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IN ANALOGUE] 김영락 세계자동차 제주박물관 회장
- [CEO IN ANALOGUE] 김영락 세계자동차 제주박물관 회장

세계 최초의 자동차 벤츠 파텐트(1886), 전세계에 여섯 대밖에 없는 힐만 스트레이트8(1929), 마릴린 먼로에게 사랑 받은 캐딜락 엘도라도(1959), 영국 에드워드 8세가 탄 롤스로이스 바커 세단(1934), 그리고 한국 최초의 택시인 시발택시(1955)까지. 2008년에 개관한 서귀포시 안덕면 세계자동차 제주박물관은 시대와 국적, 제조회사를 망라한 세계의 명차 94대를 전시하고 있다. 2월13일 클래식카 수집가인 김영락(70) 세계자동차 제주박물관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작은 체구에 바지런한 인상을 풍겼다. 30년 동안 화학회사를 경영한 그는 원래 자동차에 관심이 없었다. 처음 자동차박물관을 설립하겠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물론 늘 김 회장을 응원하던 부인조차 ‘미친 짓’이라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세계의 명차를 무슨 수로 모으냐는 것이다. 돈도 문제였다. 클래식카는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이 넘는다.
‘사건’의 발단은 회사를 벨기에 UBC사에 매각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학회사를 경영하려면 글로벌 감각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국제 흐름에 어두워지는 것 같아 회사를 처분했어요.”
김 회장은 은퇴 후 부인과 여행을 다녔다.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두 달까지 한 나라에 머물렀다. 그는 “관광 차 들른 미국 워싱턴의 비행기박물관에서 제2의 인생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워싱턴 비행기박물관에서 영감 얻어
“깜짝 놀랐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만든 나무 비행기부터 우주 위성까지 비행기의 역사를 한곳에서 볼 수 있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메모하는 모습이었죠. 저 아이들이 20, 30년 후에 얼마나 무서운 세상을 만들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김 회장은 여행을 가기 전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학교재단을 인수하려고 했다. 장고 끝에 포기했지만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전화기가 동네에 한대씩 있었습니다. 요즘은 국민의 절반이 스마트폰을 들고다니죠. 그게 다 선진국에서 온 기술 아닙니까. 어릴 때부터 역사·문화를 접하니 꿈이 다르구나 싶었어요. 순간 ‘박물관을 짓자’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비행기박물관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자동차였다. “자동차는 단순히 탈것을 넘어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어요. 한국이 자동차 생산대국이기도 하고요.” 그때부터 세계의 자동차 박물관을 찾아 다녔다. “30곳은 간 것 같아요. 비행기를 한 달에 18번 탄 적도 있었죠. 차츰 어떤 차를 전시해야 할지 감이 오더군요.”
김 회장은 기술이나 디자인이 좀 쳐져도 오리지널 모델을 수집하고자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모셔온’ 차가 영국 대표 브랜드 오스틴사의 인기 모델 ‘세븐’이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오스틴 세븐을 수소문했다.

“당연히 콧방귀를 뀌죠. 그런데 한 친구가 자기 친구의 외사촌이 이민을 가 자동차 회사에 다닌다고 들었다는 겁니다. 물어 물어 롤스로이스 공장에서 일하다 은퇴하고 호주에 산다는 제 친구의 친구의 외사촌 동생 주소를 알아냈어요.”
김 회장은 곧바로 비행기를 탔다. 롤스로이스 AS센터 자문을 하던 그를 만나고 돌아온 지 몇 달 후 “뉴질랜드에 한 대, 파리에 한 대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김 회장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10년 동안 클래식카와 함께 사연도 쌓여갔다. 김 회장은 ‘내시 앰배서더’ 앞에서는 늘 숙연해진다. “뉴질랜드 크라이처지에 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갔어요. 차 주인이 여든일곱의 노인이었는데 명함에 적힌 한글을 보더니 제 손을 덥석 잡는 겁니다. 그리고선 방에서 뭘 한참 찾아요. 알고 보니 한국전쟁 때 백령도에서 근무한 참전용사였던 거죠. 대한민국 훈장을 보여주면서 저를 친정 동생 보듯 반가워했어요.”
보통 차를 살 때는 파는 쪽에서 가격을 정하고 흥정을 잘 하지 않는다. “계약서를 보더니 그 자리에서 2만 달러를 깎더군요. 무상기증 해야 옳지만 주변을 정리하고 있어 그냥 주기는 어렵다며 무척 미안해 했습니다.”
다음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던 김 회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날 만난 참전용사다. 클래식카를 가진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만난 그는 김 회장에게 기념품으로 간직해 온 50년대 천환 지폐를 건넸다. “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도 허탕치는 일이 허다한데 생각지 않게 두 대를 구했으니 참 고마웠어요.” 김 회장은 자동차 박물관 개관식에 그를 초대했지만 거동이 불편해 오지 못했다.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듣고 금고에 넣어둔 천환 짜리 지폐를 어루만졌다고 한다.
차가 한 대 두 대 모이자 더는 일반 주차장에 보관하기 어려웠다. 공간과 예산, 유동인구를 고려해 박물관 부지로 낙점한 곳이 바로 제주도다. 김 회장은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사업을 했다. 규모가 커지자 경북 구미산업단지로 이전했다. 제주에는 연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세운 세계자동차박물관은 제주의 많은 박물관 중에서도 명소가 됐다. 삼성그룹 교통박물관 관계자가 찾아와 곳곳을 촬영해 가기도 했다.
김 회장은 재미있고 쉽게 자동차의 역사·문화를 전하려 노력했다. “차를 자유롭게 촬영함은 물론 타는 아이들도 있어요. 직원들이 너무 내버려 둔다고 저를 나무랄 정도죠.” 금속으로 된 차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처음 차를 들여오면 개보수 하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린다. 김 회장은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박물관 안에 정비소를 두고 꼼꼼하게 관리한다고 말했다.
또 차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체험하면서 교통문화를 배울 수 있게 했다. 김 회장이 특히 아끼는 공간이 어린이 교통체험관이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보호자와 함께 전기 자동차를 10분 가량 운전할 수 있다. 실제 도로를 축소해 놓은 듯한 체험관에는 신호등, 주유소, 세차장 등이 있다. 체험이 끝나면 간단한 시험을 치러 어린이 면허증을 발급해 준다. 5대였던 전기 자동차를 17대까지 늘렸지만 요즘도 주말이면 길게 줄을 선다.
지난해 5월 영국 국립자동차박물관에서 열린 올드카 페스티발에 다녀오고 나서는 체험장을 업그레이드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중국 등 7개국을 상징하는 건축물 앞을 지나면 해당 나라 언어로 소개가 나온다. 세계의 문화와 언어, 자동차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정신 순화하고 재충전하는 문화공간
차체를 절단해 단면을 볼 수 있게 전시한 것 역시 김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한국에서는 차에 조금만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정비소에 맡기죠. 유럽에 차를 구하러 가보면 차고가 작은 정비소 같아요. 국민 소득 3만~4만 달러인 나라에서 차가 고장 나면 부품을 사다 고칩니다. 아끼는 차를 직접 고쳐서 ‘붕’ 하며 나가는 걸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그런 것을 즐기며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겁니다.”
김 회장은 “세계자동차박물관은 정신을 순화하고 지나간 역사를 배우는 문화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박물관 효과’를 확인했다고 했다. 부산 초량초등학교에서 온 한 학생은 방명록에 ‘말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남겼다. 강릉에서 온 치과의사 부부는 아이에게 보여 주겠다며 맨바닥에 주저앉아 클래식 카를 스케치했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직접 차 바퀴와 엔진을 만져보고 사진을 찍었다.
김 회장의 수집은 현재진행형이다. 인터뷰를 한 날도 부산항에 1959년산 폰티악이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요즘은 비행기 타는 게 힘들지만 올 8월에 미국 패블 비치에서 열리는 올드카 페스티벌에는 꼭 참석할 생각”이라며 의지를 보였다. 그는 세 대의 차를 탄다. 벤츠·롤스로이스·벤틀리다. 모두 제작한 지 10~20년 된 올드카다. “대나무는 중간에 마디를 만들면서 다시 줄기를 뻗잖아요. 사업하면서 세상에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때 새 길을 만났습니다. 제가 타던 차 역시 박물관에서 아이들과 영원히 함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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