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어린이 세상
20세기는 어린이 세상
20세기의 어린이들은 운이 좋았다(Kids had it good in the 20th century). 디자이너들은 레고와 팅커토이, 루빅스 큐브 같은 획기적인 장난감(revolutionary playthings)을 개발했다. 그런 장난감들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유익했다(made to be both fun and good for them). 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천재 건축가들은 환상적인 학교를 지었다. 사상 최초로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playroom)도 생겼다. 그곳에서는 슬링키(스프링을 이용한 장난감)와 검비(찰흙 인형 캐릭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바비 인형이 남자친구 켄과 신나게 놀았다.
상상력을 동원한 재미있는 놀이는 창조적인 표현(creative expression)으로 여겨졌다.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리는 전시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20세기는 ‘어린이의 세기(Century of the Child)’였다. MoMA의 현대 디자인 부문 큐레이터 줄리엣 킨친(56)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창조적 사고의 핵심에 이르게 만드는 원칙과 쟁점들(principles and issues that take us to the core of thinking about creativity in every aspect of our culture)을 살펴보면 디자인과 어린이들이 현대 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격동의 20세기에(in the tumult of the last century) 좌익과 우익, 민주와 독재를 불문하고 각국 정부들은 어린이들과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 아낌없이 투자했다(investedlavishly in children and their spaces). 그것이 미래를 장악하고 거기에 자국의 국기를 꽂는 방법(a way to seize the future and plant the national flag there)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상향은 순식간에 반이상향으로 바뀔수 있다(The utopian can shade quite quickly into the dystopian)”고 킨친은 말했다. “우리는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이번 전시회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어린이 집단 교육원과 소련의 유치원이 어린이들을 수용했던 현대적인 시설들을 소개한다.
그런 시설들은 그들 부모들의 구식 견해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away from the old-fashioned views and tastes of their parents). 무엇이든 잘 받아들이는 (receptive) 어린이들은 급진적인 현대 사상을 고취시키고 현대적인 사물들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에 딱 좋은 대상(the ideal audience)이었다. 동유럽의 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이렇게 회상했다. “스탈린은 어린이들에게 꽤 평판이 좋았다(Stalin had quite a decent reputation among the youngsters).부모님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우리에겐 더없이 좋은 시절이었다(Our parents were quaking with fear while we were having a great time).”
이 전시회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푸트니크 놀이터(소련에서 발사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테마로 구성됐다)와 바비의 드림 하우스, 크리에이티브 플레이싱즈의 목재 장난감들이 나란히 전시됐다. 어른과 분리된 어린이만의 세계가 존재하는 바람직한 문화를 보여주려는 의도다(to give a picture of a culture where children were separate but better).
킨친은“한계를 뛰어넘고(pushing the boundaries)실험을 즐기는 20세기의 자유로운 어린이들은 혁신을 꿈꾸는 어른들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the liberated children of the 20th century were even held up as a model for adult innovators)”고 말했다. 바우하우스(Bauhaus) 같은 훌륭한 디자인 학교는 어른들을 위한 “커다란 놀이터(a big playpen)”와 같은 개념으로 구상됐다.
킨친은 전시회 카탈로그에 “어린이들은 현대적인 것의 탄생을 이끈 광범위한 변화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children were the living symbol of the sweeping changes that ushered in the birth of the modern)”고 썼다. 1927년 아방가르드 화가 윈덤 루이스는 “아동기와 어린이에 대한 숭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지나친 어린이 중시문화(what now amounts to a cult of childhood and of the child)”에 불만을 표했다. 햄버글러(Hamburglar, 맥도널드의 캐릭터 중 하나로 햄버거 강도 이미지)가 나오기 50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어린이는 어떨까? 여자 아이들은 허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mid riff-bearing)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이 어른스러운 옷(adult-only clothes)을 입는다. 세련된 디자인의 목재 장난감은 컴퓨터 게임에 자리를 내주었다(High-design wooden toys have been displaced by games on the computer). 부모들은 자녀의 사이버 공간을 감시하려고(to police their kids’cyberspace) 컴퓨터를 아이들 놀이방에서 거실이나 식당으로 내왔다. 그래서 아버지들도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다.
수많은 부모와 아이가 만화책을 주제로 한 영화(comicbook movie)를 보러 극장으로 몰린다. 부모와 자녀 모두가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Parents and children seem to be living in a shared adolescent twilight). 킨친은 “여러 면에서 아동기가 사라진 것 같다(I think that in many ways childhood has gone off the radar)”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 어린이들이 ‘현대적’ 사상과 디자인이 나오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갔는지도 모른다(Maybe things are just back to how they were before “modern” ideas and designs came along). 킨친은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유럽 역사 대부분 동안 인생에서 아동기는 하나의 독립된 시기로 존재하지 않았다(for most of European history, childhood didn’t exist as a separate epoch in our lives)고 지적했다.
아이들은 키가 작고 능력이 떨어지는 어른으로 여겨졌다(Kids were thought of as short adults with inferior skills). 그렇다면 어린이들이 20세기 동안만 제대로 인정받다가 이제 다시 몸집 작은 성인으로 돌아간 듯하다(Perhaps now children have returned to being undersized grownups).아니면 우리 어른들이 키 큰 아이가 됐든가 말이다(Or maybe it’s we grownups who have become tall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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