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토익 지상주의’에 빠져 허우적
일본 기업 ‘토익 지상주의’에 빠져 허우적
일반 제조업부터 은행 등 금융권까지 토익은 이미 일본 비즈니스 업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채용·승진의 기준으로 토익을 사용하는 기업에서는 그 점수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 그러나 토익이 진짜 영어실력을 측정하는 기준이라 말하기는 어렵다.‘토익 지상주의’ 속에서 시험 준비에 쫓기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더불어 라쿠텐, 유니리버 등 외국계 기업들은 어떻게 토익에 의존하지 않고 사원의 영어실력을 판단하는지 들어봤다.
2010년 영어공용화를 선언한 모 의류회사의 아침은 분주하다. 아침 6시 미나토구에 위치한 본사 빌딩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관리부에 근무하는 가가와 마사히코(가명·37)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작년 9월 7시에 업무를 시작해 오후 4시에 퇴근하도록 근무시간을 조정했습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가 아니라 토익 때문입니다.” 4시 이후 주 2회씩 토익 점수가 700점을 밑도는 사원들을 위한 강의가 열리는데 바쁜 업무로 유명한 회사지만 사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예습과 복습을 빼놓지 않는다.
토익 때문에 회화 학원 그만둬가가와 씨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며 “지난해까지는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을 이수해야해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700점 이하 사원들은 우선 PC 테스트를 통해 초·중·상급으로 분류한다. 이 레벨에 따라 리스닝, 문법 등을 배우고, 한 달에 한번 강사와 전화 회의를 해야 한다. 꽤 체계적인 시스템이지만 평판은 나빴다. 엄청난 분량 때문이다. “매주 10시간, 700점을 달성할때까지 영원히 공부하라는 식입니다.
더구나 몇 시간 공부했는지 직속 상사가 온라인으로 감시할 수 있어요. 목요일까지 2시간밖에 접속하지 않았으면 ‘주말에 하려고 그러냐’는 핀잔을 들어야 합니다.” 한 직원의 불평이다.최종적으로는 의무인 ‘주 10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토익 시험 자체를 치를 수 없다.
또 전 회보다 점수가 오르지 않으면, 5만엔에 가까운 응시료를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부담감에 웃지 못할 일도 종종 벌어진다. 프로그램에 들어가 엔터키를 연속해 누르면 일단 접속한 것으로 처리되는데 이 때문에 공부한 척 눈속임을 하는 사원도 속출했다. 당연히 실력은 늘지 않았고 700점을 넘지 못하는 사원은 여전히 절반 이상이다. 두고 볼 수 없게된 회사는 온라인 학습을 중단하고 오프라인 강의로 방식을 바꿨다.
여름 휴가에 닌텐도DS로 토익 대책 게임을 하거나 스카이프로 필리핀 강사에게 영어회화를 배우는 모습 등도 최근의 변화다.700점을 넘은 사원은 회사의 지원 하에 베를리츠(영어회화학원)에 다닐 수 있다. 여기서도 부담은 그대로다. 총 12회의 강의 중 2번을 빠지면 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기때문이다. 이 정도면 영어 전쟁 수준이다.
영어공용어화를 발표한 다른 인터넷 기업에도 ‘토익 지상주의’가 완전히 침투했다.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매니저로 진급하려면 600점 이상의 토익 점수를 받아야 한다. 이때문에 사원들의 열기는 무서울 정도다. 사내 서비스를 담당하는 다카하시 유지(가명·30)씨는 “어느 누구도 영어를 사용해 어떤 부서에서 어떻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며 “오로지 점수 향상을 노릴 뿐이다”이라고 꼬집었다.
사원들이 월급과 직결되는 토익에 매달리지만 정작 왜 공부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현상도 나타난다. 사원들이 속속 영어회화 학원을 그만두고 있다는 것. 확실히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면 대화는 능숙해진다. 그러나 중요한 토익 점수향상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연간 수십만엔에 달하는 학원비는 보통 사비로 충당해야 하는데 ‘비용 대비 효과가 낮다’는 뜻이다.
한 사원은 “공식적인 토익 테스트는 연 9회지만 사내에서 특별 테스트가 거의 매일 이뤄진다”며 “그 때마다 점수를 올리지 않으면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대졸 신입사원 역시 토익 성적 기준이 엄격해졌다. 지난해는 650점이었지만 올해는 최소 730점이라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다행히 회사측도 공부를 장려하기 때문에 ‘이렇게 바쁜데 야근은 안 하냐’는 잔소리를 들을 일은 없다. 또 토익은 ‘숫자로 나타나는 만큼 평가가 공정하기 때문에 의욕이 생긴다’는 호평도 있다. 하지만 다카하시 씨는 “토익 공부에 빠지고 나서부터 직원들의 창의력은 사라졌다”며 “토익에 대한 부담이 회사의 성장 원천이던 벤처 정신을 해치고 시대착오적인 관료주의만을 퍼뜨릴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서비스를 주로 다루는 이 회사의 경우 약 70%의 직원이 업무상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창의력 사라진다는 우려 커져한 대형은행 지점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스나가 마사히코(가명·33)씨는 토익의 구속을 받는 자신을 느끼고 있다. 그는 “며칠 전 인사과의 압력에 못 이겨 시험을 치렀는데 업무 평가와는 관계없으니 일단 테스트를 받으라는 식이었다”며 “인사야 어찌되든 행원의 레벨을 파악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이 은행은 아시아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거점 확충을 서두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사원의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일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나가 씨는 “솔직히 ‘또야?’하는심정”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그도 그럴 것이 스나가씨 세대는 입사 이래 줄곧 공부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공부 내용이 매번 바뀌어 왔다. 그는 “10년 전에는 증권화, 5년 전에는 금융파생상품이나 채권 등 지겹게 공부만 해왔다”며 “하지만 그 지식들은 리먼 쇼크 이후 전부 필요 없는 게 됐다”고 말했다.
분명 글로벌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하지만 해외 진출이 순수하게 해외기업을 상대로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진심으로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게 그의 속마음이다. “이번에 들어온신입사원이 입사 전 이미 900점을 땄다고 하면 초조해지죠. ‘나는 500점’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압박감 때문에 스나가씨 주변에는 토익 공부를 하고 있는지에 따라 행원들 간에 곧잘 신경전이 벌어진다고 한다.
말로는 ‘안하고 있다’면서 실제로는 너도나도 토익에 매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일본 기업의 사원들이 토익 점수 향상에 핏대를 세우고 있지만 정작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외국계나 컨설팅회사들은 그다지 토익에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시티뱅크, 골드만 삭스 등 외국계 기업을 두루 거친 시오노 마코토 파트너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토익은 일본인들만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제도입니다. 회화 능력을 경시하고 시험이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고득점자가 많지만 정작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당사 면접대상자들 전부 800점을 넘지만 ‘영어로 서브프라임론의 구조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면 10명 중 1명도 제대로 대답을 못합니다”회화 실력이 더욱 중요그렇다면 외국계 기업들은 지원자들의 진짜 영어실력을 어떻게 평가할까? 라 쿠텐은2010년 2월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의 지시로영어공용화를 시작했다.
약 2년 반의 도입기간을 거쳐 올 7월부터 그룹 사원 약 7600명을 대상으로 전면 실시한다. 동시에 영어 능력이 인사 평가의 ‘최중요 항목’으로 작용된다. 라쿠텐은 토익을 기준으로 영어 실력의 ‘필수 점수’를 정해놓고 있다. 2012년 4월 신입사원은 700점 이상이 돼야 지원할 수 있다. 기존 사원은 최고 800점부터 각 직책마다 5단계로 나눠지는데 600점 이하면 불합격이다.
이렇게 엄격한 기준에도 최저 레벨인 ‘레드존’에 해당하는 사원은 3%에 지나지 않는다.최근 1년간 평균 점수가 180점 개선됐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점수를 향상시킨 요인은 회사의 적극적인 강습 대책이다. 외부 강사를 고용해 매일 업무시간이 끝나는 저녁부터 자율 참가형 수업을 실시한다. 성적이 부진한 사원을 위해 오전 중에도 보충수업을 진행하고 희망할 경우 주말 강습도 준비돼 있다.
수업시간외에도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각 층마다 300석의 자습 공간을 설치했다. 언뜻 보기에는 라쿠텐 역시 토익에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인 목표는 단순한 점수 향상이 아니다. 라쿠텐에서는 회의의 약 70%가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툴러도 무조건 말을 꺼내는 일이다. 아무리 토익 점수가 높아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영어공용화 도입 후 토익등 기초 공부에 매진한 지난 2년 반을 제1기라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제 2기라 할 수 있다.
당연히 2기의 중점은 사원들의 말하기 능력을 일정 수준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메르세데스벤츠 일본(MBJ)은 대표적인 수입업체다. 세계 각 거점에서 차를 사들여 일본 소비자들에게 파는 일이다 보니 부서에 관계없이 영어를 사용할 일이 꽤 많다. 본사로부터 도착하는 정보는 모두 영어다.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전부 영어로 이뤄진다. MBJ의 마틴 허슬 인사부장은 “토익도 하나의 중요한 지표지만 우리가 추구하는것은 실천적 영어실력을 가진 인재”라고 강조한다.
MBJ는 신입 채용과정에서 영어 면접이나 적성검사와 함께 희망부서에서 2주간의 인턴십을 진행한다. 실제 업무 현장에서 통할만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부서 직원들이 직접 심사하는 게 목적이다. 토익 점수도 일정수준 적용하지만 최종적으로 부딪히는 영어 면접이 절대적이다. 토익 최소 기준 점수도 없다. 신입사원에게는 영어실력을 향상시킬 기회도 주어진다.
입사하면 독일로 3개월간 연수를 떠나는 데 다시 돌아와 일을 하더라도 본사 직원과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입 사원에게는 현장 영어를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럭스(LUXS)’나 ‘도브(DOVE)’ 등 스킨케어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유니리버 재팬 역시 현장형 영어실력을 강조한다. 신입사원채용 시 720점 전후의 토익 커트라인을 마련해놓고 있지만 회화실력이 뛰어나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2005년 무렵까지는 각국 현지법인이 각자 재량에 따라 경영했기 때문에 뛰어난 영어 실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각국 법인간 연대를 강화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게다가 전체 직원이 600명 정도기 때문에 누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당연히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영어실력이 필수다. 유니리버 재팬은 입사4~5년차의 젊은 사원을 매년 해외 거점에 파견한다. 영어실력 향상은 원칙적으로 본인 노력에 달렸겠지만 업무에서 직접 경험하며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본래 토익은 ‘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의 약자다.
국제 무대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시험한다는 의미인데 당연히 회화가 전제다. 그렇지만 지금의 토익이 영어 회화 실력을 측정하는 지표로써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아무래도 의문이다. ‘토익 지상주의’에 빠진 일본 기업이 맹목적인 사랑에서 빠져 나와
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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