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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자본주의식 개혁하나 - 서방세계 익숙하지만 아버지 체제 답습

북한 김정은 자본주의식 개혁하나 - 서방세계 익숙하지만 아버지 체제 답습

숨가쁜 일정으로 진행된 북한의 4월 행사가 모두 끝났다. 김일성의 100회 생일인 15일을 계기로 북한은 촘촘한 정치 일정을 치렀다. 11일에는 김정일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은이 노동당의 실권을 차지하는 절차인 4차 당대표자회가 열렸다. 13일에는 우리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돼 김정은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같은 날 오전 쏘아 올린 장거리 미사일(북한은 실용위성을 쏘아 올리는 로켓 은하3호로 주장)은 발사 직후 공중 폭발하는 돌발상황도 벌어졌다. 14일에는 김일성경기장에서 생일 축하 중앙보고대회가 열렸다. 이어 15일에는 군 퍼레이드를 비롯한 김일성 생일과 관련한 다양한 행사가 평양과 지방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평양 대동강변에서는 엄청난 달러를 쏟아 부은 불꽃놀이인 ‘축포야회’가 화려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제1비서, 제1위원장에 올라이런 빡빡한 일정은 외형상 김일성과 김정일을 추모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김정은의 후계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초점이 맞춰진 이벤트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2010년 9월 치러진 3차 노동당 대표자회가 김정은의 후계자 추대를 위해 아버지 김정일이 마련해 준 데뷔무대였다. 이번에는 김정은 스스로 차린 대관식이었다. 김정은은 아버지이자 ‘선대(先代) 수령’인 김정일에 대한 자신의 충성과 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동당 총비서와 국방위원장 자리를 그대로 김정일 몫으로 남겼다. 김정일을 ‘영원한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하고 자신은 ‘제1비서’에 오르는 방식이다. 국방위원장도 ‘제1위원장’을 만들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마치 훌륭한 공적을 남긴 축구, 농구 선수의 등번호를 영구결번 시킴으로써 그의 업적을 오랫동안 기리도록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는 김정은의 독창적인 결정은 아니다. 김정일이 이미 김일성을 ‘영원한 국가주석’으로 추대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1비서라는 직책은 구 소련이나 쿠바, 우크라이나 등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은 관영매체를 총동원해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선전선동을 연일 쏟아내고 있지만 실은 익숙한 레퍼터리로 구성한 깜짝쇼였던 것이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는 얘기다. 한국의 4·11 총선 일정과 겹쳐 치러진 북한의 정치행사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또 미사일 공중폭발은 김정은의 스타일을 구겨지게 했고 당대표자회와 김일성 생일 의미를 퇴색 시키는듯한 느낌도 줬다.

대북부처 당국자와 북한 전문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이 같은 이벤트가 아니라 김정은의 입이었다. 당(黨)국가이자 선군(先軍)정치 체제인 북한에서 노동당 1비서와 국방위 1위원장, 최고사령관이란 3대 직위를 거머쥠으로써 최고권력자에 공식 등극한 때문이다. 후계수업을 받던 때는 물론이고 공개석상에 등장한 이후에도 김정은은 베일에 싸여있었다. 어린 시절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유학하던 모습을 제외하고는 청년기 이후 김정은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전격적으로 이뤄진 김정은의 육성연설은 예상을 깬 것이었다. 김정일의 경우 1992년 4월 군 창건 기념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고 한 게 전부였다. 15일 김일성 생일 100돌 기념 열병식 도중 사회자가 “김정은 동지께서 연설 하시겠습니다”라고 소개하자 위성으로 북한 조선중앙TV를 시청하던 서울의 대북 관측통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20분 간의 첫 연설은 김정은이 아직 젊은 청년대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북한 선전매체들은 그를 “노숙하고 세련된 영도자”로 찬양했지만 실은 준비가 덜 된 지도자임이 드러난 것이다.

김일성광장을 가득 메운 주민과 군인, 외국 초청인사까지 참석한 행사에 나온 김정은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입술은 말라있었고 턱선과 목젖이 떨리는 모습이 TV 중계화면에 드러났다. 나지막하고 단조로운 톤으로 긴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동안 군부대 등을 현지지도 한 소식을 육성 없이 전하는 방식으로 구축한 카리스마는 편집과 해설을 가미해 잘 각색됐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어설픈 공개연설임에도 그 내용은 면밀히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김정은 체제의 정책방향이 담겨있다는 점에서다. 연설문의 앞 대목은 축하인사와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찬양에 할애됐다. 김일성광장에 도열한 군부대와 무장장비를 응시하며 “군사 기술적 우세는 더는 제국주의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며 적들이 원자탄으로 우리를 위협공갈 하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고 김정은은 말했다. 북한이 주장해온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의식한 언급이다.

이목을 집중시킨 건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경제 문제에 대한 발언이다. 김정은은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 200만~300만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고난의 행군과 같은 재앙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이런 언급은 “인민들을 기와집에 살게 하고 비단옷을 입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하겠다”던 김일성의 생전 공언을 연상케 한다. 김정은은 ‘새 세기 산업혁명’이란 표현도 썼다. 사회주의 강성국가를 이루기 위해 일심단결과 불패의 군력(軍力)에 새 세기 산업혁명을 더하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경제문제와 관련해 김정은은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은 채 연설을 마쳤다.



식량난 해결 최우선 과제로 꼽아김정은의 경제구상을 보다 상세하게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나흘 뒤 만들어졌다. 4월 19일자 노동신문이 김정은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간부)들과 담화한 내용을 전면에 걸쳐 소개한 것이다. 4월 6일 이뤄진 담화에서 김정은은 김정일을 총비서로 추대한 건 “당 건설과 당 활동을 장군님(김정일)의 사상과 의도대로 해나간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책 노선의 변경 없이 이른바 유훈(遺訓)통치를 해나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경제 문제를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촉구한 데서도 이런 분위기는 엿볼 수 있다. 김정은은 민생문제에 대한 고민도 드러냈다. 그는 “현 시기 인민생활 문제를 풀고 나라의 경제를 추켜세우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나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문제를 원만히 해결해야 한다”며 식량난 해결을 제일 먼저 꼽았다. 또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인민들에 대한 식량공급을 정상화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내각에 힘을 실어주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주목된다. 노동당 핵심 간부들과의 이 담화에서 그는 “경제 사업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각의 통일적인 지휘에 따라 풀어나가는 규율과 질서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내각은 나라 경제를 책임진 경제사령부”라거나 “당의 경제정책 관철을 위한 내각의 결정, 지시를 어김없이 집행하라”고 촉구했다. “내각 책임제, 내각 중심제를 강화하는 데 지장을 주는 현상들과 투쟁을 벌이라”는 대목에서는 이를 어기면 엄중한 처벌이 따를 것이란 분위기도 감지된다.

경제 문제와 관련한 김정은의 언급을 분석해보면 그가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진단하고 있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제는 내가 최고사령관이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직접 이 문제를 챙기겠다는 리더십은 없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마치 매년 1월1일자 노동신문 신년 공동사설에서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백화점식 처방을 내놓는 것과 차이가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화폐개혁, 150일 전투 모두 실패김정은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경제난 해결에 대한 자신감 결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후계자로 내정된 시기인 2009년 11월 화폐개혁을 시행했다. 자본주의식 상행위로 막대한 돈을 거머쥔 ‘돈주’라는 신흥 자본가 그룹을 겨냥한 조치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고,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희생양으로 지목돼 공개 총살되는 쪽으로 겨우 수습이 됐다.

앞서 2009년 4월에는 생산증대 운동인 150일 전투가 시작됐다. 화폐개혁과 150일 전투 모두 성공했다면 경제난 해결을 위한 후계자의 공적으로 남을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용두사미가 됐다. 김정은은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경제 문제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을 것이란 게 정부당국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정일의 경우 1974년 2월 노동당 5기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내정된 후 70일 전투를 주도적으로 벌였고 이듬해 2월 그 성과를 인정받아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김정은이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을 포함한 경제 개혁의 논의를 강조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주목을 받았다. 마이니치신문은 4월 16일자 기사에서 “김정은 제1비서가 지난 1월 조선노동당 간부들에게 북한 최대의 터부 가운데 하나인 자본주의적 방식의 도입을 포함한 경제 개혁 논의를 촉구했다”고 전했다.



김일성·김정일 노선 답습할 듯이 신문이 입수한 김정은의 1월 28일자 발언록에 따르면 그는 “경제 분야의 일꾼과 경제학자가 경제관리를 ‘이런 방법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도 색안경을 낀 사람들에 의해 ‘자본주의적 방법을 도입하려 한다’고 비판을 받기 때문에 경제관리에 관한 방법론에 의견을 갖고 있어도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 “공장과 기업이 충분히 가동되지 않아 인민 생필품의 생산이 보장되지 않으면서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는 얘기다.

이런 보도와 맞물려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곧 개혁개방과 관련한 조치를 취할 것이란 기대도 있다. 그가 어린 시절 유럽지역에서 유학을 했고 아무래도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도 적을 것이란 측면에서다. 하지만 당 대표자회를 비롯한 일련의 행사에서 드러난 김정은의 향후 통치플랜은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새로운 노선이나 개혁개방을 모색하기보다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만들어 놓은 주체와 선군정치라는 레일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경제 문제는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갈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읽힌다.

이런 상황에서 민심의 향배가 어떻게 될지는 향후 김정은 체제의 운명을 가를 수 있다. 화려한 축제를 마친 북한 주민들은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2012년을 ‘강성대국 진입의 문을 여는 해’로 만들겠다던 공약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죽은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그 후계자인 김정은 3대(代)를 위해 찬양잔치를 벌였지만 결국 남은 건 허탈함뿐이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공중폭발 한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는 입소문이 퍼진다면 주민들의 불만은 증폭될 수 있다.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8억5000만 달러를 들였다. 또 불꽃놀이에 1760만 달러, 김일성·김정일 동상건립 등에 3860만 달러 등 4월 중순 이뤄진 80여건의 행사에 3억4000만 달러가 든 것으로 우리 정부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미사일 비용을 빼고도 중국산 옥수수 100만t을 구입할 수 있는 액수다.

‘혁명의 수도’라며 화려하게 리모델링 한 평양과 달리 지방은 경제가 만신창이 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주민들 사이에서 “김정은 체제는 평양만을 위한 공화국”이란 볼멘 소리가 나온다는 애기다. 노동당과 군부 권력층을 등에 업은 세력이 시장을 통해 부유층으로 등장하고, 균빈(均貧)의식이 무너지면서 공동체 의식은 무너졌다. 여기에 올 여름 수해나 자연재해가 겹치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다. 이미 북한의 도발 행위에 싸늘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중국의 지도부가 추가 핵실험 등 반발이 이어질 경우 등을 돌릴 수 있다. 올 하반기가 김정은 체제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김정은은 김일성광장에서의 첫 공개 연설을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로 끝맺었다. 그가 생각하는 ‘최후의 승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부도위기에 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속인으로서 어떤 생존전략을 구사할지 김정은의 발걸음을 주목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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