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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E PEOPLE]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 - 내 점수를 모독하지 마라

[WINE PEOPLE]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 - 내 점수를 모독하지 마라


그의 코는 100만 달러짜리 보험에 들어있다. 그의 혀에 전 세계 와인 업계가 휘둘린다. 숭배와 질시를 동시에 받는 와인 평론계의 살아있는 전설, 로버트 파커다. 사진 전민규 기자, 삼성카드 제공

지난 11월 18일 포브스코리아는 국내 최초로 로버트 파커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2008년 이후 매년 한국을 찾지만 기자 간담회와 이메일 인터뷰만 했을 뿐 대면 인터뷰는 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신라호텔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취재진이 몰려있었다. 미리 준비된 인터뷰 룸에 들어갔다.

와인 업계 거물인 그는 140kg은 돼 보이는 거구에 수수한 미국 시골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진 탓에 일어나지 못하고, 앉은 채로 기자와 첫인사를 나눴다. 날카로운 지성을 뽐내며 현란한 말솜씨로 무장할 것 같았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말은 느리고 조심스러웠으며 조금 어눌했다. 하지만 와인 천재다운 면모는 느린 대답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많은 이들이 로버트 파커하면 ‘파커 포인트’를 떠올립니다. 이 점수가 와인 가격을 좌우하는 ‘살생부’라고도 불리는데, 어떻게 매겨지나요.

“1978년부터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지금 미국 사람들 대부분이 이 점수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파커 포인트의 가장 독특한 점은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인데요. 와인 색 5점, 향기 15점, 맛 20점, 그리고 여운·밸런스·숙성의 잠재력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 점수 10점을 합해 이뤄집니다.”

파커 포인트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보통 100점 만점 체계면 1점부터 시작을 하는데 제 점수는 50점부터 출발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왜 50점부터 시작하지?’ 묻더군요. 문화적 차이죠. 지금 이 시스템은 대학에서도 교육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고 효과적이며 커뮤니케이션 하기 좋기 때문에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받아들이기 쉽죠. 소비자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돼있는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파커 포인트는 와인에 점수를 매긴 것이다. 90~95점은 뛰어남(Outstanding), 80~89점은 매우 좋음(Very Good), 75~79점은 보통 이상(Above Average)으로 평가된다. 그의 점수는 와인 업계를 쥐락펴락한다. 와인업자들에 의하면 소비자들은 90점 이상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90점 이상 받은 와인은 비싸게 팔리고, 80점 이하는 어떤 가격으로 내놔도 잘 팔리지 않는다. 영국 와인 도매상 빌 블래치는 『와인의 황제, 로버트 파커』라는 책에서 “파커 점수 85점과 95점의 차이는 해당 와인 매출로 볼 때 100억원 정도 차이가 난다”며 “100점 만점을 받았다면 기존 가격의 4배 이상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파커가 90점 이상을 주면 명품 와인이 되고, 100점 만점이면 전설의 와인에 등극한다. 일례로 소량 생산되는 ‘샤토 르팽(Le Pin)’은 파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순식간에 동이 났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로마네 콩티와 맞먹는 가격에 팔린다.

이번 디너에는 파커 포인트 100점의 샤토 무통 로칠드 86년산과 94점의 샤토 라투르 94년산이 등장했는데요. 높은 점수 때문에 중국인들의 사재기가 심각해진 걸 아시나요.

“얼마 전 홍콩에서 샤토 라투르 오너를 만나 50여가지 와인을 맛봤는데요. 한 백만장자 중국인이 와서는 1909년산 와인을 망설임 없이 사가더군요. 중국 거부들이 샤토 라투르 컬렉팅에 나섰다는 소문을 실감했습니다. 실제로 이 와인들은 전 세계 10% 안에 들어야 이 와인들을 시음할 수 있습니다. 50~100년까지 장기숙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최고급 와인들은 오래된 빈티지 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죠.”

파커 포인트는 유럽 명품 와인의 가격을 더욱 높여놨지만 신대륙에 숨겨진 와인들도 많이 발굴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와인을 찾아내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특히 역사가 짧은 와이너리나 젊은 와인메이커가 만든 와인들은 충분히 훌륭함에도 홍보가 잘 안돼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내 일입니다. 제가 와인에 입문했을 당시엔 보르도, 버건디, 샴페인 같은 와인들이 마켓을 지배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간 새로운 와인을 찾아내는 프로그램을 통해 소비자들이 칠레나 아르헨티나, 호주, 그리고 스페인 등 신대륙 와인도 즐길 수 있게 돼 너무 기쁩니다. 소비자들이 다양한 와인을 맛보는 것 자체가 혜택을 누리는 거죠.”

요즘 한국에서는 최고급과 신대륙 와인 대결이 벌어집니다. 당신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방식을 본 딴 것이죠. ‘파리의 심판’식으로 홍보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국에서도 많이 합니다. 주로 캘리포니아 와인이나 남미 와인들과 유럽 와인들을 두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고급으로 알려진 와인들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남미 와인들과 경쟁 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죠. 보르도 와인을 좋아하는 내 친구들도 아까 말씀 드린 호주 와인을 맛보고는 ‘와 이것도 좋다!’고 말합니다. 가격이 굉장히 저렴하기 때문에 더 좋죠. 물론 결정은 각자의 취향에 따르는 겁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좋아하지 않지요.”

높은 인기만큼이나 비난도 많이 받으시죠. ‘샤토 파비’ 사건도 있었고, ‘파키(parky)’ ‘파커라이즈(parkerize)’ 등 ‘입맛에 맞는 특정 스타일의 와인만 선호해 와인을 획일화한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비판은 존재합니다. 특히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져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면 비판을 받기 마련이죠. 저는 초기에 경험이 없고 순진하고 준비가 안돼 있을 때부터 비판을 받았죠. 시간이 갈수록 비판은 점점 더 커졌고 발전할수록 더 심해졌지만,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며 내 직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 반감을 가진 프랑스 와인 메이커들은 당신을 ‘R’이라 부르며 강도 높게 비난하던데요.

“1978년에 이 일을 시작해서 ‘와인 애드버킷’을 만들었는데 정말 혁명적인 잡지였습니다. 독립적인 잡지였기 때문에 광고도, 선물도, 뒤로 들어오는 것도 없고 와이너리에서 받는 호의도 없었죠. 당시 와인 업계에선 홍보에 돈을 많이 쓰면 좋은 쪽으로 기사가 나오는 걸 당연하게 여겼어요. 독립은 또 다른 적을 불렀죠. 자기들이 원하는 걸 써주지 않으니까요. 비난 세력들은 ‘파커라이즈(parkerize)’라는 단어로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 리치(풍부한 맛)하고 알코올 농도가 높고 오키(오크향이 진한)하며 깊은 맛이 있는 것으로 한정돼 있다고 치부하죠.

무지에서 온 선입견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 사람들은 내가 감상한 모든 와인들을 놓고 이야기하지 않고 너무 간단하게 일반화, 단순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생산자들은 최고의 와인을 만든다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맛이 좋다고 해서 나 한 사람을 위해 전체를 바꾸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비난 현상은 변하지 않을 거 같아요.”

예민한 질문에 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한국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 마흔에 입양한 딸 마이어의 몸에 한국인 피가 흐른다. 그는 딸이 태어난 한국에 대해 감정이 남다르다. 건강상 이유로 장거리 여행을 피하지만 한국엔 딸과 함께 정기적으로 온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딸 마이어 씨가 당신처럼 와인 관련 일을 하길 원하나요.

“3개월에 입양한 딸이 벌써 24살이 됐어요. 딸 생일에 맞춰 정성스럽게 와인 컬렉션을 해왔는데 정작 딸은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가 하는 일이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다행이 딸이 샴페인은 좋아해요.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딸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데킬라죠(웃음).”

주요 와인 산지인 칠레에도 방문한 적이 없을 만큼 장거리 여행을 꺼리는데, 한국에는 꾸준히 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은 잠재력이 높은 나라입니다. 좋은 와인을 개발할 수 있는 요건을 많이 지녔죠. 특히 산지가 발달했기 때문에 양질의 포도를 키울 수 있습니다. 최근 프랑스 최대 갑부인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사들인 중국 땅이 한국 땅과 다르지 않아요. 항상 가능성은 있으며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한국 CEO들이 즐길 수 있는 와인을 추천해주신다면….

“창의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샴페인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선 퀄리티가 좋고 생일이나 결혼, 승진 등에서 축하하기에 적절한 와인이죠. ‘돔페리뇽 샴페인’과 ‘루이 뢰데러 크리스탈’을 추천합니다. 돔페리뇽은 히스토리가 있는 샴페인이에요. 예전에 눈이 먼 수도승이 있었는데 1640년에 처음으로 와인 안의 거품을 발견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따 와인을 만들었죠. 470년 전 일이지만 샴페인 한잔 하며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에요. 올해나 내년 초에 마시기 좋은 올드 빈티지는 스페인산으로는 1994년·95년이며 지난 20년간 이 두 빈티지가 최고였어요. 이탈리아는 1990년·96년산, 프랑스 보르도는 1982·1990·2000·2005년산 와인에 주목하세요.”

세계 최고 와인 평론가의 삶은 어떤가요.

“저는 참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와인 평론가로 성공했기 때문에 얻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죠. 하지만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해줄까요.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낙농업자의 외아들이었죠. 우리 가문에 대학간 사람이 제가 처음이라 한마디로 저는 ‘가문의 영광’이었어요. 게다가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니 부모님이 크게 기뻐하셨죠. 그러다 갑자기 와인과 사랑에 빠졌어요. ‘변호사를 그만두고 와인 일을 한다고 부모님께 어떻게 이야기하지?’ 걱정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이셨습니다(웃음).”

코가 현재 100만 달러(한화로 11억 원)짜리 보험에 가입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와인 시음은 코가 95%를 차지합니다. 아버지가 굉장히 좋은 후각을 가지고 계셨죠. 기본기는 유전 받았다고 여기지만 80~90% 정도는 트레이닝에 따른 것입니다. 어떤 맛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했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최근 새로운 직원을 몇 명 고용하려고 시도 중입니다. 좋은 미각을 가진 사람, 독립적인 사람, 젊은 사람들을 쓰고 싶어요. 은퇴할 생각은 아직 없지만 ‘위대한 유산’을 남기고 싶습니다. 건강한 동안은 계속 일하고 싶어요. 후각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평론가의 길을 가겠습니다. 와인 평론가가 좋은 것은 항상 학생의 자세로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모든 것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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