 영화의 종반 10여 분은 이런 점을 지적하는 특별한 순간이다. 피터가 홈런을 치고도 친 줄을 몰라 어쩔 줄 모르는 한 2군 선수의 비디오를 빌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빌리의 딸이 ‘더 쇼(The Show)’라는 노래 가사를 통해 귀엽게 핀잔을 주는 대목은 또 어떤가. “아빠, 그냥 쇼를 즐겨요.”
2003년 발표된 논픽션 베스트셀러 『머니볼』을 쓴 마이클 루이스는 영화화 소식에 “이렇다할 이야기의 큰 흐름이 없는데 어떻게 만들까”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 의문은 두 명의 각본가 덕분에 기우로 입증됐다. ‘소셜 네트워크’의 애런 소킨, ‘쉰들러 리스트’의 스티븐 자일리언이 그들이다. 애런 소킨은 NBC 드라마 ‘웨스트윙’으로 스타덤에 올라 지난해 소셜 네트워크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던 인물. 이들은 적재적소에 배치한 에피소드와 대사로 이 영화를 수작의 대열에 올려놨다. 특히 11대 0에서 11대11로 바뀌는 시합 장면은 야구 문외한이 봐도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연출은 논픽션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의 삶을 그린 ‘카포티’(2006)로 두각을 나타낸 베넷 밀러 감독. 카포티의 주연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이 빌리의 개혁을 못마땅해 훼방놓는 노장 감독으로 출연하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 홍보를 위해 내한했던 주연 브래드 피트는 이 작품으로 내년 초 열리는 제8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생애 첫 남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되고 있다. 2년 전 나이를 먹을 수록 젊어지는 남자를 연기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로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내한 기자회견에서 “상을 받는다면 기쁘긴 하겠지만 상은 작품에 얹어진 덤 같은 것이다. 내겐 10년 후, 20년 후에도 남을 만한 이야기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라며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영화 제작에 예술영화 출연까지‘가을의 전설’(1994)에서 긴 머리의 남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며 등장했던 그는 40대 중반에 접어들며 할리우드 대표 미남 배우의 전형과는 다른 독특한 행보로 관심을 끌고 있다. 몇 년 전 차린 제작사 ‘플랜B’를 통해 머니볼 공동제작 등 제작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으며,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가는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제64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트리 오브 라이프’에 출연한 게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난해하기로 이름난 미국의 거장 테렌스 맬릭의 작품으로, 피트는 투자까지 겸했다.
그는 내한 기자회견에서 극과 극의 작품을 오가는 이유에 대해 묻자 “전혀 다른 종류의 작품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선택했다”고 답했다.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과 일하는 게 즐겁다. 상대방이 어떤 학교를 나왔느냐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다양함 속에 신선함과 흥미로움이 존재한다. 그럴 때 내가 할리우드의 한 부속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편당 출연료가 3000만 달러에 육박하는 톱스타가 나이들면서 현명해지는 걸 지켜보는 느낌은 특별하다. 가장 할리우드적인 소재일 법한 머니볼에서 성공과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만들어주는 의외의 미덕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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