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규’의 도시 오슬로
에드바르트 뭉크의 유명한 그림‘절규(Scream)’는 오슬로의 숲이 우거진 언덕 길에서 바라다 보이는 일몰 광경(sunset view)을 배경으로 했다. “하늘이 핏빛으로 변하면서 사방에서 이상하고 커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뭉크는 말했다.
그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에케베르크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슬로피요르드의 풍경은 그림 속 배경과 흡사하다. “이 배경은 뭉크의 다른 그림들에도 나타난다.” 최근 어느날 저녁 에케베르크의 테라스에서 뉴스위크와 인터뷰를 가진 오슬로 뭉크 미술관의 관©munch museum‘절규’의 도시 오슬로 Edvard Munch’s Oslo뭉크의 작품에는 고향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장 스테인 올라프 헨릭센의 말이다.
뭉크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된 풍경을 그렸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이전에 느꼈던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보았던 것(not what I see but what I saw)”을 그린다고 말했다. 뭉크는 늘 자신의 심리를 분석하면서(An anatomist of his psyche) 개인적 경험에서 주제를 찾았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는 “인간 영혼의 보편적인 요소를 분석하는 것(to dissect what is universal in the soul)”이라고 주장했다.뭉크는 30세가 되던 1893년 ‘절규’ 연작중 첫 번째 작품을 그렸고 80세까지 살았다. 지난 5월에는 ‘절규’ 연작 중 한 점이 소더비 경매에서 1억2000만 달러에 팔려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현재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는 20세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The Modern Eye) 전’(10월 14일까지)이 열린다. 또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오는 9월 23일까지 뭉크의 그래픽아트 전시회가 열린다. 한편 오슬로시는 내년에 뭉크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최근의 이런 움직임은 뭉크에 대한 재평가를 가속화시켰다.
이제 그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침울한 분위기에 물든 상징주의 화가(a symbolist steeped in Scandinavian gloom)’라는 오래된 이미지를 벗고 ‘현대주의의 화신(an avatar of modernism)’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고향 크리스티아니아(1925년부터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명칭인 오슬로로 불렸다)를 생각하는 뭉크의 마음은 두 갈래(ambivalent)였다. 태어난 곳은 오슬로 북쪽의 로텐이었지만 갓난아기였던 1864년 온 가족이 오슬로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가가 된 뒤 작품이 팔리기 시작한 40세 무렵까지도 “미완성의 서투른 그림(unfinished daubs)”을 그린다는 혹평(vitriol)을 견뎌야 했다. 노르웨이의 유수일간지 아프텐포스텐은 뭉크의 작품을 “정신병자의 환각(hallucinations of a sick mind)”
이라고 비난했다. 뭉크의 누이 라우라가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앓았기 때문에 그에겐 특히 가슴 아픈 조롱(a lacerating gibe)이었다.뭉크는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살다가 오슬로피요르드 근처의 소박한 스튜디오에 정착했다. 1908년 코펜하겐의 한 정신병원에서 신경쇠약증(breakdown) 치료를 받던 때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까지 병들게 한 오슬로를 “적들의 도시(town of enemies)”라고 원망했다.
하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뭉크는 자신의 작품 전부를 오슬로시에 유산으로 남겼다(bequeathed).1940년 독일군의 침공으로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간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작품을 지키려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1963년 오슬로 동부 토옌의 한 현대식 저층 건물에 뭉크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2004년 복면 쓴 무장강도(masked gunmen)에게 그림 두 점(‘절규’와 ‘마돈나’)이 도난당한 뒤(도난품을 되찾는 데 2년이 걸렸다) 보안이 강화됐다(1994년에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절규’ 연작 중 한 점이 도난당했다).
미닫이 받침대(sliding racks) 위에 실린 전시작들은 전동식 금속 문 안에 보관된다. 뭉크 미술관은 판화 1만8000점, 드로잉 4500점, 스케치북180권, 그리고 편지와 일기들을 소장하고있다. 편지와 일기의 영어 번역판은 오는 10월 온라인 전시에 들어간다. 뭉크의 유품 중 1927년산 무비 카메라는 금고 안에 보관돼있다. 이 미술관의 소장품은 총 4만 점에 이르는데 전시 공간이 부족해 전시된 작품은 그중 극히 일부(only a fraction)에 지나지않는다.
부둣가에 있는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진보적인 디자인의 새 대형 미술관을 설립할 계획이었지만 시 정책상의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올 가을엔 장소 문제가 해결될 전망이다.
뭉크는 아케르 강 동쪽의 빈민 지역 그루네르로카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의무감이 투철한 군의관(a pious army doctor)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줬다. 뭉크는 20대 중반까지 가족과 함께 습하고 비위생적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예전의 거리 모습이 잘 보존된 이 지역엔 요즘 올라프 리예스 광장 주변으로 조제식품점(delicatessen)들과 스페인식 전채요리를 파는 식당(tapas bar)들이 늘어서 있다.
나뭇잎이 우거진 광장에선 거리의 악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하늘색 전차가 지나다닌다. 뭉크는 이 지역에 부둣가 공장 근로자들의 기숙사가 모여 있던 시절 자신의 아파트 창문에서 거리를 내려다 보며 그림을 그렸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외벽에 돌을 붙인 그 아파트 건물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의 누이 조피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포스페이엔가 7번지와 그가 ‘병든 아이(The Sick Child)’를 그린 슈스 플라스 1번지 등이다.크리스티아니아의 상류층이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다니던 카를 요한 거리에 뭉크의 첫 번째 스튜디오가 있었다. 당시의 크림치즈색에서 지금은 짙은 겨자색으로 변한 신고딕 양식의 스튜디오 건물 앞엔 뭉크의 초기 스승이었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동상이 있다.
아랫층 카페는 허무주의자(nihilist)한스 예거(그의 초상화가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뭉크 전시실에 걸려 있다)가 이끌던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bohemian, 예술가등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집결지였다. 당시 예술가들이 자주 찾던 또 다른 카페의 한쪽 벽에는 크로그의 아들 페르가 1890년대 그곳의 손님들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그림 한가운데에 흰 턱수염의 크로그가 보이고 뭉크와 예거가 함께 앉아 있으며 헨릭 입센(뭉크는 그의 연극 무대를 디자인 했다)은 입구 쪽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다.
이 지역은 부둣가 홍등가(red-light district)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뭉크는 그곳에서 실크 모자를 쓴(top-hatted) 신사들이 캬바레 공연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leering at cabaret acts) 모습을 스케치했다. 한편 여성해방(women’s emancipation) 움직임과 맞물려 보헤미안 사이에 성행했던 간통과 그에 따른 질투는 뭉크의 ‘생의 프리즈(The Frieze of Life)’ 연작의 주제가 됐다. 이들 작품에서 여성은 뱀파이어와 성모 마리아로 묘사됐다.
카를 요한 거리를 그린 뭉크의 그림들은 점 묘법으로 묘사된 우산(pointillist parasol)들이 눈길을 끄는 초기 작품과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얼굴 없는 사람들로 대표되는 후기 작품으로 나뉜다.신경쇠약증에서 회복된 뭉크는 도시 생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두 편의 기념비적인(monumental) 연작을 제작했다.
오슬로대의 아울라(축제를 여는 큰 홀)에는 한 어부와 농부 어머니를 그린 대형 캔버스들이 걸려 있다. 역사가였던 뭉크삼촌의 애국심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뭉크는 피요르드 일출의 장관을 묘사한 ‘태양’연작도 제작했다. 사람들이 미술 작품 앞에서면 “교회에서 하듯”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이 반영된 그림이다. 이 연작은 1911년에 한 경연대회 출품용으로 제작됐지만 작품을 둘러싼 논란으로 전시되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1917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홀에서 지휘를 하기전 이 작품에 매료돼 한참 동안 서 있었다.또 아인슈타인은 이 작품을 배경으로 강연을 했다.지난해 노르웨이에서 극우 광신자안데르스 브레비크가 77명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한 후 이 그림 앞에 조문록(a book of condolence)이 비치됐었다.1923년 뭉크는 그루네르로카 동쪽에 있는 프레이야 초콜릿 공장의 여직원 구내식당 벽에 띠 모양의 벽화(frieze)를 그렸다.
전원 풍경을 담은 이 12점의 작품은 1934년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쪽 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구내식당(현재 소유주는 식품업체 크래프트다)은 미리 예약을 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지금도 흰색 머리망을 쓴 종업원들이 뭉크의 띠 벽화 밑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뭉크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오슬로에 있는 그의 묘는 입센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있다.
나치는 뭉크의 작품을 퇴폐적(degenerate)이라고 비난했고 그의 장례식에 나치의 상징인 어금꺽쇠 십자표지(swastikas)를 들고 나타나 분위기를 망쳤다. 하지만 아울라의 회화 작품들은 나치 점령기 동안 노르웨이의 은광에 숨겨져 보존됐다. ‘태양’이 아울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곧 노르웨이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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