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칼 퇴근에 저녁이 즐겁다
6시 칼 퇴근에 저녁이 즐겁다
#1. 8월 1일 수요일 오후 6시가 되자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중소기업중앙회 건물 안 스피커에서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집에 가자 망설이지 말고 집에 가자 눈치 볼 필요 없어.집에 가자 내일 일은 내일로, 오늘 일과는 모두 끝났으니 걱정 말고 집에 가자….” 이 노래는 수퍼키드가 부른 ‘집에 가자’라는 곡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건물에는 지난해 1월부터 매주 수요일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직원들은 서류를 정리하고 컴퓨터 전원을 끄기 시작했다. 기획조정실 기획인사부에 근무하는 임춘호(47) 부장은 “수요일은 6시만 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바로 퇴근한다”며 “빨리 들어가서 가족들과 올림픽 경기를 시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 한국타이어에서 근무하는 이정민(33)대리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가 되면 서울 강남에 위치한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운다. 이씨는 그동안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었지만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년 전 한국타이어가 매주 금요일을 가족과 함께하는 ‘패밀리데이’로 지정, 퇴근시간이 6시로 정해지면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됐다. 또 한국타이어는 금요일에는 캐주얼 복장으로 출근할 수 있게 했다.
이정민씨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건물론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으로 여행을 떠나는 직원도 많다”고 말했다.일주일에 하루, 또는 한 달에 1~2차례 정시 퇴근을 하는 ‘패밀리데이(가정의 날)’는 이미 익숙한 제도다. 패밀리데이는 2006년 중반 선진국처럼 가족친화적인 근무환경을 만들기 위해 국내 기업들이 도입하기 시작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2193시간으로 30개국 가운데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OECD 평균인 1749시간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기업들은 패밀리데이를 통해 직원들의 노동시간을 줄여 만족도를 높이고, 초과근무에 따른 야근 수당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제도 시행 이후 기업들은 정시 퇴근을 알리고 근무 시간이 지나면 건물을 소등하는 등의 캠페인을 벌여왔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이 비용 절감차원에서 신규 채용 대신 연장근로를 선호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는 조직문화도 여전히 남아 있어 이런 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일부 기업에서는 제도를 없애기도 했다.
정시 퇴근 권장기업 45%최근 말로만 그쳤던 패밀리데이 제도가 다시 자리를 잡는 모습이다. 경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직장에 매이기보다는 내 시간을 원하는 인식이 퍼진데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역시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드는 하나의 방편으로 정시 퇴근 개념을 적극 받아들이면서다. 최근에는 야근 많기로 소문난 두 부처인 금융위원회가 4월부터, 기획재정부는 5월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을 패밀리데이로 지정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일주일 내내 거의 야근하기 때문에 휴가를 내지 않으면 평일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며 “이번 패밀리데이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정시 퇴근을 권장하는 기업이 늘면서 상사 눈치를 보며 퇴근을 꺼리던 직원도 이젠 편안하게 패밀리데이를 챙기는 분위기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예전엔 오후 8시를 넘겨 일이 끝나는 데다 상사의 맥주 한잔이 빠지지 않아 집에 자정이 넘어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상사의 눈치보지 않고 퇴근해 나만의 시간을 보낼수 있어 매우 좋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기업도많다. 잡코리아에 따르면 정시 퇴근을 한 직장인은 전체 5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복수응답)로 ‘업무량이 많아서’라는 응답이 42.4%로 가장 많았다. 또‘상사들이 일찍 퇴근하지 않아서 아랫사람들이 눈치를 보느라’도 30.6%나 됐다. 대기업에 다니는 A과장은 “회사 차원에서 패밀리데이를 실시할 것이라는 소식이 몇 년째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실시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또 다른 기업에 다니는 B씨는 “회사에서는 일찍 퇴근하라고 하지만기본적으로 일이 많아 퇴근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도 2006년 시행 이후 1년여 만에 제도를 없앴다가 지난해 다시 부활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정시 퇴근을 위해 사무공
간을 소등하거나 야근이 필요할 경우 상사에게 허락을 맡고 근무하는 등 여러 방법을 써왔지만 업무상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정시 퇴근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제도가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최고경영자(CEO)와 직원들이 함께 적극 나서야 한다.기업은행은 2007년부터 노사 협약을 통해 매주 수요일 정시 퇴근 제도를 정착시키고있다. 조준희 기업은행장은 지난해 퇴근이 늦은 영업점의 지점장을 불러 다른 영업점보다 퇴근시각이 늦은 이유를 듣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했다.
또 경영평가에 직원들의 퇴근시간을 표시하는 ‘퇴근문화 개선도’ 반영 비율을 기존 30점(1000점 만점)에서 60점으로 올렸다. 이런 노력 덕분에 평균 오후9~11시였던 퇴근시각을 5월에 오후 6시38분으로 줄였다.야근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권에서는 일주일에 하루 가정의 날만큼은 엄격하게 정시 퇴근을 지키고 있다. 기업은행과 신한은행 등은 가정의 날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가 해당 지점 평가에 반영되고 있다.
직원의 컴퓨터가 꺼진 시간, 지점의 문을 잠그고 보안업체에 이를 알리는 시간을 평균을 내서 점수화한다. 기업은행에서는 오후 6시 30분이 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대상도 저녁 7시 이후 컴퓨터에 접속한 사람이 있으면 다음날 전산을 통해 사장에게보고하며 각 부서 임원에게도 알린다. 누적된 정시 퇴근 현황 자료는 ‘정시퇴근율’이라는 수치로 관리해 연말 인사고과와 부서평가에 반영된다. 야간 업무가 필요할 경우에는 사전에 ‘정시 퇴근 미시행 신청서’를 작성해 부서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현대해상은 퇴근시간 이후에는 컴퓨터를 켜지 못하게 전원을 꺼버리고 노동조합과 함께 감시반을 편성해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점검한다. 중앙대 이병훈 사회학과 교수는“정시 퇴근은 복지차원인 만큼 앞으로 더 정착돼야 한다”며 “여전히 눈치 보는 경우도 있는 만큼 말로만 그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CEO가 직접 독려해야개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업무 효율성도 높게 마련이다.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대상은 2009년 3월부터 매주 수요일 6시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직원들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6시면 회사를 떠난다. 업무량이 많더라도 저녁 7시 전까지는 무조건 퇴근해야 한다. 시행 이후 2009년 대상의 주력 제품인 고추장의 주원료를 밀가루에서 쌀로 바꾸고, 카레나 수프 등에도 쌀을 활용한 제품을 내는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2008년 9203억원이었던 대상 매출액은 2009년 1조90억원, 2011년에는 1조4000억원을 넘어섰다. 고추장의 주요 성분을 쌀로 바꾼 건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생각한 한 직원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대상 관계자는 “자리에 앉아서 자료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여유롭게 여가를 즐기면서 생각하는 게 업무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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